변화의 시작
새벽녘이 다가오기도 전에 루옌의 성에 살아 있는 오크는 남아 있지 않았다. 깜깜한 야밤의 기습이었고 단 두 사람이 벌인 살육이었기에 오크가 대처 할 수 없었다.
검을 든 자들의 싸움이긴 한데 단 한 번도 격검이 일어나지 않은 전투였다. 아니 전투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테츠는 이미 검을 멈추었고 하츠는 나머지 잔당을 계속 쓸어 갔다. 사냥을 나갔던 몇 무리의 오크들이 고기를 짊어지고 루옌의 성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테츠는 무너지지 않은 망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가 있었다. 마테니는 그의 곁에서 조용히 사주를 경계했다. 이미 주변에 살아남은 오크는 없다.
성력이 뒷받침해 주었지만, 아수라멸천검을 칠성 내공으로 사용했으니 그의 모든 내력이 완전히 빠져나간 상태였고 금세 들어찬다고 생각했더니 들어찬 것은 내공이 아니라 라마단의 정수였다.
라마단의 정수가 단전에 틀어박혀 무한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수천년 동안 단련되어온 라마단의 정수는 끝없는 에너지를 뿜어 올렸고 그것은 다시 성력과 융합되어 테츠의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운기조식으로 천마심공(天魔心功)을 펼쳤고 천마심공은 흩어졌던 내공을 빠르게 집중시켰다.
테츠의 눈썹이 꿈틀했다. 단전에 모인 내공은 빠르게 라마단의 정수로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테츠는 거부하려 했으나 라마단의 정수는 내공이 모이자 무섭게 빨아들였다.
테츠는 단전에서 다시 내공을 뽑아내 일주천 해보았다. 라마단은 테츠의 제어에 따라 흡수한 내공을 순순히 뿜어내기도 하였다. 마치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내공과 라마단, 그리고 성력 전혀 성격이 다른 힘이 충돌하는 것보다 상생을 도모하여 모두 한 점으로 융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의 도화선은 성력의 사용이었고 아수라멸천검이 불이 되어 타올랐다.
'굳이 내공을 라마단과 따로 분리할 필요는 없겠구나. 라마단의 정수가 단전에 자리 잡았고 내공 또한 크게 늘었으니 모든 것을 순리대로 맡기는 것이 좋겠구나.'
테츠는 모든 내공을 단전 즉 라마단의 정수로 갈무리 했다.
"이곳은 이제 조용합니다. 곧 새벽이슬이 내릴 것 같습니다."
하츠가 아래서 외쳤다.
테츠가 두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내기는?"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내기를 한 제가 멍청했죠."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러나 이렇게 돌아가면 성황께 엄청난 꾸지람을 받을 겁니다."
"마테니 편지 한 장 적자."
"네, 마스터."
"너, 조금 긴장했구나."
"너무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힘을 보았기에 그렇습니다."
"음, 뭐 그렇다고 마음대로 휘두를 힘은 아니다. 나도 시험 삼아 해본 것뿐이다. 그런 힘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성력을 사용하면 금제가 발동하여 힘을 제안하는데 어떻게 그 금제를 풀었습니까? 금제가 풀리는 것은 죽고 난 다음 일 텐데···?"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테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력이 풀린 이유를 알겠다. 나는 이미 죽었거든. 그것도 몇 달이나 사체로 살아갔었지"
"네? 농담도 잘하시네요. 하하. 사람이 죽은 뒤 몇 달 뒤에 어떻게 살아 납니까? 시체는 금세 부패 될 겁니다."
"글쎄, 운이 닿아 기연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테츠는 죽었다. 라마단의 마지막 계승자 아잠바크는 분명히 죽은 테츠의 시체를 불사의 기술로 되살렸다. 테츠는 죽은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심장이 뛰지 않는 시체로 몇 달을 살았다.
나중에 라마단의 정수를 받고 시체로부터 심장을 뛰게 하여 다시 되살아 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성력의 금제가 풀렸던 것이고 풍신왕과의 싸움이 계기가 되어 잠자고 있던 성력이 깨어난 것이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금제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이 신의 힘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저주 같은 거였다.
만약 브레니아스가의 핏줄이 이런 힘을 무한으로 펼쳐 낼 수 있다면 오늘날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과거 역사 속에 브레니아스 가문의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육십여 년 전 악룡 데블 와이어가 세상을 공포로 물들였고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말살해 갈 때 인간을 대표하여 일어선 기사들의 선봉에 있던 사람이 잉그람 브레니아스였다.
그는 악룡의 패거리를 모두 물리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인간을 구한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속된말로 재미 삼아 악룡 데블 와이어가 잉그람에게 한 대 쥐어박히고 숨이 끊어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 성력의 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하니까. 그렇다면 성황 잉그람 이전의 세대는 왜 이 힘을 발현하지 못했을까? 역사서를 봐도 잉그람 이전 세대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성황 잉그람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했으며 악룡 데빌 와이어를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원한 영웅이 되었다. 한마디로 그의 존재는 미스터리였으며 그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성력을 사용했으며 마지막으로 신성불가침 조약이 만들어진 것까지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마테니는 새 모양으로 만들어진 종이 즉 생텀 페이퍼를 하츠에게 날려 보냈다.
"야생왕 형님의 기술이군. 생텀 페이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네놈도 성력의 힘을 받았군."
"생텀 페이퍼에 모든 내용을 담았으니 영감에게 보여 주면 이해할 것이다. 그러니 이 길로 어반마르스로 돌아가라."
"칠무신의 이름으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그것 외에 보고할 사항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아, 과대 포장은 절대 하지 말기를. 그 영감이 흥분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죄송하지만 오늘 본 일은 그대로 전할 생각입니다. 칠무신은 상황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순 없습니다."
하츠의 표정을 본 테츠는 더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하츠는 간단한 손동작으로 예를 취하더니 어둠 속으로 조용히 걸어 사라져 갔다.
***
"조금만 더 가면 루옌의 성이다. 모두 준비해라."
엘빈의 말에 스카레이와 웨우드는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테츠의 말대로 오만이나 모여 있는 오크 무리를 향해 겁도 없이 돌격하고 있었다.
"저 언덕만 넘으면 루옌의 성이 보일 것이다. 지금부터는 경공으로 이동한다. 말을 모두 묶어 두어라."
말에서 내린 엘빈은 제자들의 무기를 점검하고 준비가 끝나자 천마행공으로 언덕을 향해 내달렸다.
처참하게 폐허가 된 루옌이 성을 바라보던 엘빈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시력을 높였다.
"저건 오크의 시체 같은데? 모두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
엘빈은 천마행공으로 루옌의 성으로 날아내렸다. 근처까지 날아오자 확실히 쓰러진 오크는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동도 없는 시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엘빈이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자 스카레이와 웨우드가 제자들을 이끌고 달려 내려왔다.
"이게 뭡니까?"
"오크의 시체지 뭐긴 뭐냐?"
"으, 윽, 이건 그냥 저며 놓았는데요?"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오크를 이렇게 난도질해 놓았는지?"
엘빈은 말짱한 모습으로 쓰러진 오크의 가슴 부분을 살폈다. 작은 +모양의 상처. 분명히 하츠의 솜씨다. 하지만 반대편에 육편이 되어 있는 것은 하츠의 솜씨가 아니었다.
'교주님의 솜씨인가? 어제저녁 하츠와 떠난 것은 이 때문인가?'
"모두 주변을 경계하라 살아남은 오크가 있을지 모른다."
루옌의 성은 롱홀드에 있는 성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다. 원래 잔버크와의 경계점을 이루는 곳에 지워진 어찌 보면 지역간 무역을 원활히 하기 위한 일종의 쉼터 개념의 성이었다.
오랜 여행으로 지친 말과 상인을 위한 쉼터였다. 로옌에서 사나흘 더 가면 엠버스피어가 나온다. 엠버스피어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쉼터인 셈이다.
오크의 침공 때 솔라리스군은 루옌성에서 치열한 격전을 펼쳤다. 루옌성이 공략당하면 오크가 잔버크로 밀려오기 때문에 루옌성을 끝까지 사수하려 했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크는 아예 성의 성벽을 부수고 들어와 루옌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 그 폐허 속에 누워 있은 것은 오롯이 오크의 시체들이었다. 지독한 냄새. 굳어버린 피 냄새와 뱃속의 내용물들이 성안에 가득 쌓여 있었다.
엘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간밤에 무엇이 이들을 공격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공격했다고는 하나 상대는 사만이라는 엄청난 머릿수를 가진 오크무리다. 상상해서 될 것이 있고 안되는 것이 있다.
아무리 칠무신이 대단하다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수치다. 대체로 깨끗한 몸 상태를 가지고 있는 오크는 모두 칠무신 하츠에게 공격당한 오크들이다.
"스승님 성을 한 바퀴 돌아 봤으나 살아 있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웨우드 전서구를 날려라. 되도록 많은 일꾼이 필요할 것 같구나."
엘빈은 엄두가 나지 않아 오크의 시체를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지옥의 악귀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남아 있는 것은 죽음과 토막 난 시체뿐이다.
"스승님 잠시 이쪽으로 와 보시겠습니까?"
스카레이의 말에 엘빈은 천마행공으로 성벽을 차고 날았다.
"여기를 보십시오."
빈 공간이다.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땅을 파헤쳐 놓은 모양으로 주변으로 흙더미가 사방으로 뿌려져 있었다. 깊게 움푹 팬 구덩이는 만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구덩이와 맞닿아 있는 성의 반 정도는 뭔가 예리한 것에 잘려 나간 것처럼 성벽의 석재가 깔끔히 절단된 모습이었다.
"메테오일까요?"
"메테오? 이 정도 메테오를 소환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기는 할까? 흔적으로 보아 이곳에 오크가 밀집해 있었고 하늘에서 뭔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거야. 땅이 팬 것과 흙이 튄 자국을 보면 더욱 확실하지. 하늘에서 뭔가 떨어졌다고. 도대체 어제 저녁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지?"
웨우드가 움푹 팬 구덩이를 보고 말했다.
"누군가 오크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오크를 태우려면 거대한 구덩이가 필요하긴 할 것 같군. 너무나 처참해. 오크가 불쌍해 보이기는 첨이다."
"이것이 교주님과 칠무신이 한 일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혹시 칠무신 일곱이 모두 이곳에 모였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럴지도 모르지. 이건 인간이 한 짓이 아니야. 사신이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다."
"교주님은 모든 걸 알고 계셨습니다. 저희보고 오늘날이 밝자마자 공격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지. 메흘린에게 전하라고 오크를 태우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셨어."
"아무래도 교주님과 칠무신 모두가 이곳에서 오크를 잡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칠무신은 정말 무서운 존재군요."
"조심해라.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 나중에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큰 곤욕을 당할 것이다. 이 시간 이후부터는 절대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쪽으로 간다. 잔버크로 넘어가서 테드버드 장로와 합류한다. 이곳의 상황은 메흘린 군사에게 알렸으니 그가 조처할 것이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메흘린은 이미 어제 새벽 돌아온 테츠와 마테니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전해 들은 상태였기에 굳이 엘빈이 보낸 전서구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테츠는 돌아온 이후 방 안에 들어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고 모든 내용은 마테니를 통해 들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테니는 메흘린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만으로는 실감이 잘 안 날 겁니다. 워낙 대단했기에···. 깜깜한 밤 한가운데 거대하고 밝게 빛나는 마황이 소환되었으니까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그걸 말하는 저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할 절도입니다."
"음, 브레니아스 가문의 사람들은 무언가 비밀이 많은가 보다. 칠무신의 능력 또한 그 힘이 하늘에 닿으니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 대항하겠는가? 애초부터 이 싸움은 승과 패가 결정 난 싸움이었어."
"잘하고 있는 겁니까? 너무나 거대한 힘을 보아서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잠시 잊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신을 모시고 있는 겁니다."
"나도 가끔 교주님을 보면 두려울 때가 있어.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보살핌으로, 그분의 뜻으로 만들어진 단체네. 그분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어. 마교인 이라면···."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