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냐 아니냐?
테츠는 찬찬히 검이 걸린 선반을 훑었다.
"이건 너무 가볍고. 이건 평범하고, 이건 너무 화려해."
딱 마음에 드는 검이 보이지 않았다. 데오뜨랑은 처음 잡는 순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보통 검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검신이 거무칙칙한 것이 평범한 재료로 만든 것이 아님을 즉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선반에 올려진 검은 대부분 명검에 속하고 어떤 것은 마법이 걸려 있지만 주재료가 강철로 되어 있어 아무리 잘 제련했다 해도 결국 검은 검일 뿐이다.
그중에 하나 마음에 드는 검을 손에 잡고 뽑아 올렸다. 등잔불 아래 검신이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역시 잘 벼렸어. 좋은 검이다. 검신 폭이 좁은 것이 흠이지만 견뎌내기만 하면 문제없겠지?"
테츠는 내공을 극한까지 올리고 천마삼검을 펼쳤다. 공간을 가르며 화려한 검식이 수놓아 졌다.
-탕
그러나 검은 테츠의 내공을 견디지 못하고 세 조각으로 터져 버렸다.
"이런, 제길."
테츠가 고개를 흔들자 마테니는 부러진 검을 검집안에 집어 넣고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황금좌에 얹혀 있는 검이 탐이 나긴 했지만 두 가지 부담이 있다.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 보통 힘으로는 들수 없는 무게와 검이 너무나 화려했다. 하얀색 가죽 검집에 금과 보석으로 가득 치장된 검이다. 불행히도 뽑을 수도 없어 나의 내용물도 확인 불가했다.
"이거 정말 실망인데? 팬텀 가드너의 무기고가 이 정도일 줄이야. 뭐 일반 귀족의 무기고와 차이가 없어. 이런 쓰레기만 잔뜩 넣어놓고 자물쇠를 많이도 채워 놨네."
"저는 좋은 걸 하나 주웠네요. 이거 괜찮아 보입니다."
마테니는 원래 단검을 즐겨 사용했던 암살자다. 테츠에게 검술을 배운 이후 아무래도 단검으로 검술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어 쇼트 소드를 사용했다. 롱소드와 비교하면 길이는 짧지만 단검보다는 길어 검술을 펼쳐 내는 데 무리가 없었다.
마테니의 손에 들린 것은 어찌 보면 평범하게 보이는 단검보다 조금 긴, 쇼트 소드라고 하기에는 짧아 보이는 어중간한 길이였다.
"그거 조금 길이가 마음에 안드데. 그래가지고 제대로 탈혼마검을 펼쳐 내겠어? 탈혼마검은 검이 길수록 효과도 크지."
"이걸 보세요. 하하."
마테니가 검자루에 장치를 누르자 검이 앞으로 뛰어나오며 손자루 이상 길이가 늘어났다. 그러니 이번에는 오히려 롱소드 쪽에 가깝게 변했다.
"오호? 그런 장치가? 그거 유용하겠다. 잘 벼린 명검 같은데?"
"헤헤, 마스터 덕분에 저도 하나 건집니다."
"그나저나 나는 왜 쓸만한 검이 없지 이곳의 검은 다 직선형이라 검법에 맞지 않아 유려한 곡선이 있는 도가 가장 좋은데 왜 그런 검은 없지?"
검이 세워진 곳을 모두 살핀 테츠의 표정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검 외에 도끼, 창, 투 핸드 소드까지 다 살펴본 테츠는 신음을 내질렀다.
"미쳤구나. 미쳤어. 이게 한 국가 왕국의 무기고냐? 시정잡배들이 펼쳐 놓은 난전도 이보다 낫겠다."
원하는 물건을 얻지 못한 테츠는 실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다 살폈다. 하지만 황금좌에 놓여있는 검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특색 있는 검은 없었다. 솔직히 테츠의 마음에 안 찰 뿐이지 여기 있는 검 한 자루만 세상에 풀려도 엄청난 이슈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명검이다.
테츠가 부러뜨린 검조차 한때 유명했던 솔라리스의 소드 마스터가 애용하던 명검이었던 사실을···.
"가자, 이거 헛걸음만 했구먼."
"마스터, 그래도 휘 둘만 한 거 하나 정도는 챙겨 가시죠."
"그 휘 둘만 한 거를 구하려고 왔지 않으냐? 조금 전에 너도 보지 않았냐? 네 손에 견디는 놈이 있어야 말이지. 제이미 이놈 새끼 도대체 어디다 검을 던져두고 기억도 못 하는 거지. 네 이놈을 요절낼 수도 없고 미치겠군. 잠깐만, 저거 좀 이상하다?"
테츠는 시선은 벽면에 부조된 조각상이 있었다. 벽면을 빙 둘러 가며 조각된 형상은 어떠한 영웅 한 명이 검을 쥐고 여러 개의 태양 중 하나를 반으로 가르는 모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는 어떤 신화를 모티브로 조각된 부조였다. 영웅이 태양을 검으로 갈랐고 그 영웅을 찬양하는 주변의 인물들이 모두 엎드려 있었다.
영웅은 당당한 자세로 검을 높이 지켜 들고 있었다. 단순히 벽면의 돌을 새겨 도드라지게 만든 부조였다.
"저 검이 매우 좋아 보이는구나."
"네에? 그냥 돌로 조각된 검이 아닙니까?"
"그래 돌로 조각된 검이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으냐?"
"무엇이 말입니까?"
"저 검 조각 말이야. 다른 조각하고 약간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어?"
그 말에 마테니는 벽에 조각된 영웅이 든 검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냥 평범한 돌 조각입니다. 마법의 흔적도 없고 특별히 다른 특징이 보이는 것도 없고. 어라? 이건 좀 이상하네요."
마테니가 가리킨 곳은 검을 잡은 영웅의 손이다. 만약 석조공이 이 부조를 조각했으면 매우 세심한 정열을 쏟았을 테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 집중해서 부조를 새겼을 것이다.
검을 잡은 영웅의 손가락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영웅의 손위에 그냥 검을 걸쳐 놓은 듯한 느낌이다. 검 자루를 감싸 쥐어야 할 영웅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없는 것이다.
"이상하다 그지?"
"네 확실히 이 부분은 이상하네요. 검을 잡고 있어야 할 손가락을 왜 조각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나중에 검을 따로 조각하여 붙이기 위해서지 검 조각은 따로 만들어져 이 부조에 덧붙여진 거다. 저리 비켜봐."
테츠는 손가락에 내공을 올리고 검 조각을 움켜잡고 벽에서 뜯어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기다란 검 조각 부조가 그대로 뜯겨 나왔다.
테츠는 단단한 바닥에 검 모양 조각을 탁탁 내리쳤다. 그러자 돌파편이 우수수 떨어지고 진짜 그 안에 숨겨진 검이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뭔가 이상하다 했다. 하하."
마테니도 호기심을 돋우고 다가와 검을 바라봤다.
언 듯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검이다. 오래 만져 땟국물이 꼬들꼬들하게 느껴지는 검 손잡이를 봐서는 누가 지독히도 오랫동안 만진 검 같았다.
언 듯 실망한 마테니의 눈빛을 감지한 테츠는 씩 웃으며 말했다.
"검을 외모로 판단하다니 마테니 넌 정말 한 참 멀었구나. 사람이랑 검은 자고로 오랫동안 사귀어봐야 그 내면을 알 수 있는 법. 검은 검집에서 뽑아 봐야 제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야."
-스스릉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며 시퍼런 예기를 줄기줄기 뿌렸다.
"좋아. 마음에 든다. 데오뜨랑에게는 조금 밀리지만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검이다."
검신은 생각보다 폭이 좁은 검인데도 불구하고 조금 전 부러졌던 검에 비해 그 빛깔이 짙은 갈색을 띠는 검이다. 그리고 검의 자루에서 시작된 검신의 몸 부분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테츠는 그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콜라다? 특이한 이름의 검이군. 날렵하고 가볍고 날카롭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테츠가 칠성의 내공을 콜라다에 밀어 넣자 검이 흔들리며 작게 떨었다.
"훌륭하다. 이 검의 재료는 일반 강철이 아니라 운철이구나."
운철은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 즉 운석을 의미한다.
테츠가 천마삼검을 펼쳐 내자 검은 더욱 긴 울림을 남기며 완벽하게 천마삼검을 견디어 냈다.
"됐다. 하하. 나도 원하는 것을 얻었다. 데오뜨랑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데오뜨랑 보다 더 날카로운 검이다."
마테니는 부서진 돌 조각 사이에서 작은 나무로 만든 팻말을 주워들었다. 그곳에는 작은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마테니는 알 수 없는 문자였다. 검에 새겨진 문자와 동일한 문자였다.
"이리 줘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살펴보자. 이건 고대어라서 너는 읽지 못할 거다."
'태양을 자른 영웅 엘시드의 검'
테츠가 나무 팻말을 움켜쥐자 순식간에 작은 잿더미로 화했다.
"누구의 검인들 무슨 상관이랴. 이제 내 것인데. 마테니 구할 것은 다 구했으니 나가자."
"넵, 마스터."
그들은 돌아올 때는 태연히 프릭 대장과 조카의 역할을 해대며 유유히 왕궁의 지하를 벗어났다. 그리고 기절시켜 놓은 프릭 대장과 기사 한 명에게 다시 옷을 입히고 잽싸게 왕궁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모두 잠들어 있었다.
"어이 마테니 검을 손에 쥐었으니 잘 드는지 확인해 보러 가야겠다."
"네? 어디로?"
순식간에 쏘아져 나가는 테츠를 뒤따라 마테니도 하늘을 나는 새처럼 쏘아져 나갔다.
***
작은 천막 안 제이미는 임시로 마련된 거처에서 쉬고 있었다. 이틀 내내 오크의 공세에 시달리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다. 사흘째 되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천막이 걷히고 제이미가 걸어 나오자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병이 잠시 졸다 움찔 놀라서 허리를 폈다.
"주무시지 않고 왜 나오셨습니까?"
"병사들의 아우성이 여기까지 들려오니 어찌 편히 눈을 붙이겠느냐? 내 오크 수백 마리 정도는 때려잡아야 잠시 눈을 붙일 거 같으니 내 말을 준비해라."
경비는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제이미 단장께서 출병하신다 하니 어서 갑옷과 말을 준비하도록 하시오."
"오크를 상대하는 데 갑옷은 필요 없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 말을 가져오너라."
제이미는 평상복 차림에 허리에 검 한 자루만 찬 상태였다.
말을 달리고 최전선으로 향하는 제이미는 아주 즐거운 표정이었다. 자정을 넘긴 야밤에도 오크의 습격은 끊이질 않고 있다.
주변에 거대한 모닥불이 지펴졌고 대낮같이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오크가 나타나면 궁수부대가 언제든 지옥의 소나기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크도 함부로 날뛰지 못하는 상태다.
그 가운데로 제이미가 말을 몰고 뛰어들었다.
궁수부대 대장은 깜짝 놀라 외쳤다.
"누구냐?"
아래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5군단장 제이미 백작으로 판명되었습니다."
"5군단장? 그가 갑자기 왜 저 험한 곳에 홀로 뛰어드는 거냐? 저러면 활도 쏠 수 없을 건데 어찌 저런 무모한 짓을!"
아니나 다를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오크들이 혼자 말을 타고 돌진해 오는 기사를 보고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와라. 이 잡것들! 오늘 신나게 한판 놀아 보자."
마테니는 말 안장 위로 풀쩍 뛰어올라 중심을 잡고 섰다. 기묘한 자세에 아군들은 깜짝 놀라 모두 전방의 제이미를 주시했다.
말 안장 위에 서 있던 제이미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한 호흡 길게 내 뿜더니 그대로 말 위에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오크들은 괴성을 지르며 우리를 부수고 밀려 나오는 망아지 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하늘에서 천마삼검의 화려한 일식이 오크를 휩쓸었다.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밀짚 단이 쓰러지듯 우수수 쓰러졌다. 제이미는 그 반발력으로 허공으로 한 번 더 튕겨 오르며 다시 검초를 내뱉었다.
'우수수' 정말 이 표현 밖에 달리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달려 나오던 오크들이 벼락에 맞은 듯 잠시 꿈틀하더니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신기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보게들 모닥불을 더 지피게 불을 더 밝히게."
궁수들은 활에 화살을 재우다가 일제히 내려놓았다. 지금 오크 무리 속에서 사신 한 명이 죽음의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야센 3군단장은 멀찍이서 제이미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보는 제이미의 신위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말 안장위에서 허공으로 치솟은 후 아직 발이 땅에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오크 수십 마리 아니 거의 오십 마리 이상을 두 번의 칼질에 눕혀 버렸다.
"신기로군. 신기야. 어째 어제의 제이미와 지금의 제이미는 저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모양. 이거 정말 미스터리군. 미스터리야."
야센 3군단장은 제이미의 활약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이미의 움직임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모든 기사가 대형을 유지한체 홀로 싸우는 제이미를 보면서 탄성을 질러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당했던 설움이 한꺼번에 씻겨 나는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고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지며 덩달아 허리도 펴졌다.
그만큼 제이미의 신위는 엄청났다. 아군의 사기가 점점 오르더니 이제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이 커지고 작은 고함이 점점 큰 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크의 학살자. 오크의 도살자. 그런 별명이 아깝지 않을 만큼 제이미의 무력시위는 점점 병사들을 달구기 시작했다.
살얼음판 위를 달리는 것처럼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호흡이 가빠지고 날 선 겨울바람에도 뜨거움이 느껴졌다. 서서히 달아오른 선두의 방패병들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궁수들도 바짝 긴장한 채 활시위에 건 화살의 촉을 손가락으로 느끼고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한사람이 만들어 내는 장관이군. 전 부대가 술렁인다."
야센 3군단장도 움찔하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작전 회의 중이던 노르딕과 후오란 백작이 천막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