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결
"문제는 오크의 동태다. 그놈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두 왕자를 계속 볼모로 잡은 이유도 궁금하고 이건 뭔가 모종의 계획에 따른 움직임 같긴 한데."
메흘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가장 이상한 일입니다. 오크의 성격상 눈앞에 아칸 시티를 두고 농성을 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두 왕자를 볼모로 잡은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오크를 조종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오크를 조정해서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일전 영혼의 숲 사건을 되짚어 보면 역시 오크의 뒤에도 시몰레이크 후작이 관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시몰레이크는 왕자의 세력을 추출하려고 고심하고 있고 팬텀 가드너의 충신들은 세이렌의 기점으로 모여들고 있어. 그들의 균형을 맞춰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오크의 볼모로 잡힌 두 왕자지. 두 왕자가 없다면 오크와 전면전을 불사할 테니까."
"두 왕자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왕자가 죽는 즉시 아칸 시티는 오크와 전면전을 불사할 겁니다. 그럼 그것을 구심점으로 팬텀 가드너는 더욱 뭉칠 겁니다."
"그래서 세력 견제용으로 두 왕자를 살려 놓고 있는 모양이군. 시몰레이크 후작이 개인 사병을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나 팬텀 가드너가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지 그의 바라는 것은 로만 울프의 5만 대군이야."
"그렇습니다. 그들과 시몰레이크 후작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나 시몰레이크 후작은 아칸 시티 방어를 핑계로 로만 울프의 정예군을 아칸으로 들이려고 하고 팬텀 가드너파는 완강히 반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영감은 왜 철수했지? 성군을 아예 죄다 빼버렸지 않느냐?"
테츠의 말에 메흘린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건, 제가 성황에게 부탁드렸기 때문입니다."
테츠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메흘린 경이 직접 성황께 청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칠무신을 통해 교주님의 상황에 대해 아셨을 겁니다. 그로 인해 지금 상황에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아비의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잠시 잊고 행동할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군이 다시 솔라리스로 진군해 왔던 이유는 아마도 저희 마교를 감싸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메흘린 경 성황을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분대로 사람 한두 명의 생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 목을 각오하고 서신을 올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평범한 백성이 직접 찾아뵈어 말을 올리지 않고 서신 질을 한다면서 모욕죄를 물어 목을 치신다 하셨습니다."
"그래 그 핑계를 대고 이번에 또 누구를 보낸답니까?"
"살고 싶다면 교주님의 모든 정황을 남김없이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여하튼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마교는 지금 가장 중요한 시기를 접하고 있습니다. 큰 도약을 할지 그대로 주저앉을지 이번 사건이 마교의 성패를 좌우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은 저도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교주님을 대하기가 이만저만 껄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한 마디 실수하면 언제라도 목이 달아날 판국인데 교주님의 직위에 있으니 마교인을 대할 때는 모두 하대를 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미 모든 마교인에게 교주님의 위상을 말해 놓았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왜요? 제가 말을 높이니까 이상합니까?"
"이 대화를 성황께서 들으셨다면 저는 다음날 태양을 보지 못할 겁니다. 살려 주는 셈 치고 모든 사람에게 하대하심이 좋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그리 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소. 그 말은 일리가 있는 것 같으니 그리 하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교주님. 한결 편안한 대화가 될 것 같습니다."
"엘빈이 꼬리를 끊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오크와 붙게 되는데 문제는 두 왕자군. 두 왕자를 어떻게 할지 그게 고민이야. 혹시 그 전에 시몰레이크가 손을 쓸 수도 있고."
"걱정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잘 풀릴 겁니다. 우리는 오크에 의해 가로막혀 있지만, 오히려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이점이 되고 있습니다. 시몰레이크 후작이 우리를 어찌하려 해도 오크에 가로막혀 있으니 병력을 움직이지도 못할뿐더러 저희가 세이렌 측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소문내게 되면 시몰레이크 후작을 더 압박할 수 있을 겁니다. 핑계 대기 딱 좋은 순서가 아닙니까? 우리는 왕가 적통을 위할 뿐이다. 이미 제시어스 왕자가 저희 손에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이렌 왕자비는 황태자가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더욱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고 왕자를 마교에 맡기지 않았겠습니까?"
"음? 세이렌 왕자비가 직접 그리 말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아칸의 왕궁에 있다가 납치를 당했고 그 주범이 시몰레이크 후작임을 아셨는데 다시 왕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것보다 저희가 모시는 편이 더 안전하겠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시몰레이크의 꿍꿍이를 하루빨리 밝혀야 일의 진도가 나갈 텐데 지금은 조금 답답한 시기에 처해 있네. 그의 정보망을 완전히 부쉈으나 금세 복구 할 테지."
"밤의 자매단 사건으로 후작이 바짝 긴장했을 겁니다. 그는 내외부적으로 뭔가 모를 큰 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를 조사하려 무엇을 끌어 들일는지가 걱정이긴 합니다."
"우리는 이참에 마교의 결속력과 단합력을 키워 놓아야겠소. 그리고 인재도 양성해야겠고 지금 각 마교 장로 이하 무공의 배움과 자질이 좋은 제자 열 명씩 추려 놓으라 전해 주시오. 마교의 성녀가 찾아가 제대로 된 세례를 하면 진짜 무공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니 그리 말해 놓으시오."
"마교의 성녀는 또 무엇입니까?"
"후후, 무한 내공의 창고와 같은 여자지. 마교의 성녀는 아르펜이고 아르펜이 곧 마교의 성녀가 될 것이오. 하하."
테츠는 마테니 세렌 그리고 아르펜과 함께 다시 테란 산맥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길고 길었던 오크의 마지막 꼬리를 찾아냈다.
세렌이 바올렛을 세워 들며 말했다.
"스승님 보십시오. 오크의 마지막 꼬리 같습니다."
기나긴 대열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무리. 영혼의 숲에서 마지막으로 도망쳤던 그 무리가 확실하다.
"마테니 너는 오크의 숲에 있는 엘빈에게 전하거라. 오크의 전진을 막되 최대한 아르펜 숲에 가둬 두라고 전해라."
"네, 마스터.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마테니가 천마비행으로 사라지자 테츠가 말했다.
"세렌 너는 뒤쪽부터 착실하게 오크를 몰아라."
"알겠습니다."
테츠는 아르펜을 돌아봤다.
"이제 좀 몸에 익었지?"
"네 교주님 이젠 조금씩 제어가 가능해요. 이번에는 실수 없이 해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테츠는 아르펜을 안아 들고 세렌과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오크의 긴 행렬을 좌측에 두고 한참을 달려온 테츠는 멈춰섰다.
"이 정도면 한 수백 마리 정도는 되겠구나. 내가 신호하면 내려오너라."
테츠는 오크 행렬 한가운데로 달려 내려갔다. 오크를 죽이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뭉쳤다. 검을 뽑지 않고 천마심공의 내공으로 오크를 밀어 버렸다. 점점 오크가 모이게 되자 테츠가 아르펜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르펜이 내려오자 테츠는 고개를 끄떡이며 흡성대법으로 맨 앞 오크를 붙잡았다. 그때 아르펜이 잽싸게 테츠의 오른손을 잡았다. 금세 몸 안으로 진기가 흘러들고 이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세렌이 후미를 이끌고 올 때까지 수백 마리 오크의 진원진기를 끊임없이 빨아 다녔다. 무시무시한 흡입력이다. 흡성대법의 수배에 달하는 무서운 힘으로 끝없이 오크의 진기를 뽑아냈다.
근육질의 오크가 미라처럼 삐쩍 말라 비틀어지면 눈에서 초점을 잃어버릴 때까지 무지막지한 진기 흡수는 멈추지 않았다.
세렌은 흡성대법의 잡아끄는 힘이 느껴지자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이것에 휘말리면 아무리 고수라도 꼼짝없이 생기를 빨리고 뼈와 가죽만 남게 된다.
매일 그 무서움을 봤지만, 오늘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저렇게 아르펜이 빨아 드린 진기는 수백을 넘어 수천이 될 정도였다.
"됐다. 더는 진기가 빨리지 않는다. 천천히 눈을 감아라. 천천히."
가장 애를 먹는 부분이 제 삼의 눈 통제다. 조금만 집중력이 흩어져도 제멋대로 폭주해 버리기 때문에 눈의 통제에 여간 공을 들인 것이 아니다.
눈이 완전히 감기고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테츠가 아르펜을 잡은 손을 놓아 주었다.
"고생했다. 어때 머리는 아프지 않으냐?"
"네, 괜찮습니다. 교주님. 제가 저들의 생명력을 모두 흡수해 버린 것인가요?"
"그렇다. 진원진기라고 생명을 구성하는 몸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거지."
"그런 힘을 가졌지만, 교주님이 앞서 나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
"제가 그 흡성대법인가 뭔가를 익히면 교주님이 나서실 필요도 없이 저와 세렌이 나서서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흥, 너는 세렌과 함께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나와는 재미 없어서 못 하겠다 이 말이구나."
테츠의 말에 화들짝 놀란 아르펜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요. 교주님과 함께하니 다칠 위험도 없고 해서 편안합니다."
"저,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것을 봤나. 네 심리를 모를 것 같으냐? 흡성대법도 내공을 심각하게 요하는 무공인데 내공이 일절 없는 네가 어떻게 흡성대법을 익히겠느냐? 아하, 그렇군. 네 말은 이 흡성대법을 세렌에게 가르쳐 줘서 네 손을 잡는 이가 세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말이렷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몰라도 이 흡성대법만은 누구에게도 전수할 마음이 없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달리 사용되면 큰 화를 불러오는 무공이다. 특이나 천살궁에게 흡성대법을 가르쳐 주었다가는 세상이 피바다가 될 우려가 있어. 천살궁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강자를 찾아 싸우려 든다. 흡성대법이 있으면 끝없이 강해 질 수 있으니 오크가 없다면 인간의 생기마저 흡수하려 들것이다."
세렌이 멀뚱멀뚱하며 바라보자 테츠가 말했다.
"뭘 그리 멀뚱거리냐? 여기는 대충 끝났으니 오크의 꼬리를 쫓아가서 연습해라. 이번에는 검을 사용하지 말고 장법만으로 상대하여라."
"네, 스승님."
세렌은 천마행공으로 힘차게 쏘아갔다. 경공을 매우 싫어했던 세렌이었지만 경공의 매력을 알고부터는 미친 듯이 연습했다. 경공을 제대로 익히니 한 놈 벨 것을 한 번에 두 놈을 벨 수 있고 한 놈 죽이고 다음 놈으로 빨리 넘어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살인 기술이 어딨는가.
금세 경공의 매력에 빠져든 그녀는 잠도 자지 않았다. 세렌은 한 가지에 빠져들면 무섭고 집요하도록 파고들었다. 자기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멈추지 못했다.
경비병들은 날이 샐 때까지 성 주변을 뛰어다니는 세렌을 보고 걱정할 정도였다. 저러다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고 말이다.
"벌써 천마행공이 저 정도면 천마비행을 가르쳐도 될만하군. 역시 내공이 제일이구나."
사실 내공에 대해서 가장 먼저 쌓은 것은 세렌이었다. 그녀는 자하신공을 전수받은 뒤 하루도 쉬지 않고 자하신공을 연마했기에 그것이 내공을 쌓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테츠가 더 가르침을 주어야 했는데 그는 행방불명 되어 버렸고 세렌 혼자서 계속 의미도 모른 체 자하신공을 수련했고 엠버스피어에서 테츠가 세렌의 임독양맥을 타동시키고 2성에 해당하는 내공까지 더해줌으로써 명실공히 마교에서 가장 높은 내공을 보유한 자가 되었다.
테츠는 아르펜을 안아 들었다.
"자, 우리도 가자. 너는 세렌이 연습하는 걸 지켜보는 게 유일한 낙이 아니더냐?"
"네, 교주님. 저도 경공이란 걸 익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교주님께 이런 민폐를 끼쳐 드려서."
"나도 네가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지만, 하늘이 허락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구나."
세렌을 가혹하게 훈련하는 이유는 지금 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다른 마교의 장로들이 모였을 때 그녀만 애지중지한다고 핀잔을 들을 게 뻔하고 천살궁은 남의 시샘을 견뎌 하기 힘들어하므로 이런 기회를 빌미 삼아 세렌을 호되게 수련 시키는 이유다.
이미 구유참인도법과 구화마검은 완벽히 마스터했고 태청검법과 매화검법은 물론 세렌과 면검 바이올렛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검법으로 천마수라검(天魔修羅劍)과 자신의 독문 절기인 파천수라장까지 전수했다.
그녀의 수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 때쯤 드디어 엘빈의 마교 일행과 만났다.
엘빈은 오크의 숲을 포위하고 연일 오크와 치열하게 대치 중이었다. 그들이 오크의 숲으로 진격하지 않은 것은 교주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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