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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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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0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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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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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아랑누_이별의 밤

DUMMY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들어가기 전, 온설지와 이연은 밤을 보낼 집을 찾아냈다. 사막의 경계에 버려진 흙집이지만, 지붕과 벽이 그런대로 남아있었다. 적어도 새벽이슬은 피할 정도였다.


노을이 짙어지자 온설지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이연은 구석에서 불을 지폈다. 저녁식사를 위해 쌀과 고기 가루를 물에 불렸다.


“누님,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요?”

“아직 울고 있을 거야. 수미원 가까이에서.”

“형님은 어디로 사라졌대요? 밥도 안 먹고. 그렇게까지 혼자 있고 싶은가?”

아랑누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연도 딱히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사막이라 나뭇가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연이 가느다란 나무초리로 불씨를 돋우며 도조를 불렀다.

“까망아, 가서 나뭇가지 좀 물어와.”

“내가 왜? 그 고생을 왜 하는데?”

“제일 많이 먹잖아.”


“아닌데, 아닌데. 난 몸집이 작아서 먹지도 않는데!”

“갔다 오라면 얼른 갔다 와. 아니면 쌀 한 톨도 없을 줄 알아.”

이연의 협박에 못 이겨 도조는 푸드덕 날아올랐다.


“쳇! 신조 체면이 말이 아니네.”

나뭇가지를 찾으러 언덕까지 찾아다녀야 한다니. 이 고귀한 신조가.

도조는 화가 나서 깍깍거렸다.

‘여라함님이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저걸 그냥!’


도조는 영진성의 부탁을 생각해냈다.

‘누가 보냈는지 알리지 마라. 너도, 그 아이도 위험해질 테니.’

영진성 여라함은 아랑누를 지켜보라고 했다. 간단한 일이었다.


무엇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보고 듣기만 하면 된다. 지키는 것도 아니고 보기만 하면 되니까.

인간세로 내려오니 훨씬 잘 보이고 잘 들렸다. 도조는 그것이 신조로서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 여라함님이 내 능력을 알아보신 거지. 나도 엄연히 신조니까.’

도조는 날갯짓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말린 고기와 쌀은 잘 불었는데, 불이 약해 여간해서 물이 데워지지 않았다.

“아휴, 까망이를 믿은 내 잘못이지. 누님, 내가 갔다 올게요.”

이연이 벌떡 일어났다.


아랑누는 이미 다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너진 집터를 돌아보던 그녀가 갑자기 지팡이를 잡고 일어났다.

“누가 죽어가고 있어. 영혼이 떠나려고 해. 아주 여린 혼이야.”


지팡이에 의지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막의 경계를 따라 무너진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디서 나오는 소리일까.


“가서 도와줘야 해.”

드디어 방향을 찾았는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누님! 같이 가요. 이거부터 끄고요.”


아랑누가 아무리 빨리 걸어도 이연의 달리기에 비할 수 없었다.

이연은 아랑누가 가는 방향을 눈여겨보고는 모닥불을 껐다. 나귀 보리의 고삐를 잡고 곧장 아랑누를 따라갔다.


*


사막을 따라 늘어선 집은 흙과 모래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붕이 가라앉아 벽과 기둥만 남은 집이 많았다. 그 사이 띄엄띄엄 지붕이 있는 집들이 보였다.

그중 가장 작은 집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나리울이 등에 불을 밝혀 천장에 걸었다. 빛결은 얇은 이불 위에 누워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니. 고생시켜서 미안해.”

“무슨 소리야. 넌 내가 지키기로 했잖아.”


“내가 없으면 언니도 편해지겠지?”

“그런 말 하지 마. 약속했잖아? 우리 둘이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나리울이 주머니에서 물과 주먹밥을 꺼냈다. 수미원에서 남은 음식이었다. 빛결은 입맛이 없다며 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긴 안 되겠어.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아야지.”

“응, 언니 하고 싶은 대로 해.”

“아까 이루다가 왔었어. 목걸이 보고 많이 울더라. 참 안됐어.”

“이루다···. 불쌍해. 친구도 없고.”

보고 싶다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나리울이 없는 사이 방으로 찾아온 촌장은 무섭게 윽박질렀다.

‘요마족 꼬마가 또 오면 흠씬 매질해서 내쫓을 거다. 나리울까지 쫓아낼 테니 요마족이 얼씬도 못 하게 해. 알아들었지?’

무시무시한 촌장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루다에게도, 나리울에게도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숨이 가빠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빛결은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 병자가 있나요? 어린아이일 텐데요.”


문 앞에는 낮에 보았던 손님이 서 있었다. 눈가리개를 하고 지팡이를 짚은 작고 가녀린 여인.

“당신은?”

“아, 수미원에서 일하는 분이군요.”


아랑누는 그녀의 기운을 알아보았다. 오른손에 머무는 망령의 기운까지.

“귀령송환사입니다. 날 부르는 혼이 있어서···.”


나리울이 벌컥 화를 냈다.

“뭐라고요? 누가 죽는단 말이에요? 손님을 내쫓은 건 내가 아니고 촌장이라고요!”

그녀가 소리 질러도 아랑누는 나무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정말 너무 하시네요.”

울컥 올라온 화를 쏟아내도 아랑누가 반응하지 않자 나리울은 민망해졌다.

“됐어요. 가보세요.”


문을 닫는 순간, 아랑누가 나리울의 오른손을 잡았다. 야리야리한 몸과는 달리 억센 힘이었다.

“그가 죽은 건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나리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랑누는 빳빳하게 굳은 그녀의 손목을 꼭 쥐었다.

“여기 머무는 혼은 저 아이의 아빠군요. 처음엔 당신을 원망했지만, 지금은 아니래요. 지금껏 그를 붙잡은 건 당신이지요.”

나리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 그만 가고 싶다고 하네요.”

아랑누는 그녀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주문을 외웠다.


‘떠나지 못한 영이여, 회한의 장막을 걷고 그대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주문이 끝나기도 전에 나리울은 손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꽉 끼어있던 무언가가 훌훌 떨어져 나갔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서서히 열기가 사라지고 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였다.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사 년 동안이나 굳어있던 손이었다. 나리울은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방안에서 빛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나를 위해 오신 분 같아.”


아랑누가 지팡이 끝으로 문을 살짝 두드렸다.

나리울이 최면에 걸린 듯 문을 열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도조는 투덜거리며 사막의 경계를 떠돌았다.

‘나무 구해오라던 사람 어디 갔어? 그 꼬마를 봤다고 자랑하려 했더니만.’


마을 외곽을 따라가며 인기척이 있나 둘러보았다. 지붕이 있건 없건 창문마다 고개를 들이밀고 씩씩거리던 도조는 겨우 아랑누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언제 여기 온 거야? 여기서 뭐 하는 거래?’

사람의 머리로 바꾼 도조는 창문에 코를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랑누는 빛결 옆에 앉아 작은 손을 잡았다. 이연은 늘 하던 대로 그들 곁에 앉아 빛결의 얼굴을 그렸다.


“하고 싶은 일 있니?”

“이루다를 보고 싶어요.”


구석에 서 있던 나리울이 말했다.

“낮에 만난 요마족 아이예요. 하나뿐인 친구죠. 촌장은 요마족이 마디다 언덕을 빼앗으려 한다고 굉장히 싫어해요.”


아랑누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도조가 서서 엿보는 곳이었다.

창에 바짝 붙어있던 도조는 그녀의 시선을 받고 화들짝 놀라 굴러떨어졌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찌릿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도조는 날개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까마귀머리로 깍깍거렸다.


“까망이가 왔네?”

이연이 문을 열자 도조는 태연한 척 고개를 쳐들고 폴짝폴짝 뛰어 들어왔다.


아랑누는 빛결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도조, 아까 보았던 아이를 찾아줘.”

“오! 그렇지 않아도 이 몸이 벌써 찾았다는 거 아닙니까? 역시 신조라서 감출 수 없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조는 이연에게 붙잡혀 밖으로 나갔다.


*


아랑누는 문밖에 나와 이루다를 맞았다.

“옆에 있어 줘.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야.”

“살려주면 안 돼?”

“그건 누구도 할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편안하게 보내는 것뿐이야.”


이루다는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빛결의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빛결은 깊은 잠에 들었다. 아랑누가 소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여린 몸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지만, 아랑누에게만 보였다. 손바닥에 빛 덩어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은 잠든 빛결을 바라보았지만, 이루다는 자석에 끌리듯 그녀를 따라 나갔다.


달빛도 숨은 밤이었다. 보름이 가까운 삭이 사막을 내려다보았다.

아랑누에게 혼이 속삭였다.

‘이루다에게 친구를 찾아주세요.’

“친구를 찾아주라고?”

손바닥 위에서 통통거리던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보내지 말아요!”

이루다가 달려와 아랑누의 손을 낚아챘다.


“보내지 마, 제발! 여기서 같이 살게 해줘.”

“여기는 빛결에게 속한 세계가 아니야. 그 아이는 길을 잃지 않았어. 어디로 갈지 알고 있단다.”


이루다가 씩씩거리며 아랑누를 세차게 떠밀었다. 모래 위로 쓰러진 아랑누를 내려다보며 울부짖었다.

“너도 똑같아! 그 못된 촌장하고 다를 게 없어! 다신 안 올 거야!”


이루다는 곧장 보라사막을 향해 뛰어갔다.

사막의 경계에는 이루다가 남긴 울음소리가 웅웅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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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로잔_합류 22.05.30 49 1 10쪽
32 사로잔_성물의 주인 22.05.29 47 1 9쪽
31 사로잔_새놀호수 22.05.29 49 1 13쪽
30 사로잔_변수 22.05.28 61 1 12쪽
29 사로잔_증거물 22.05.28 54 1 11쪽
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27 사로잔_망나니 22.05.27 55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8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9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3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3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19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3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13 아랑누_악몽 22.05.19 62 1 10쪽
12 아랑누_귀령송환사 22.05.18 66 2 13쪽
11 사로잔_결심 22.05.17 73 2 12쪽
10 사로잔_비르삼 알찬 22.05.16 64 2 11쪽
9 사로잔_여행 준비 22.05.15 68 2 12쪽
8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6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7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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