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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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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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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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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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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사로잔_녹디사원

DUMMY

뉘엿뉘엿 해가 지는가 싶더니 사방이 어두워 길을 찾기 어려웠다.


초루산에는 영험한 기운과 생명력이 넘쳐 여러 종류의 숨탄것들이 왕성하게 자라났다. 사냥감이 풍부하지만, 그 말이 사냥하기 쉽다는 뜻은 아니었다.

산이 허락한 자만이 사냥할 수 있다는 소문도 이 때문에 생겨났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다소곳이 박혔고, 두 번째 달인 삭은 보이지 않았다.

사로잔은 꿩 두 마리와 토끼 세 마리, 왕뱀 한 마리에 만족하며 움막에 도착했다.


실개천 옆의 움막은 십여 년 전 지곡대사 밑에서 수련할 때 해무찬과 함께 세운 곳이었다. 탐험가의 비밀기지라고 부르며 전투를 꾸미고 거기 맞는 전략을 밤새 고민하기도 했다.


비르삼의 부름에 따라 신풍대장을 맡고, 지곡대사 마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찾을 기회가 없었다. 마지막 사냥대회도 삼 년 전이었니 움막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기로 해무찬과 미리 약속했다.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기는 하지만 하룻밤을 보낼 정도는 되었다.


사로잔은 녹초가 된 몸으로 벌렁 드러누웠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옷과 신발뿐 아니라 얼굴과 머리카락조차 온통 흙으로 범벅이었다.


횃대에 불을 붙여 기둥에 걸었다. 풀잎이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 밤새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이 녀석은 왜 안 오는 거야?”


해무찬이 이렇게 늦을 리 없는데.

“길을 잃을 리는 없고···. 저녁이나 준비해 놓을까.”


모닥불을 피우고 꿩고기를 손질하면서도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을 확인하느라 잠깐씩 손이 멈추었다.


미친 듯 꾸르륵거리던 시장기를 해결하자, 땔감을 주워 담는 손놀림도 빨라졌다.


‘늦어도 너무 늦는데.’

사로잔은 실개천에서 산비탈까지 구석구석을 눈여겨보았다.


어둠이 짙어져 별빛만이 살아날 때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검불?’


한 아름 안은 나뭇가지를 내던지고 소리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해무찬의 애마가 주인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사로잔은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낯익은 냄새를 맡자 검불은 곧 안정을 되찾고 머리를 기댔다.

말 등을 쓰다듬으며 짐을 살펴보았다. 활과 화살통을 빼면 출발할 때 그대로였다.


“찬, 이번엔 무슨 일을 낸 거냐.”

듣는 사람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할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이니.


사로잔은 어깨를 추켜올렸다가 한숨과 함께 내려놓았다. 자신과 막상막하의 사고뭉치이니 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검불과 자신의 말을 끌고 어두운 산길을 마주했다. 검불이라면 주인을 찾아낼 것이다.


검불이 걸어온 방향을 되짚어 나아갔다. 해무찬이 어느 쪽으로 갔을까.

“분명 나를 이기려고 토끼 정도는 보지도 않았을 거야. 사슴이나 멧돼지를 찾아다녔겠지. 그렇다면 계곡 쪽으로 들어갔을 거고.”


혹시 해무찬이 남겨놓은 기호가 있을지 모른다. 검불을 따라가면서도 단서를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


길을 잃었다고 깨달은 것은 숨이 턱에 찰 때쯤이었다. 검불도 같은 자리만 맴돌 뿐, 길을 찾지 못했다.


횃불도 꺼졌고, 왔던 길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얼마나 내려왔는지, 얼마나 올라왔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초루산이 반기지 않는다는 건가.


“찬! 해무찬!”

사로잔은 씩씩거리며 허공을 향해 고함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웅웅 메아리치다가 아득히 사그라졌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찾으면 가만 안 둔다!”

사고뭉치 해무찬에게 소리쳐봐야 소용없었다. 야단을 치든 주먹질을 하든 찾아낸 다음 할 일이었다.


하루 종일 땀을 많이 흘린 데다 쉬지 않고 내달린 탓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안 돼.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사로잔은 숲을 둘러보며 천천히 의식을 집중했다.


어지럼증이 가라앉고 호흡이 안정되어 갈 때였다. 어디선가 조그맣게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낯익은 곡조였다. 어렴풋이 들리는 작은 휘파람 소리.

언제부터인가 위험할 때마다 길을 알려준 소리였다. 그 소리는 그녀에게만 들렸으므로, 하늘의 소리라고 믿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면 휘파람이 아니라 칼끝이 먼저 나왔을 것이다. 소리의 정체는 모르지만, 이번에도 미지의 소리를 믿기로 했다.


엷은 구름이 흘러와 초승달을 가렸다.

휘파람이 이끄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리는 끊어졌다가 그녀가 방향을 잃고 서성일 때마다 이어졌다.


소리의 실체를 알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한밤중 숲속에서, 그것도 혼자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길을 찾아야했다.


털컥 무언가가 발에 걸렸다. 해무찬의 검이었다.

손잡이 끝에 풍성한 술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어두워도 눈에 익은 것이라 알아보았다. 연보라색의 작은 보석을 짙푸른 끈으로 감싼 매듭.


‘검을 버릴지는 몰라도 이걸 놓칠 녀석이 아닌데···.’

검을 집어 들자 휘파람 소리도 끊겼다. 그 자리를 부엉이 울음소리가 대신했다.


구름에 가려졌던 초승달이 다시 나타났다. 수풀 속에 낙엽 더미처럼 보이던 것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해무찬이었다.


“찬!”

사로잔은 그의 숨소리부터 살폈다. 거칠기는 하지만 제대로 숨 쉬고 있었다.

이마와 어깨에 피가 말라붙었다. 피는 멎었으나, 상처의 깊이와 크기를 보니 안심할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 위로 가파른 산비탈이 이어졌다.

‘저기서 굴러떨어졌나. 무언가 큰 짐승을 쫓다가 발밑을 놓쳤겠지. 에휴, 얼마나 욕심을 냈기에···.’


검불이 큼큼대는 소리도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러나 산비탈을 다시 올라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해무찬 정도의 거구를 엎고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둘 다 내일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다.


검집을 지팡이처럼 받치고 서서 둘러보니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등불이 늘어선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사원이었다.

‘저건···, 녹디사원?’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산을 뛰어다닐 때는 찾지 못했다. 의술로 유명하지만, 비밀에 싸인 사원이어서 해무찬과 함께 찾아다니다 결국 포기한 곳이었다.


몇 년 전부터 사원이 스스로 결계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은 누구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그것을 지금에서야 발견하다니. 저 불빛은 휘파람 소리가 알려준 것인가. 아니면 초루산이 열어준 것인가.


쓰러진 해무찬과 불빛을 번갈아 보았다.

‘할 수 있을까?’


손가락을 폈다 접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 순간 해무찬을 둘러업고 기합을 주었다.


일어설 때는 엄청난 무게에 눌릴 것 같았는데 한 걸음 내디디니 걸을 만했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몸을 받쳐주는 것 같았다.

짓누를 듯 한 무게감은 걸을 때마다 가벼워지다가 모래주머니 정도가 되었다.


‘내 힘이 이 정도였나?.’

사로잔은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불빛을 향해 걸었다.


*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땀으로 온몸이 젖은 뒤였다. 땀방울이 들어가 눈도 뜰 수 없었다.

열린 대문을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해무찬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윗덩어리 같은 거구에 눌려 뒤로 주저앉았다. 종일 사냥감을 쫓아 뛰어다닌 데다 밤새 산길을 걸었으니 정신이 몽롱했다.


웅장한 대문에서 중앙건물까지 띄엄띄엄 등불이 걸려있었다. 한때는 위엄을 자랑했겠으나 오래도록 손길이 닿지 않아 낡아보였다.

숨을 몰아쉬는 동안에도 처마에서 벽돌 조각이 떨어져 내려 요란하게 뒹굴었다.


사로잔은 주저앉은 채 소리 질렀다.

“도와주시오! 사람이 다쳤소!”


인기척이 없었다. 다시 소리 질렀으나 흔들리는 불빛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러다가 나까지 정신을 잃겠어.’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까만 하늘에 무수한 별이 반짝이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잠이 쏟아졌다.


아득한 저편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어머니? 아버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스승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몸이 허공에 뜬 것 같았다. 약에 취한 듯 몽롱했다. 사로잔은 온통 검은 공간에 둥둥 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눈앞의 검은 공간은 황야가 되었다가 스르르 바다가 되었다. 파도가 치솟더니 깎아지른 협곡이 되기도 하고 하얀 섬이 되기도 했다.


신기한 꿈에 젖어 들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이대로 계속 꿈을 꾸면 좋겠다.


‘사로! 일어나!’

갑작스러운 비명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로! 그만 눈을 떠!’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눈앞이 흐렸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니 별이 다시 밝아졌다. 여전히 밤이었고, 그녀는 누운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별을 세는 사로잔의 시야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찰랑이는 푸른빛의 머리카락, 하얗다 못해 파리한 얼굴.

너른벌에 얼마 남지 않은 순수 용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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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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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4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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