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108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5.14 07:06
조회
74
추천
2
글자
11쪽

사로잔_타내 대모

DUMMY

거모부 대로의 저택은 새봄의 기운으로 어우러졌다. 연둣빛 새순과 꽃봉오리가 겨루듯 피어났고, 처마마다 새들이 둥지를 틀었다.


만찬을 준비하는 응접실은 어린 새들의 둥지만큼이나 소란스러웠다.

손님은 다루영 한 명이지만, 명절을 맞은 듯 활기찬 이유는 손님 때문이 아니었다. 집사관 고무서의 아들 지탈이 이번 사냥대회에서 최고점을 받은 것이다.


사로잔이 최고점을 받은 것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거모부 대로와 타내 대모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저택의 모든 일꾼이 한자리에 모여 축하하려니 준비하는 요리도 엄청났다.


사로잔은 응접실로 들어와 두리번거렸다.

그릇을 나르는 마리를 찾아내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마리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입이 귀에 걸리겠어. 뭐가 그렇게 좋아?”

“아가씨가 무사히 돌아오셔서 좋은 거죠.”

“어때? 청혼은 받았어?”

“아우, 아가씨!”

마리의 동글동글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손이 깨끗한데도 버릇처럼 앞치마에 문지르고는 사로잔의 팔을 잡았다.


“그런 말씀 마세요. 부끄러워요.”

“왜? 이번에 청혼 못 받으면 다른 사람한테 시집간다고 협박했다며?”

“제가요? 그럴 리가요.”

마리는 몸을 비비 꼬며 싱글거렸다.


그녀의 목에서 초록빛 보석이 반짝였다.

비르삼 알찬이 최고점을 받은 무사에게 내린 특별상이었다. 벽랑국 북쪽 광산에서만 난다는 녹옥석.


사로잔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벌써 받았구나. 축하해.”

“다 아가씨 덕분이죠.”


마리가 환하게 웃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있으면 주위가 밝아졌다. 시녀로 일하기는 해도 좋은 친구였다.


“옥지당은 정리했지?”

“그럼요. 벌써 깨끗하게 청소하고, 새 옷도 들여놨어요.”

“부탁 하나 해도 돼?”

“말씀만 하세요. 뭐든 다 돼요.”


“월금을 구해줘. 아주 좋은 걸로.”

“월금요? 언제 비파에서 월금으로 바꾸셨어요?”

“내가 쓸 건 아니고.”

“아, 그···! 어디서 만났어요? 진짜 용족은 처음 보거든요. 모두 그 얘기에요.”


“산에서 주웠다고 하면 믿을 거야?”

“아가씨도 참···. 그분 계속 여기서 사시나요? 그럼 빨리 친해져야죠.”

“앞날은 아무도 모르지. 나도···.”


사로잔은 얼른 말을 삼켰다. 떠난다고 하면 마리는 울고불고 매달릴 것이다. 그녀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하기로 했다.


마리는 요리를 가지러 나갔다. 사로잔은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창문 밖 정원을 내다보았다.

잔치가 열리는 앞뜰은 정원을 지나야 하지만, 분주히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받는 고무서가 보였다. 그는 사로잔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대로에게는 충성스러운 집사관이며, 지탈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사로잔도 잰걸음으로 고무서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축하드려요. 최고점을 받다니, 역시 지탈다워요.”

“모두 아가씨가 도와준 덕분이죠. 이거 원. 아들이 한 일에 아비가 축하를 받다니, 허허.”

고무서의 입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최고점을 받았으니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뱔의대를 맡을지도 모르고.”

“무슨 말씀을! 아직 부족한 게 많답니다.”

“곧 혼례도 올리겠죠?”

“그래야죠. 저도 며느리가 맘에 쏙 듭니다. 싹싹하고 부지런한 것이.”

고무서는 가슴이 벅차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지탈은 아직 안 왔나요?”

“좀 늦는답니다. 대원들이 놔주지 않나 봐요.”

“아휴, 그 녀석들한테 붙잡히면 나오기 힘들어요. 누구를 보내야겠네요.”

사로잔은 가까이 선 하인을 불렀다.

뱔의대에 가서 할 말을 알려주고 돈주머니를 챙겨주었다.


*


거모부 대로는 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비르삼께서도 아주 만족스러워하신다. 네 수하가 최고점을 받지 않았느냐.”

“그건 지탈이 뛰어나서죠. 장공거의 공로이기도 하고요.”

사로잔은 어머니인 타내 대모를 바라보았다.


타내는 소리 없이 웃으며 거모부와 사로잔 사이에 앉았다.

“무엇보다 찬이 무사하니 천만다행이다. 고생이 많았구나.”

“다루의 의술 덕분이죠. 녹디의 수련생답게 손놀림이 빠르고 꼼꼼해요.”

칭찬을 듣자 다루영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비르삼께서 그곳의 보물도 아주 기뻐하셨다. 녹디의 명맥이 끊어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거모부는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아도대사에 대해 생각하느라 찰랑이는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술잔 위로 애도의 그늘이 지나갔다.


타내는 사로잔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로 장공거에 머무느라, 사로잔은 뱔의대 숙소에 머무느라 모녀가 만나는 시간도 거의 없었다.

딸의 팔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얼마나 강해졌는지 가늠해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사로잔의 손에 머물렀다. 왼쪽 손등의 무늬가 문신처럼 또렷했다.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멍처럼 생긴 무늬를 전에도 보았다.

어린 사로잔을 두 번이나 잃었다가 찾아냈을 때, 두 차례 모두 같은 무늬가 나타났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말끔히 사라졌는데, 이번에는 선명한 것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이건.”

타내가 손등을 만지자 사로잔이 속삭였다.

“사원에서 신기한 단검을 찾았는데, 그때부터 이래요. 전설의 성물이래요.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그래.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좋겠구나.”

타내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둘러주었다. 사로잔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딸의 어깨를 다독였다.


*


사로잔은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다루영이 차를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 식사 내내 즐거운 농담과 칭찬이 오고 갔지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앞뜰에 쏠렸다.


저녁 식사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창을 넘어왔다. 지탈이 도착한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환호성이 알려주었다.


창밖을 기웃거리며 발을 까딱거리는 그녀를 보고 다루영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로잔은 그녀의 손을 낚아채듯 일으켰다.

“가봐야겠어요. 지탈이 온 것 같아요.”


거모부도 반가워하며 과일 조각을 들었다 놓았다.

“그럼, 나도.”

의자를 뒤로 미는 순간, 그의 동작은 거기서 딱 멈추었다. 타내가 거모부를 잡은 것이다.


살짝 손을 얹었을 뿐이지만 거모부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것과 달리 타내의 목소리는 밝았다.

“좋은 생각이구나. 우리도 조금 있다 나가마.”


다루영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다 말고 사로잔에게 잡혀 밖으로 끌려나갔다.


타내가 그런 다루영을 보며 웃음 지었다.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용족이면 사로잔보다 백 년 먼저 태어났을지도 모르나,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 안심이었다. 해무찬이나 마리도 좋은 친구지만, 앞으로의 길에서 의지가 될 것이다.


거모부가 눈꼬리를 내리고 타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무슨 일 있소?”

“오늘 같은 날은 즐기도록 놔두세요. 대로가 그 자리에 있으면 어찌 편하게 먹고 마시겠어요?”


“그것도 그렇군. 허허허.”

거모부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타내는 차를 나르는 시녀에게도 그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시녀는 기다릴 것도 없이 공처럼 튀어 나갔다.


“찬은 어떻다던가요?”

“그 아이야 해태족 용사이니 걱정할 것 있겠소? 언제 다쳤냐 싶게 팔팔할 거요.”

타내는 차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은 늦게까지 등불이 꺼지지 않으리라.


“사로는 아직 어려서 세상을 더 배워야 해요.”

“그야 그렇지요.”

거모부는 깍듯이 대답하고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운을 띄우면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타내는 용맹한 무사로 이름을 날리던 여인이었다. 그녀가 맡은 장공거는 세 개의 대륙에서 가장 유능한 무사를 배출하는 곳이 되었다.

수련생들은 그녀의 수업을 받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하소연이나 푸념을 위해 자신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타내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용각국에만 묶어두기 아까운 능력을 가졌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세상이 넓으니 보고 배우면 좋으련만···.”

사로잔이 이끄는 뱔의대며, 곧 대명장군으로 승격할 일이며, 비르삼 알찬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생각하느라 그는 말끝을 흐렸다.


타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혼인하기에는 일러요.”

거모부는 가슴이 뜨끔했다. 뫄한과의 술자리에서 오간 대화를 들켰나.


그 자리에는 단둘뿐이었는데···?

사냥대회가 끝나면 더 미루지 말고 혼례를 올리자는 얘기였다. 물론, 말을 꺼낸 것도, 결론을 내린 것도 뫄한이었다.


“찬과의 혼인은 뫄한이 바라는 일이라. 당신도 알지 않소? 그가 얼마나 이 혼인을 바라는지. 비르삼도 당연하게 여기고. 찬 정도라면 사로에게 부족하지는 않소.”

“그건 뫄한 장군과 당신 생각이고요. 혼인은 본인들이 선택할 일이지요. 지금은 다른 수련이 필요해요.”


“다른 수련이라니? 이미 출중하지 않소? 어떤 수련을 말하는 거요?”

“차차 알게 되겠지요. 어떤 방법으로 수련할지. 결국 자신이 선택할 테니까요.”

타내는 말을 마치고 싱긋 웃었다.


거모부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에게 되물었다. 가끔 아내가 뜻 모를 말을 하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기에 무시할 수 없었다.


타내의 뜻을 헤아리는 일은 비르삼의 의중을 알아내는 것보다 어려웠다.

비르삼이나 나라의 일은 그의 손만 거치면 손쉽게 해결되었다. 역대 대로 중에서 최고라고 칭송받지만, 상대가 타내라면 손쓸 수 없었다.


거모부는 기다리기로 했다. 뜻을 알 수 없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고, 잠시 기다리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날이 온다.

중요한 것은 그 역시 사로잔이 무엇을 하든 딸을 지지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숨은 사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4 아랑누_바람의 아이 이루다 22.05.30 50 1 10쪽
33 사로잔_합류 22.05.30 49 1 10쪽
32 사로잔_성물의 주인 22.05.29 47 1 9쪽
31 사로잔_새놀호수 22.05.29 47 1 13쪽
30 사로잔_변수 22.05.28 61 1 12쪽
29 사로잔_증거물 22.05.28 54 1 11쪽
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27 사로잔_망나니 22.05.27 53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6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7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1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1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19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1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13 아랑누_악몽 22.05.19 61 1 10쪽
12 아랑누_귀령송환사 22.05.18 66 2 13쪽
11 사로잔_결심 22.05.17 72 2 12쪽
10 사로잔_비르삼 알찬 22.05.16 64 2 11쪽
9 사로잔_여행 준비 22.05.15 68 2 12쪽
»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5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3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