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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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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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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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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아랑누_바람의 아이 이루다

DUMMY

초여름의 따뜻한 바람이 보라사막과 마디다 언덕을 데우며 지나갔다.

한줄기 보랏빛 바람이 머물더니 수미원 건물 뒤뜰에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는 바람처럼 그늘을 따라 움직였다.


얇은 나무 창문에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가 투둑거렸다. 두어 번 소리가 나자 창문이 빼꼼 열렸다. 파리한 얼굴의 말라깽이 소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루다?”

“응. 나야. 빛결, 들어가도 돼?”

열네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보랏빛의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이 없어도 이리저리 살랑거렸다. 한 올 한 올 살아있는 듯 무리지어 흔들렸다. 가늘고 긴 눈과 삐죽 솟은 귀가 요마족 사다녜라는 걸 알려주었다.


빛결이 창문을 활짝 열자 이루다는 창턱을 사뿐히 넘어 들어갔다.

“조약돌 주워왔어. 예쁘지?”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돌멩이를 탁자 위에 쏟아놓았다. 목걸이와 팔찌, 장식용 끈이 쌓여있어 그 사이사이로 돌멩이가 굴러들어갔다.


“그렇잖아도 매듭을 새로 만들었어.”

“와, 예쁘다. 그런데···.”

이루다는 완성된 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제보다 훨씬 많아졌는데. 또 밤새운 거야?”

“으응. 손님들이 좋아한대. 이건 보라사막에만 있잖아. 많이 팔면 언니한테 도움이 될 거야.”

“무리하지 마. 너 많이 아프잖아.”

“아니야. 이 정도는 괜찮아.”

빛결이 배시시 웃었다.

거뭇한 눈 밑이며, 충혈된 눈동자가 얼마나 아픈지 알려주었다.


이루다가 빛결의 손을 잡았다. 겨우 열 세 살인 데도 손가락 끝이 갈라져 거칠었다.

손가락 끝에 입김을 불어주었다. 마른 살결이 촉촉해질 리 없지만 그렇게라도 해주고 싶었다.


“내가 도와줄게.”

“아이, 이루다는 이런 거 못하잖아. 대신 이야기 해줘. 보라사막 이야기.”

빛결이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몇 번이나 들었지만, 사막 이야기는 늘 즐거웠다.

가지 못하는 세계였다. 숙소 근처를 걷는 것도 힘드니 사막까지 나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보라사막 남쪽에는 돌안이라는 바위산이 있어. 그 아래로 강물이 흘렀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있어.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사막의 혼 사원이 있어. 사원이라고 할 수도 없지. 벽과 담만 남았으니까. 탑도 무너졌고. 옛날에는 굉장히 컸을 거야. 하얀 벽에 보라색이 비쳐서 은은하게 보여. 그리고···.”


이루다는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하느라 말을 멈추었다. 수십 번 되풀이한 이야기였다.


빛결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매듭 사이사이 조약돌을 끼워가며 꼼꼼하게 묶었다.

“사다녜들이 돌안에 살면 이루다도 거기 살아?”

“내 몫의 동굴이 있지만 안 간 지 오래되었어.”

“왜?”

“여기 사는 게 더 좋아. 널 매일 볼 수 있잖아.”


빛결의 뺨이 달아올랐지만 매듭을 묶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루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응. 나도 이루다가 있어서 좋아.”


이루다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을의 북쪽을 병풍처럼 가려주는 마디다 언덕이 보였다. 그가 밤을 보내는 키 작은 나무는 처마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빛결이 머무는 방은 수미원에 딸린 일꾼 숙소였다. 수미원은 마딘에 하나 남은 대형 여관이었다. 규모로는 사막 근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한낮에는 숙소가 비기에 이루다가 찾아올 수 있었다. 빛결 또한 몰래 살고 있으므로 누구라도 그 사실을 안다면 머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수미원의 주인 월대와 촌장 구비에게는.


*


촌장 구비와 수미원 주인 월대는 사무실에 마주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깡마른 구비는 허리가 앞으로 굽어 얼굴의 주름이 더 깊어 보였다. 월대는 통통한 체격에 뱃살이 많아 숨을 몰아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수입이 반 이상 줄었어. 이거 보라고, 이거. 여행자도 부쩍 줄었어.”

“사막이 넓어졌지 않습니까. 마을이 몇 개나 사라졌으니까요.”

“마디다의 지하수는 어떤가?”

“지금이야 괜찮습니다만, 곧 다른 마을처럼 되지 않을까요? 물이 줄어드는 것이 보일 정도니까요.”


“요마족들이 마디다 언덕을 노리는 건 자네도 알지?”

“네, 전에 찾아왔었잖습니까?”

“족장이란 자가 아야론인가? 마디다를 나눠 쓰자고 억지를 부리다니.”

“요마족은 원래 사막에 사는 종족 아닙니까?”

“그러게 말일세. 우리도 물이 말라 미치겠는데. 빨리 돈을 마련해야지, 원. 아주 먼 곳으로 가자고. 사막은 지긋지긋하네.”


열린 문 너머 한 여인이 보이자 구비는 말을 멈추고 여인을 불렀다.

“나리울, 여기 찬물과 미지근한 차를 갖다 주게.”

나리울은 알았다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오른손은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팔에 붙어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구비가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니까, 여행자들이 말이야, 사막에서 도둑을 만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아! 요마족이 훔쳐간 것으로 알겠지요.”

구비가 크큭 이빨 사이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월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촌장 구비는 나리울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계산대로 나와 입구를 둘러보고, 한 편에 차려놓은 자신의 가게를 자랑스럽게 둘러보았다.


여행용품을 파는 만물상이었다. 소금, 모포, 외투, 장화, 털신까지 보라사막을 여행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다루었다.

가격은 다른 곳보다 두세 배 비쌌다. 아쉬운 사람은 값이 얼마이든 사야 하니 여기서는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나리울이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왼팔로 쟁반을 쥐고 오른팔로는 쟁반을 받쳤다. 오른손은 쓰지 못했지만, 눈치 빠르고 열심히 일 하기에 수미원의 일꾼들은 그녀를 좋아했다.


계산대에 쟁반을 올려놓자마자 촌장 구비는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리울을 보았다.

“자네 말이야. 손님한테 잘하는 건 좋은데, 돈은 벌어야지. 착하고 사람 좋다고 세상이 덥석덥석 돈을 퍼주는 게 아니야. 알겠나?”

“네, 알겠어요.”

나리울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잔소리에 나무토막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도 사정이 딱하다고 숙박비 제대로 안 받았지? 생판 모르는 남을 동정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나를 도우라고.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 손님은 손님일세. 자네도 목표를 채워야지.”

“네, 네.”

“자네는 특히 조심해야 해. 마을의 장래가 걸린 일이니.”


끝없이 이어지는 촌장의 구박에 나리울은 대충 얼버무리고 자리를 피했다.

월대는 촌장의 눈치를 보랴, 일꾼들의 기분도 맞추랴 난감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서있었다.


*


이루다는 빛결이 만든 매듭 목걸이와 팔찌를 햇빛에 비춰보았다. 투명한 보라색 조약돌이 태양을 품고 있었다.

“이것 좀 봐. 색깔이 참 예뻐.”


빛결은 말이 없었다. 끙끙 신음을 쏟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쿨럭쿨럭 기침이 이어지더니 입술 사이로 피가 새어나왔다.

“왜 그래? 많이 아파?”

“으응, 괜찮아, 괜찮아.”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기침이 멎지 않았다. 옷과 바닥으로 피가 번져나갔다.

이루다는 수건으로 빛결의 입을 닦아주었다.


침대에 눕히려고 안아 올리다가 흠칫 놀랐다. 몸이 빈 자루처럼 가벼웠다. 이루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기침이 가라앉았다.

“따뜻한 물을 가져올게.”

이루다가 일어서자 빛결이 팔을 잡았다.


“가지 마. 이루다, 잠깐만 있어.”

“아무 데도 안 가. 너랑 있을 거야. 영원히.”

“난 얼마 못 살 거야. 너도 알지?”

빛결의 떨리는 목소리에 이루다는 대답하지 못했다.


“빨리 친구를 찾아. 혼자 지내지 말고.”

“너만 있으면 돼. 사다녜들은 내 이름도 몰라. 나를 보고도 못 본 척해.”

빛결이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 봤을 때도 너 울고 있었어. 아무도 이름을 안 준다고. 눈물도 보라색이더라.”

“바람에서 태어나서 그래. 바람에서 태어난 사다녜는 나뿐이거든.”

“나중에는 바람으로 돌아가?”

“아마도? 바람에서 태어났으니 바람으로 돌아가겠지.”


빛결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나도 바람이 될게. 네가 바람을 부를 때마다 옆에 있어 줄게.”

“그렇지만···. 난 할 줄 몰라.”

“아니야. 할 수 있어. 널 보면 보라색 꽃잎이 날리는 것 같아. 이루다라고 부른 것도 꿈을 이루라는 뜻이야.”


빛결의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이루다는 파리한 소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입술이라도 적셔줘야 해.’

물을 가져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빛결이 잠들자 문밖으로 나왔다. 나리울이 알려준 주방을 향해 뛰어갔다.

소년이 뛰는 것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정작 자신은 몰랐지만, 보랏빛 바람이 따라가며 같이 움직이기에 나는 것처럼 보였다.


수미원을 돌아보던 촌장과 주인이 그 빛깔을 보았다. 바람처럼 지나간 존재가 무엇인지도 알았다.

“저거, 저거 어찌 된 일인가? 요마족이잖아?”

“그러게요. 왜 여기 있을까요?”

“그걸 나한테 묻는 건가, 지금?”

“아이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촌장님.”


“분명 아야론이 보냈을 거다. 한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끄나풀을 보냈구나, 허! 염탐하러 온 거 맞지?”

“그런 것 같네요.”

“다시는 얼씬 못 하도록 하게!”

촌장이 언짢은 목소리로 고함쳤다.

월대는 주방을 향해 잰걸음으로 걸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보랏빛의 흔적을 따라 월대가 사라지자 구비는 구부정한 허리를 억지로 펴며 이를 갈았다.


‘이놈들, 무슨 수작을 부리든 절대 못 주지. 마디다 언덕이 어떤 곳인데! 아무리 요마족이라도 우리가 가진 무기에는 못 당할걸.’

입술을 비틀며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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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로잔_합류 22.05.30 49 1 10쪽
32 사로잔_성물의 주인 22.05.29 47 1 9쪽
31 사로잔_새놀호수 22.05.29 48 1 13쪽
30 사로잔_변수 22.05.28 61 1 12쪽
29 사로잔_증거물 22.05.28 54 1 11쪽
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27 사로잔_망나니 22.05.27 54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6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7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2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2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19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1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13 아랑누_악몽 22.05.19 61 1 10쪽
12 아랑누_귀령송환사 22.05.18 66 2 13쪽
11 사로잔_결심 22.05.17 72 2 12쪽
10 사로잔_비르삼 알찬 22.05.16 64 2 11쪽
9 사로잔_여행 준비 22.05.15 68 2 12쪽
8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5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3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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