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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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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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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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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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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로잔_망나니

DUMMY

한낮이 되자 거먹구름으로 꾸물거리던 하늘이 완전히 맑아졌다. 날씨가 화창해지니 중앙광장은 어제보다 활기에 넘쳤다.

무술대회에 참가하려는 사람들과 대회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웃돈을 얹어주지 않고는 하루 묵을 방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대한 대로 잎전을 던지는 사람이 많아지자 해무찬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금을 부는 사이사이 미소가 새어나갔다.


‘오늘은 요리를 마음껏 주문해도 되겠지. 가끔은 산해진미를 즐겨야지, 암.’

마음은 어느새 둥둥 떠다녔다.

날아갈 듯한 그의 기분은 갑자기 튀어나온 한 사람 때문에 와르르 무너졌다.


“이게 월금이라는 거야? 응?”

한 남자가 건들거리며 다루영에게 다가갔다.


그가 월금을 빼앗으려 하자 다루영은 몸을 틀며 일어남과 동시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바람 같은 몸놀림이었다.


월금을 안고 다소곳이 물러난 다루영에게 남자가 소리쳤다.

“구경 좀 하자고.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편히 앉아서 연주를 들으시지요.”


다루영이 조심스럽게 바닥을 가리키자 남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광대뼈가 불거진 탓에 양쪽 볼이 움푹 패어 보였다.


“뭐라고? 이것이!”

남자가 주먹을 들어 내리치려는 순간 해무찬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진정하시죠. 악기는 자기 소리를 낼 때 참된 멋이 있는 것이니.”

“넌 또 뭐야?”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숨 돌릴 틈 없이 해무찬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사로잔은 재빨리 바닥에 펼쳐놓은 보자기를 말아 허리에 묶었다. 해무찬이 남자의 공격을 막는 사이 서둘러 비파를 짊어졌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탄식하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몇몇은 그 자리를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 섰다.

주위에는 남자를 따라다니는 패거리만이 남았다. 모두 곤봉을 차고 당장이라도 뺄 수 있게 손잡이를 잡았다.


사로잔은 그들의 숫자를 세면서 상대의 체격을 훑었다. 싸움판에서 다져진 단단한 팔뚝이 불끈거렸다. 실룩거리는 얼굴에는 비웃음이 감돌았다.


‘넷, 여섯, 여덟. 저놈까지 아홉이면 여기선 무리야. 사람들이 다치겠어.’

사로잔은 여차하면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꾸었다.


해무찬이 남자의 주먹을 교묘하게 피하며 물러나는 사이, 다루영도 월금을 등에 메고 싸울 준비를 마쳤다. 가능한 한 싸우지 않지만, 싸움을 걸어오는 자는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광장 한복판에서는 사람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이 자식들! 내가 누군 줄 알고!”

주먹이 계속 빗나가자 남자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씩씩거리며 숨을 돌린 남자가 자신의 패거리를 노려보았다.

그가 고개를 까딱이자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흩어져!”

해무찬이 소리쳤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듯이 뛰어올랐다.

“잡아! 무조건 잡아!”

남자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패거리들도 셋으로 나뉘어 악사들을 쫓아갔다.


패거리가 사라진 뒤에도 남자는 분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머리 위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발을 굴렀다.

자수가 놓인 값비싼 옷은 구겨지고 허리끈도 풀렸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씩씩거리는 남자에게 한 사람이 뛰어왔다.


사십 대로 보이는 통통한 얼굴의 남자였다. 뛰어오느라 몇 가닥 안 되는 턱수염이 바람에 날렸다. 두툼한 장부와 붓을 끌어안은 남자는 헉헉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진웅 도련님, 일이 남았습니다요.”


“사무장!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어! 내가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

“당연히 아니지요, 여긴 워낙 떠돌이들이 많아서···.”

사무장이 고개를 돌렸다.

구경꾼도 떠났고, 행인들은 그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진웅은 옷깃을 여미며 광장을 돌아보았다. 기껏해야 악기나 연주하는 약골들을 쫓아갔으니 한 놈이라도 끌고 오겠지. 붉은 머리의 거구는 그렇다 쳐도 다른 두 사람은 여자가 아닌가.


진웅이 짜증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뭐야? 할 일이?”

“저쪽으로 가시지요.”

사무장이 길을 내주자 진웅은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건들건들 앞장섰다.


*


세 명의 악사는 각기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덟 명의 패거리가 세 곳으로 나뉘었으니 혼자서도 가뿐히 상대할 숫자였다.


사로잔은 따라 들어온 세 명의 싸움꾼을 때려눕히고 골목 끝에 가지런히 앉혔다. 새벽이 되어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새벽이면 춥겠지?’

담장 아래 쌓인 거적을 이불처럼 덮어주고 손을 털었다.


‘싸움을 건 자를 외면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어떤 놈인지 볼까?’

붉은빛이 도는 겉옷을 뒤집으니 알록달록한 다른 옷이 되었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카락을 풀어 목덜미 부근에서 다시 묶었다.

비파도 다시 묶어 어깨에 짊어졌다. 준비를 마치자 씨익 웃고는 담장을 건너뛰었다.


골목마다 이어진 지붕과 담벼락을 달려 곧장 광장으로 돌아 나왔다. 그녀는 이내 군중 속으로 숨어들었다.


진웅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소란이 일어난 곳에 그가 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 보니 바닥에는 장식품들이 어지러이 흩어졌고, 주인은 그의 다리에 매달려 울고 있었다.

“식구들 먹일 수 있게는 해주셔야죠.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그러니까 제때제때 갚아야 할 거 아냐! 사람의 도리 몰라?”


애원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진웅은 차갑게 내뱉었다.

그가 옆 가게로 향하자 사무장도 따라갔다. 상인들에게 돈을 받는 대로 장부에 기록하느라 그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멀찍이 서서 그들을 지켜보던 구경꾼이 수군거렸다.

“상장로 능삼의 아들이라잖아. 자네도 조심해.”

“뭐? 저런 망나니가?”

“쉿! 누가 듣겠어. 무술대회 구경하려다 산송장이 되면 어쩌려고.”

두 나그네는 쉬쉬거리며 거리를 빠져나갔다.


사로잔은 사람들 틈에 섞여 진웅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자가 진웅이란 말이지? 소문보다 더 망나니로군.’


진웅은 상인들을 주먹으로 위협하고, 매대에 놓인 물건을 집어 던지다가 문득 미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에는 점잖게 시작해도,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었다. 웬만한 난동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더,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자신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을 볼수록 그의 눈빛은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바뀌어 갔다.


사무장은 그에게 붙어 자신의 주머니를 불리느라 바빴다. 진웅을 따르는 패거리들도 한 자리 차지할 욕심에 부풀었다.

그들에게는 진웅이 세상을 쉽게 사는 기회였다. 부망에서 가장 강력한 상장로의 아들이니 어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저 장부는 대체 몇 권이나 될까?’

사로잔의 눈이 장부에 머물렀다. 꼼꼼히 돈을 세고 정성스레 받아 적는 것을 보니 그동안의 내역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저걸 이용해야겠군.’

그녀는 사무장을 눈여겨보았다.


능삼이 어떤 인물인지 용각국을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주요 인사의 이름과 이력 정도는 알아야 여행지에서 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웅을 조사할 때였다.


전후 사정을 알려면 소문을 들어야 했다. 어디에나 뒷말과 소문이 모이는 곳이 있기 마련이라, 사로잔은 가까이에서 책방을 찾았다.


한차례 망나니가 지나간 다음이니 책방 안은 진웅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으며, 그 아버지 능삼은 어떤지 눈으로 보듯 상세하게 떠들어댔다.


사로잔은 이야기책을 뒤적이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사무장이 더 악랄한 거 아시오? 말릴 생각은 안 하고 들러붙는 꼴이란.”

“그치가 챙긴 재산도 백 만석은 될 거요.”

말할수록 울화가 치미는지 사람들은 저주 섞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존준은 멀리 있고, 주먹은 이리도 가까우니···.”

“요귀는 뭐하나 저런 놈 안 잡아먹고.”

“그러게 말일세. 다른 대륙은 요귀가 어마어마하다던데.”


“여기도 나타나긴 했었지. 언제였나···. 가믄고원에서 백사귀파가 날뛰지 않았던가?”

“맞아, 상단 사람들이 보았댔지. 그 이후에는 소식 없지?”

“그게···, 용각국 근처에는 백사귀파 조차 얼씬도 안 한다네.”

“아니, 왜?”


용각국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책장을 넘기던 사로잔의 손이 멈추었다.


“그건 모르지. 먹잇감이 없나?”

“혹시 요귀도 두려워하는 귀왕이 사는 거 아냐? 하하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요귀에서 뱃길로, 시장에 새로 들어온 해산물로 넘어갔다.


사로잔은 책을 몇 권 더 뒤적이다 책방을 나왔다.

밝은 거리로 나왔지만, 얼굴은 굳고 걸음걸이도 딱딱해졌다. 용각국이라는 이름을 들어서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


일함루에 도착했을 때, 해무찬과 이곤은 한창 대련에 빠져있었다. 사로잔은 비파를 내려놓는 것도 잊고 두 사람의 봉술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먼저 이곤을 돕자고 제안했기에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손끝이 움직였다.


식당에서는 조리하는 냄새가 풀풀 풍겨 나왔다.

‘어라? 이곤이 여기 있는데 도우미를 들였나?’

음식 냄새에 시장기를 느낀 사로잔이 식당 안쪽 주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루영이 커다란 솥을 앞에 두고 국자를 저었다. 그녀는 항상 긴 치마 위에 커다란 앞치마를 겹쳐 입는데, 병자를 치료할 때도 어울리지만 주방에서도 잘 어울렸다.


다루영이 사로잔을 발견하고 반갑게 걸어 나왔다.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는 모습이 마리와 비슷해 보였다.

“사로, 왜 이렇게 늦었어?”

“넌 어떻게 됐어?”

“대충 손봐줬지. 꼬박 하루는 잠들 거야.”


해무찬이 소매로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돌아가 봐야 그놈한테 죽도록 얻어터지겠지. 사로, 무슨 일이야? 네가 그냥 늦을 리는 없고?”

“별일 아냐. 알아볼 게 있어서.”

사로잔은 일어나 이곤에게 다가갔다.


이곤은 수련용 무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사로잔이 그를 도와 목검을 정리했다.

“아낙거사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무공을 완성하지 못했나요?”

“백부님이 편찮으셔서 중도에 하차했지요.”

“그래도 그 정도면 대단합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사로잔은 검에 힘과 속도를 실을 수 있는 자세를 알려주고 시범을 보였다. 이곤은 한 동작 한 동작에 눈을 빛냈다.


*


밤이 이슥해졌을 때, 누군가 찾아왔다.


이곤은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았다. 목검을 내려놓고 검은 옷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로잔의 눈이 빛났다. 귀를 기울였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이곤은 그들을 따라 골목을 벗어났다.


그들을 지켜보던 사로잔과 해무찬이 주먹을 맞대며 동시에 어깨를 마주쳤다.

“이런 일에 빠질 수 없지.”

“내 말이.”

두 사람은 들고 있던 목검을 그대로 잡고 훌쩍 담장 위로 뛰어 올랐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담장과 지붕을 따라 날듯이 뛰었다. 이곤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두 사람의 모습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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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 사로잔_망나니 22.05.27 54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6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7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1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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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3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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