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107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5.17 08:44
조회
71
추천
2
글자
12쪽

사로잔_결심

DUMMY

대장군의 저택은 해태족 전사의 성품처럼 장식 없이 깨끗했다.

뫄한은 반가움과 미안함이 섞인 애매한 표정으로 사로잔과 마주 앉았다. 구릿빛 피부가 더 붉어졌다.

할 말을 찾지 못한 뫄한은 술을 항아리째 가져오라고 일렀다.


하인들이 술 항아리와 안주를 놓고 가자 먼저 한 잔을 비웠다.

“사로야, 이왕 왔으니 아저씨와 한잔하자꾸나. 내 속이 끓는다. 끓어.”

“찬은 어떤가요?”


“허허, 알면서 왜 그러냐? 내가 아주 이놈을!”

뫄한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사로잔은 눈웃음을 짓고는 빈 잔에 술을 채웠다.


화원 한가운데 자리한 정자는 새봄의 꽃을 감상하는 자리였다.

해무찬의 어머니가 정성스레 돌보던 화원이었다. 여덟 계절마다 각기 다른 꽃을 보도록 세심하게 보살폈다. 그녀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성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로잔은 화원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잡초가 나온 것을 보니 그녀의 빈 자리가 절실히 느껴졌다.

해무찬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떠났지만, 그녀와 비슷한 분위기를 보았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어딘지 익숙하다 싶더니!’

사로잔은 술잔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술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독한 기운이 목구멍을 지나가며 찌리릿 신경을 건드렸다.


뫄한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괜히 반항하는 거니 신경 쓰지 마라. 금방 정신 차릴 거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잘 풀리겠지요.”

사로잔은 나긋한 말투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술을 채워주자 뫄한이 껄껄 웃었다.


“도대체 내 말은 듣지를 않으니···.”

“요즘 힘든 일이 많거든요. 재능이 뛰어난 만큼 번민도 많겠지요.”

“사로야, 찬에게는 네가 꼭 필요해. 똑 부러지게 일하는 사람이 딱 붙어야 한다고.”


“찬도 훌륭하게 잘하고 있어요. 불휘대원들이 얼마나 잘 따르는데요.”

“허허, 그러냐? 그것참 다행이구나.”


그는 사로잔이 어렸을 때부터 며느리로 욕심냈다. 무술 실력도 뛰어나지만, 비파 연주실력에, 마음 씀씀이까지 어여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게 믿었건만 정작 아들에게 배신당하다니, 뒤통수가 얼얼하고 입안이 씁쓸했다.


뫄한의 마음이야 어떻든 사로잔은 입이 바짝 말랐다. 탁자 아래 숨긴 손가락으로 무수히 허공을 두드렸다.

‘빨리 찬에게 가봐야 해.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고.’


뫄한은 미안하면서도 고마워 기분 좋게 술을 받아마셨다. 사로잔은 적당히 칭찬을 섞어가며 위로하다가 생긋 웃었다.

“찬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 가봐도 될까요?”

“그래, 그래. 얘기 좀 잘해다오. 네가 얘기하면 통할 거다.”


뫄한은 하인을 불렀다.

사로잔을 안내하라고 하면서 지키는 이들도 물리게 했다. 창고로 향하는 사로잔을 보자 희망이 되살아났다. 기분이 좋아진 뫄한은 연거푸 술을 따랐다.


*


해무찬은 창고 바닥에 널브러져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풀어진 옷깃 사이로 지저분한 붕대가 드러났다.


사로잔이 들어가니 쳐다보지도 않고 투덜거렸다.

“이런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꼴 좋구나.”


“어이! 사로!”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으그그 신음을 쏟으며 구부정하게 앉았다. 옷에 붙은 지푸라기가 나풀나풀 떨어졌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어?”

사로잔이 물통을 건네자 퉷, 침을 뱉고는 물을 받아마셨다.


“이달 안으로 혼례를 올리라는 거야. 그래봐야 보름 남았어. 말이 돼?”

“그래서 다짜고짜 다루와 혼인한다고 한 거야?”

“이름은 말 안 했어.”

벌컥벌컥 물을 삼켰지만,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사로잔도 거적 더미 위에 앉았다.


“널 쫓아갈 것 같아서 말이야. 시간은 벌어야 하잖아.”

“다루가 그렇게 좋아?”

그는 대답 대신 배시시 웃었다.


“어떻게 보자마자 그렇게 좋아할 수 있어?”

해무찬이 아득한 눈길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너도 알지? 내게 딱 맞는 검을 찾았을 때, 잡는 순간 전율이 느껴지잖아? 말을 고를 때도 한눈에 알아보잖아.”

“그 정도야?”

“넌 아직 어려서 그래. 전율을 느껴봤어야 알지.”


사로잔이 코웃음을 쳤다.

전율까지는 아니어도 다루영과 연주하면서 느꼈던 충만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겠지.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밖을 살폈다. 인기척이 없어도 목소리를 낮췄다.

“날이 밝기 전에 떠날 거야.”

“뭐? 벌써?”

“나침반이 재촉하고 있어. 갑자기 일이 생겼고.”


해무찬은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우선 나 좀 꺼내줘.”

“그냥 나가면 돼. 모두 돌아갔으니까.”

“아우, 그럼 왜 여태 이러고 있었어?”


해무찬이 끄응 힘을 주더니 벌떡 일어났다.


뒷마당을 가로지르는 길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누가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 봐도 안심할 테니까.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고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사로잔은 방에 들어가서도 인기척을 살피며 소리를 낮췄다.

“뒷일은 지탈에게 부탁할 거야. 넌 모르는 일로 해.”

“너 없으면 대원들은?”


“내가 없으면 세상이 안 돌아갈 것 같지?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워. 숨어있던 인재가 드러날 거야. 난 내가 하고 싶은 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어.”

사로잔은 허리에 달린 휼에 손을 얹었다. 그녀만이 잡을 수 있는 신비한 단검이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훈련보다 힘들겠지. 하지만 알고 싶어. 단검과 나침반이 왜 내게 왔는지, 어디로 나를 이끌지.”

“너와 다루만 보내는 건 불안한데.”

“왜? 너도 가려고?”


해무찬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을 피했다. 화려하고 편안한 생활에 만족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꿈틀거리며 용솟음쳤다.


기다려도 말이 없자 사로잔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루를 보고 싶으면 자정 지나서 쪽문으로 와.”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마당을 건너 나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해무찬은 불도 켜지 않고 허공을 응시했다. 다루영의 웃는 모습이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니 벽에 걸린 장검이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 끝에는 장식술이 매달렸다. 어둠 속에서도 연보랏빛 보석이 반짝였다.


‘나중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면 주렴. 그 행복한 여인이 누군지 보고 가면 좋을 텐데.’

장식술을 매달아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아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라며 앓아누워서도 손수 지은 것이다.


해무찬은 일어나 검을 마주하고 섰다.

오랜 망설임 끝에 검을 잡으니 그 아래 걸쳐있던 대금도 우웅 소리를 냈다.


*


뱔의대 훈련장은 옅은 어둠에 잠겼지만, 집무실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왔다. 사로잔과 마주 앉은 지탈의 표정은 어두워지는 하늘보다 더 어두웠다.


“꼭 떠나야 합니까?”

지탈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화살을 뽑았으니 명중시켜야지. 오래 준비한 일이니.”

“소명장군이 결심한 일을 누가 말립니까.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미리 말하면 누가 허락하겠어? 눈치 보고 몸 사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대로님과 대모님은?”

“대모님께 편지를 써놓았어. 뒷일을 부탁해. 마리도. 내 소중한 친구거든.”

사로잔이 무언가 생각난 듯 이마를 톡 쳤다.


“혼례식도 못 보고 가니 미안하다고 전해줘.”

“돌아오실 거죠?”

“그럼, 당연하지.”

지탈은 물끄러미 사로잔을 바라보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따끔한 바람이 지나갔다.


태어나 지금까지 고비를 겪는 모든 순간에 사로잔이 있었다. 집사관의 아들인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도 타내 대모와 사로잔의 격려와 도움이 컸다.

자신보다 어려도 용맹하고 결단력 있으며, 대원들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사로님을 모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지탈의 진지한 말투가 사로잔을 웃게 했다.

“하하, 뭐야? 그 느끼한 고백은?”


사로잔 역시 정색하고 손을 내밀었다.

“나도 지탈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어.”


*


자정을 넘긴 시각, 지송재 옆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담장을 따라간 그림자가 으슥한 구석에 멈춰섰다.

넝쿨에 덮인 비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닫혔다.


“찬이 인사하러 올 거야. 먼저 나가서 밀터에서 기다려. 나귀를 가지고 갈게.”

“보고 갈 수 있다니 다행이야. 아쉬웠는데.”


‘이런. 찬은 그저 아쉬운 정도가 아닐 텐데!’

사로잔은 문 옆에 서서 담장 끝 짙은 어둠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다루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해무찬은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왜 이렇게 늦어?”

“뭐야? 벌써 와있었어?”


사로잔은 놀랍고 반가우면서도 그의 등에 묶인 장검과 대금에 시선이 갔다. 그의 뒤로 명마 검불도 조용히 서 있었다.


“여기 오는데 무슨 검불까지 데려와?”

“너만 재미 보게 할 수는 없지.”

“무슨 말이야?”


“하늘의 성물을 찾는다며? 진정한 용사가 있어야지.”

“아하하···.”

사로잔은 크게 웃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한숨처럼 웃음을 뱉었다.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다루는 네가 맡아.”

“걱정 붙들어 매.”

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다루영을 안아 검불에 태웠다.


“밀터를 지나 강을 따라갈 거야. 거기서 보자.”

해무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검불은 소리도 내지 않고 담장을 따라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사로잔은 마구간으로 들어가 나귀의 고삐를 풀었다. 도티와 어리도 그녀를 알아보고 조용히 따라 나왔다.

타내 대모에게 남길 편지는 미리 써놓았다. 내일 아침이면 편지를 찾아낼 것이다.


문밖에 서서 불 꺼진 저택을 돌아보았다.

여행을 위해 새로 만든 허리띠에 손을 얹었다. 허리띠 양쪽 끝에 장공거의 문양을 수놓았다.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처럼 든든할 것이다.

“성물을 찾으면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새로운 모험에 두근거리면서도 정든 집을 떠나는 것이 서운했다. 이별의 서글픔은 곧 설렘에 자리를 내주었다. 서성이던 발이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찬도 함께 사라지니 대장군의 걱정은 더는 건가?’

사로잔은 씨익 웃었다. 기둥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눈길은 깨닫지 못했다.


타내는 착잡한 눈빛으로 조용히 사로잔을 지켜보았다. 서운함과 함께 딸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섞여 가슴이 뭉클거렸다.


언젠가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 몰랐을 뿐.

‘잘 해낼 거야. 무엇을 하든 나는 널 믿는다.’

타내는 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


해무찬과 다루영이 강가를 따라 이어진 자갈밭에 서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허리에 매달린 단검이 부르르 떨었다. 온몸을 떨며 사로잔의 심장을 두드렸다.

나침반도 대꾸하듯 함께 진동했다. 작은 짐승 두 마리가 품속에서 할딱이는 느낌이었다.


나침반 바늘이 쉬지 않고 뱅뱅 돌았다. 다루영이 나침반을 들여다보았다.

“방향을 찾나 봐.”


떨림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은 서남쪽이었다.

“가자. 해 뜨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야 해.”


세 사람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긴장과 기대에 찬 숨소리가 물결을 타고 그들을 앞질러 갔다.


그림자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고운 자갈에 덮여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숨은 사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4 아랑누_바람의 아이 이루다 22.05.30 50 1 10쪽
33 사로잔_합류 22.05.30 49 1 10쪽
32 사로잔_성물의 주인 22.05.29 47 1 9쪽
31 사로잔_새놀호수 22.05.29 47 1 13쪽
30 사로잔_변수 22.05.28 61 1 12쪽
29 사로잔_증거물 22.05.28 54 1 11쪽
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27 사로잔_망나니 22.05.27 53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6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7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1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1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19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1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13 아랑누_악몽 22.05.19 61 1 10쪽
12 아랑누_귀령송환사 22.05.18 66 2 13쪽
» 사로잔_결심 22.05.17 72 2 12쪽
10 사로잔_비르삼 알찬 22.05.16 64 2 11쪽
9 사로잔_여행 준비 22.05.15 68 2 12쪽
8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4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3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