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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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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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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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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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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DUMMY

한낮을 지난 하늘은 새털구름을 펼치며 드문드문 햇빛을 가려주었다. 상인들은 드넓은 마당에서 값을 매기느라 큰소리를 질렀다.


소와 말과 나귀가 끊임없이 짐을 실어 날랐고, 물건을 확인하는 보부들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붓을 놀리는 손은 갈수록 빨라졌다.


광검국의 두 번째 수도라 불리는 부망의 거대상단 지부. 이름에 걸맞게 거래소와 경매소도 넓고, 검품실과 다섯 개의 대형 창고에는 수많은 물건이 쌓여있었다.


정문 왼쪽에 집무실과 상담소가 있지만, 오늘 회의는 다른 곳에서 준비되었다. 하인들은 다과와 대형 초를 들고 거래소 뒤편으로 돌아갔다.


처마를 맞대고 손님용 숙소가 여러 채 이어졌다. 그들은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낮인데도 실내는 서늘했고 주변은 고요했다.

여러 개의 등과 초에 불을 붙이자 은은하고 아늑한 조명이 완성되었다.


잠시 후 부망지부 총관이 여덟 명의 행상들과 함께 대청으로 올라섰다. 행상들은 상단에서 뼈가 굵은 사람들로 총관과 엇비슷한 오십 대의 나이였다.


그 뒤를 따라 한 젊은이가 들어섰다.

겉모습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으나 남성용 긴 외투를 걸쳤다. 나이는 스물서넛 정도였다.


어깨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은 감물을 들인 듯 흙빛과 붉은빛이 어우러졌다.

머리카락으로 한쪽 뺨을 가리지 않았다면 깨끗하고 반듯한 얼굴이 훨씬 잘 드러났을 것이다. 허리에 매단 채찍은 백사가 똬리를 튼 것 같았다.


방에 들어서자 총관 금봉은 젊은이에게 안쪽 의자를 권했다.

행상들은 입구에 서서 안쪽으로 가지 않으려 눈짓 손짓으로 서로를 떠밀었다. 이들을 본 젊은이가 눈웃음을 지었다.


반달처럼 웃는 표정은 영락없이 장난꾸러기 소년이지만, 찰나에 지나갔기에 서성이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금봉이 헛기침하며 노려보자 행상들은 어깨를 떨구고 들어온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다.


총관 금봉이 행상들을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상장로 능삼이 세금을 추가하라고 하오. 이대로 둘 수 없으니 대책을 찾읍시다.”


봇물이 터지듯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나라에도 세금을 내고, 부망에도 세금을 내라니요. 우린 뭘 먹고 삽니까?”

“맞습니다. 게다가 수레 숫자에 따라 통행료까지 내라니 말이 됩니까?”


“저잣거리 노점에서도 자릿세를 뜯어간대요. 관청에 사용료를 냈는데 말이죠.”

“그게 다 상장로의 주머니로 간다죠. 정말 파렴치한 자요.”

“조정에도 뒷배가 있다지 않습니까?”


대책을 마련하자고 모인 자리에 하소연만 늘어놓으니 금봉이 한숨을 쉬었다. 뒤숭숭하고 시끄러운 만큼 산뜻한 의견도 쏟아지면 좋으련만,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니 어쩝니까? 그 아들과 사무장까지 깽판 치는데 어떻게 감당하냐고요.”

“아비보다 더한 놈입니다. 패거리를 몰고 다니며 시비를 거니 배알이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저희가 상장로를 몰아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성토대회는 한숨으로 끝났다.

상석에 앉은 젊은 남자가 행상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소리가 잦아들다가 이윽고 침묵이 그 자리를 메웠다.


“잘 알았습니다. 오늘은 이쯤 하시지요.”

차분히 내려앉은 남자의 목소리는 곱고 부드러웠다. 아이와 어른의 목소리가 섞인 듯,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듯 신비로웠다.


침묵을 지키던 행상들이 헉, 숨을 내뱉었다. 행상 한 명이 황급히 일어났다.


“아! 용각국에서 귀한 물건이 들어왔는데. 지금 나가야 오늘 내로 검수가 끝납니다. 괜찮을까요?”

한 사람이 나가자 줄줄이 다른 이유를 대며 빠져나갔다. 나가면서 접시의 다과를 한 움큼 주머니에 밀어 넣는 사람도 있었다.


방에는 총관과 젊은이 두 사람만 남았다.

그들은 앞마당에 모여 저희끼리 속삭였다. 그들의 말이 방까지 안 들어갈 거라 믿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 그놈의 방랑벽 때문에 단주님 속을 썩이던 분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마음을 잡았으니 왔겠죠.”

“그러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하니···.”

사람들은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에 이어 황급히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쉿! 말조심하게. 들키면 어쩌려고!”

“아이고, 그러게.”

행상들은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젊은이가 피식 웃음 지었다. 웃을 때 나오는 반달 같은 눈매와 보조개가 곱상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아치야,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지나가는 바람이니까.”

“틀린 말도 아닌데요. 금봉 아저씨,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되었나요?”

“막개를 보냈다. 증좌를 찾으면 신호를 보낼 거다.”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조심해라. 사람은 많이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비열해지고 잔혹해지니까.”

“알아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 습관이 되면 잘못인 줄도 모르죠. 하지만, 이번에는 존준께서도 기다리시거든요.”


금봉이 놀란 눈으로 아순치를 보았다.

“그분이 널 직접 부르셨느냐?”

아순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봉이 침을 꿀꺽 삼켰다.

“증좌를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하려고?”

“직접 나설 수는 없지만, 상장로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세력이 있어요. 만요와 염무가 존준의 왼팔과 오른팔이죠. 벌써 정보를 흘려두었어요. 양쪽 다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아순치가 소리죽여 웃었다.

“아마도···. 서로 공을 세우려고 견제하겠지요.”


총관 금봉은 막내아들을 대하듯 온화한 눈빛으로 아순치를 바라보았다.

‘평생 오지 않을 것처럼 떠돌더니 결국 돌아왔구나.’

눈앞의 소단주가 대견스러웠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습과 목소리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시달리고, 방황했는지 알고 있었다.

아리따운 외모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왼쪽 귀밑에서 턱까지 가운뎃손가락 길이만큼 패인 흉터가 그가 겪은 고초를 알려주었다.


흉터를 보니 그때의 일이 떠올라 마음이 서늘해졌다.


찻물에 과자를 찍어 먹는 아순치를 보며 금봉도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이제 자리 잡고 혼인도 해야지.”

“저 한 곳에 못 있는 것 아시잖아요? 아저씨가 한 번 더 혼인하는 것이 빠를걸요?”

“농담 아니다. 거대상단의 미래가 걸린 일이야.”


“전 이대로가 좋아요. 그리고 할 일도 있고요. 아저씨도 기억하시죠?”

금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


거대한 새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것 같았다. 화물선을 덮을 만큼 넓고 큰 날개에 흉측한 발톱이 번뜩였다.


그 새가 바다에 빠진 아순치를 구해주고 뭐라고 속삭였는데, 금봉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아순치를 죽이려던 세 명의 자객이 목숨을 잃는 건 똑똑히 보았다.


갑판을 물들인 핏물과 피 묻은 발톱을. 돛이 찢어질 듯 울던 괴성 때문에 한동안 귀가 먹먹했다.

시조새가 그에게 사명을 주었다고 했다. 무슨 사명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금봉은 아들 같은 그가 하루빨리 정착해 평온한 삶을 누리기를 바랐다. 전설에나 나오는 기괴한 생물이 준 사명이란 거의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일 테니까.


아순치가 벌떡 일어섰다.

“막개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올게요.”

“숙소는 늘 쓰던 그 방이다.”


아순치가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왔던 문이 아니라 반대편 창문을 열고는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


부망의 남쪽 시장인 알짜 거리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왁자지껄한 시장에서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여인은 눈을 빛냈다.


감물 빛 머리카락은 쓰개치마로 가렸다.

콧등부터 목까지 얇은 옥사 가리개로 가렸지만 깨끗한 이마, 반달 같은 눈썹과 큰 눈, 오뚝한 콧날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알짜 거리는 거대상단의 부망지부에서 멀리 떨어진 시장이었다. 소속이 없는 수공업자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팔고, 농민들은 자신들이 키운 농작물을 팔았다.


상단이 관리하는 시장과는 다른 흥과 매력이 넘쳤다. 가문의 특색을 살린 독특한 공예품부터 집안 대대로의 비법으로 만든 저장식품까지 노점의 물건들은 호기심을 자아냈다.


여인이 장신구를 파는 노점 앞에 섰다.

보랏빛 조약돌이 박힌 매듭 목걸이를 들어 올리니 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보라 사막에서만 나는 돌이랍니다. 색이 참 오묘하죠? 보랏빛도 다 같은 보랏빛이 아니에요. 이 투명도를 좀 보십시오.”

“보라 사막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여인의 목소리는 어딘가 이상했다. 두 가지 음색이 섞인 듯 신비로웠다.


주인은 잠깐 멈칫했으나 이내 웃음을 지었다.

“다 방법이 있습죠. 아가씨에게 정말 잘 어울리네요.”


덩치 큰 남자가 여인 옆에 섰다.

여인이 남자를 보고 목걸이를 내려놓자 주인은 입맛을 다시며 다른 손님에게로 돌아섰다.


덩치 좋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는 일꾼이 입는 거친 옷을 입었다. 일꾼이라도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행색이 달라지는데, 옷을 보니 상당한 부잣집 소속이었다.


여인이 노점에서 물러나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사이를 두고 남자가 따라나섰다.


인적 드문 골목에 이르자 여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치 도련님, 언제 오셨습니까?”


“이 모습일 때는 아리수야.”

“아! 참, 그렇죠. 하하. 아리수 아가씨.”

“상장로는 어때? 증좌를 찾았어?”

“아무래도 집안에는 없나 봅니다. 그런데, 지하를 감옥으로 만들더라고요. 분명 일을 꾸미는 겁니다.”


“게걸스럽게 먹는 짐승은 흘리기 마련이야. 막개야, 증좌도 중요하지만 네가 더 중하니 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그만한 것 하나 못 하겠습니까?”

“또 연락하마.”

“네, 도련님도 조심하십시오. 아니, 아가씨도.”

막개는 싱긋 웃더니 주위를 살펴보았다. 곧 성큼성큼 골목을 돌아나갔다.


아리수의 모습을 한 아순치도 쓰개치마를 고쳐 쓰고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을 따라 걷던 그의 걸음이 벽보 앞에서 멈추었다.

무술대회를 알리는 벽보였다. 광검국 제일의 무사를 뽑아 상금을 주고, 최고 무사는 수도의 수비대원으로 채용하는 조건이었다.


‘이래서 외부인들이 많았군.’

벽보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회를 개최하는 사람은 상장로 능삼이었다.

“무술대회라···. 아들을 위해 좋은 구실을 만들었네.”

아순치는 휫, 휘파람을 한 마디 불고는 벽보를 처음부터 꼼꼼히 읽었다.


잠시 후 쓰개치마를 쓴 여인의 모습은 알짜 거리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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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8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2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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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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