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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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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118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5.23 02:41
조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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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9쪽

아랑누_폭풍 전야

DUMMY

세운랑은 집무실 마당을 서성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마음속에 불어 닥친 바람에 상념이 모래알처럼 우르르 일어났다.


아랑누와는 말하지 않아도 뜻을 알고, 생각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운비암에서 돌아올 때는 여느 때처럼 명랑하고 힘찬 모습일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그에게 아랑누는 언제까지나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이연이 있으니 괜찮겠지. 이날을 위해 이연이 온 것이니.’


세운랑은 이연이 처음 모여사원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 사원에 왔을 때 이연은 열두 살이었다. 일을 안 주면 문 앞에서 구걸이라도 하겠다고 버텼다.

느닷없이 나타난 꼬마의 고집은 일꾼들이 끌어내도 막무가내였다.


사무장 슬옹의 하소연을 듣고 나갔을 때, 그는 소년의 몸에서 다른 기운을 보았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그 기운은 천계의 것이었다. 비록 미약하긴 하나 틀림없었다.


어쩌다가 천인이 몸을 잃고 소년의 몸에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아랑누를 보살피기 위해 왔다는 것.

선계의 영진성 여라함에 이어 천계에서도 내려오다니.


놀라움은 잠시였다. 덕분에 세운랑은 모여사원의 다른 수련생에게도 집중할 수 있었다.

다만, 아랑누의 영안이 그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의문이었다.


‘저는 그 길에는 따라갈 수 없는군요.’

자신의 사명은 여기까지인가. 아니면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는가.

세운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십오 년 전 들었던 영진성의 환청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이제부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아이를 보살피어라.’


그때 영진성은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다섯 살짜리 깡마르고 초라한 아이가 누구인지, 왜 하필 자신을 불렀는지 세운랑 역시 묻지 않았다.

이유야 무엇이든 그는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랑누가 암흑성의 혼 조각임을 알아냈을 때 온몸의 핏줄이 요동쳤다. 드디어 암귀모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다. 얼마나 기다리던 일인가.


어린 제자가 멀고 험한 길을 떠돌 것이 안쓰러우면서도, 마지막 소명을 완수할 날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세운랑이 그윽한 눈빛으로 묵묵히 하늘을 살피는데 무추가 뛰어 들어왔다.

긴 머리를 땋아 올렸는데도, 씩씩하고 힘이 넘쳐 남자 수련생과 비슷해 보였다.


“원로님! 대선사님은 안 계시나요?”

“대선사는 피곤할 테니 깨우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강연회 준비도 해야 하니 오늘은 바쁘실 게다.”


“그건 아니고요. 인홍과 잔솔이 안 보여서요. 그 녀석들, 아니 그 친구들이 시합하자고 해놓고 코빼기도 안 보여요.”

“무엇으로 실력을 겨루려고?”


“저희는 뭐든 자신 있어요. 그거 상의하려고 모였는데요, 먼저 하자고 덤빈 녀석, 아니 당사자가 안 보이는 거예요. 청옥선원의 실력을 듣고 겁을 집어먹은 걸까요?”


무추는 기분이 좋아 깔깔거렸다.

구김 없이 밝은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 찼다. 열일곱의 여자아이가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더 찾아보아라. 어디 숨어서 늦잠자고 있을지 모르니.”

“예. 알겠습니다.”

무추는 곁눈질로 담장 밖을 바라보았다. 바로 찾으러 다닐 기세였다.


“무추야, 그래도 아침은 먹고 찾아라.”

“예. 원로님.”

무추는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왔던 길로 돌아갔다.


소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세운랑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인홍과 잔솔이···.’

그들의 이름은 애써 찾은 평온을 뒤집는 불씨였다.


*


햇빛이 서쪽으로 기울어 하늘은 아련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강당에서 술법과 주문을 연구하던 아랑누는 문득 지난밤의 꿈이 생각났다.

‘분명 이름을 들었는데···.’


모르는 이름에서 시작된 상념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로 이어졌다. 그 소리를 떠올리니 명치끝이 아리고 서글펐다.

‘누구였을까. 나를 아는 영혼이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혹시 그 목소리가 미사랑인가?’


아랑누가 부르자 아담이 헐레벌떡 뛰어왔고 그들은 곧장 서고로 향했다.


“누님, 서고는 왜요?”

“찾을 게 있어서. 내가 책 읽는 건 많이 느리잖아.”

“그래도 신기해요. 글자를 읽긴 하잖아요?”

“그건 글자가 나를 도와주는 거야. 자기를 보여주는 거지. 아주 천천히.”

“저희 큰누나는 아무것도 못 보는데···. 아누님은 굉장해요!”


아랑누와 아담은 서고에 들어서자 인명록을 펼쳤다. 역사서와 전설, 민담을 토대로 정리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목적이었다. 아기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사람이 많아 세운랑 원로가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 규모가 커져 이제는 열세 권의 두툼한 책으로 완성되었다.


사료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유명 인사까지 포함하면서 수련의 일부로 이어가는 사업이 되었다. 이제는 모운현의 서원에서 찾으러 올 정도였다.


“누구를 찾는데요?”

“미사랑을 찾아줘.”

“이상한 이름이네요. 송아지 이름 같은데?”


인명록을 탁자 위에 잔뜩 쌓아놓고 한 권씩 휘리릭 넘겼다. 색인에 없으면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이름에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담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에휴, 그럼 이걸 다 읽어야 해?’


아담이 쌓여있는 책을 보고 한숨을 쉴 때, 아랑누의 영안은 처음 펼친 자리에 머물렀다.


한 면에 들어있는 글자들이 모두 드러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끄덕이면 글자들이 물러났다. 그 속도는 아담이 스무 장을 넘기는 속도와 맞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담은 하품을 길게 하며 비딱하게 몸을 기울였다.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고개를 숙인 채 책을 읽는 척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이름 하나를 찾으러 책을 읽기는 너무 지루했다.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왔다.


“미사랑이 진짜 있을까요?”

아담이 잠꼬대하듯 웅얼거렸다.


“모르겠어. 찾아보고 없으면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지.”

“그 사람이 뭘 했는데요? 얼마나···.”

얼마나 유명한지 묻는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서 웅얼거렸다. 눈꺼풀은 아래위가 닿기 직전이었다.


아랑누가 고개를 들어 마주 앉은 아담을 바라보았다.

“힘들면 가서 쉬어. 내가 찾아볼게.”

“아니에요. 강건환을 챙기느라 약방을 뒤집었더니···.”


강건환에 대해 말하다 말고 눈을 번쩍 떴다.

“원로님이 모두 챙기라고 하셨지 뭐예요. 아직 안 된 것도 많은데, 그것까지 싹 다 챙기라고요. 무슨 일일까요?”


아랑누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강건환을 갖고 떠날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마른 환약을 준비할 때부터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내려놓았다.

“아담아, 손 내밀어 봐.”


아담이 어리둥절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아랑누는 자신의 손목에 달려있던 팔찌를 풀어 아이의 손목에 매어주었다.


조약돌 세 개를 난꽃잎색 매듭으로 이어놓았다. 흰색, 검은색, 회색의 조약돌은 삼신성을 상징했다.


세 개의 대륙 어디서나 사람들은 그런 팔찌를 차고 다녔다.

아랑누의 것은 유독 색깔이 깨끗하고 모양이 예뻐 아담이 좋아했다.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볼 때마다 감탄했다.


“이건 왜요?”

“너한테 주는 거야. 스승님 잘 모시라고.”

“누, 누님. 무슨 뜻이에요?”

아담이 바짝 긴장하며 당겨 앉았다.


아랑누는 손등을 토닥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말이긴. 이거 갖고 싶어 했잖아?”

“에? 어떻게 알았어요?”


아담은 조약돌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싱긋거렸다.

아기의 새끼손톱보다 작은 조약돌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동안 아랑누의 손목에 있었으니 영력도 깃들었을 것이다.


아담이 배슬배슬 웃었다.

“정말 주는 거예요?”

“그래. 여태까지 잘했으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라고. 씩씩하게. 알았지?”

“그럼요! 앞으로도 누님을 위해 열심히 할 거예요!”

아담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집을 떠나 모여사원에 왔을 때 얼마나 낯설고 무서웠던가. 그래도 아랑누가 있었기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큰누나와 똑같이 앞을 못 보았고, 또 누나처럼 다정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다. 거기에 이렇게 좋은 선물까지 받다니.


손목을 흔들자 조약돌에 불빛이 반사되었다. 아담은 싱글거리며 펼쳐놓은 책을 뒤적거렸다. 아랑누의 입가도 슬며시 올라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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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로잔_합류 22.05.30 49 1 10쪽
32 사로잔_성물의 주인 22.05.29 47 1 9쪽
31 사로잔_새놀호수 22.05.29 48 1 13쪽
30 사로잔_변수 22.05.28 61 1 12쪽
29 사로잔_증거물 22.05.28 54 1 11쪽
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27 사로잔_망나니 22.05.27 54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7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8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2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2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2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13 아랑누_악몽 22.05.19 61 1 10쪽
12 아랑누_귀령송환사 22.05.18 66 2 13쪽
11 사로잔_결심 22.05.17 72 2 12쪽
10 사로잔_비르삼 알찬 22.05.16 64 2 11쪽
9 사로잔_여행 준비 22.05.15 68 2 12쪽
8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5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4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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