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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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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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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선계_호위무사

DUMMY

여라함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정원을 건너갔다.


라온당과는 다른 각도에서 싱그러운 정원을 볼 수 있는 심용각은 그가 선계의 일을 처리하는 누각이었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누각 주변은 크고 작은 꽃들이 끊임없이 피고 지며 수문장 역할을 했다. 무지개 연못인 섬김에서 올라오는 맑고 시원한 기운이 아름다운 누각을 더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키 큰 나무들이 자라며 자연스레 병풍을 이룬 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심용각 앞에서 마로와 한울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무사는 비슷한 시기에 수애천으로 들어와 함께 훈련을 받았고 같은 날 호위무사의 직책을 받았다.


인간세에서 큰 공을 세운 무사의 영혼이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 마로와 한울 역시 올곧은 품성으로 공덕을 쌓은 혼이었다.

공덕을 따지는 기준은 인간세와 달라서 천선계에서 인정할 만한 영혼은 많지 않았다. 호위무사는 그만큼 귀한 존재였다.


두 무사는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여라함은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나무에 기대어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울, 자네 마음은 충성심인가, 연모인가?”

마로가 불쑥 던진 말에 한울은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무슨 소리! 농담하지 말게.”

“자네가 왜 미사랑님을 선택했는지 잘 알지. 그때 자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어찌나 애잔하던지.”


마로가 큰소리로 웃었지만, 한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잠든 영혼은 미사랑을 처음 본 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참 좋은 기운을 가졌구나. 최고의 스승을 소개해줄게.’

그를 격려하던 목소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분은 나의 주군이야. 다시는 주군을 잃고 싶지 않아.”

“하하. 그렇다고 해두지. 정말로 미사랑님이 다시 오실 거라 믿나?”

“당연하지. 그분만큼 암흑성에 잘 어울리는 분은 없네.”


아름드리나무 뒤에서 여라함은 먼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율명의 칼끝에서 산산이 흩어지던 미사랑.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질 때 심장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몸과 혼이 인간세로 떨어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두 호위무사는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겼다.

한울은 어떻게 미사랑의 부활을 이룰까를 생각했고, 마로는 여라함이 얼마나 버틸지 걱정했다.


암흑성이 사라지고 비틀어지는 우주의 균형을 위해 영진성이 얼마나 애쓰는지 알고 있었다. 선력이 바닥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마로가 여라함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여라함은 이제 막 도착한 듯 느긋하게 누각으로 올라갔다.


한울이 따라 올라왔다.

“나침반이 주인을 찾았습니다.”

“다행이군. 그 녀석도 오래 기다렸지. 사로잔이 주인이겠지?”

“예.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이유는···.”


한울이 머뭇거리자 여라함이 손을 들었다.

“괜찮네. 해밀에게 들었네. 어떤 아이인가?”


“용각국의 무사입니다. 반파홍귀가 꼭두로 쓰려는 아이 둘을 구했는데 한 아이에게서 희미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천기도 미약하고 영력은 거의 없습니다. 보통의 너나족 인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라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침반이 알아보았네. 그만한 영향력이 있는 혼일세.”

사로잔 역시 스무 살이 다가오니 숨어있던 기운이 드러났으리라.


‘무사라···. 아랑누와는 전혀 다르군.’

사로잔이 어떤 아이일지 궁금했다. 적어도 미사랑의 모습 중 한 부분과는 일치했다.


전투에 능수능란하고 강인한 면모, 맡은 일에는 물러서지 않는 절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곧 용각국을 떠날 것입니다.”

“자네의 공이 크군. 알겠네.”

여라함은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사로잔이 성물을 찾으러 떠난다니. 암흑성 미사랑의 뜻인가, 아니면 인간세에 태어난 너나족 사람의 욕심인가.

여라함은 영진성일 뿐 신이 아니기에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가 침묵하자 한울은 입을 떼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아랑누가 궁금하겠군.”

여라함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한울이 고개를 숙였다.


한울은 여태껏 아랑누를 보지 못했다. 설령 옆에 있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사로잔은 용사의 기운이 넘쳐 무사 대 무사로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울은 호위무사이지 천인이 아니기에 인간세를 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번에 두 사람을 지킬 수도 없었다.


“아누도 반다산의 모여사원을 떠났다네. 자신이 누구인지 곧 알게 되겠지.”

“몸이 많이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 방법도 스스로 찾아야지.”

여라함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천선계에서는 인간세의 규칙과 질서에 간섭하지 못하기에 무고한 생명이 안타깝게 죽어가도 손 쓸 수 없었다.

무심코 뻗은 손길이 어떤 폭풍과 회오리가 되어 인간세를 덮을지 모를 일이었다.


노각부줄 앞에서는 삼신성도 신중하게 행동하지만, 암흑성 미사랑에게는 관대했다. 슬픈 영혼을 위로하느라 인간세에 작은 기적을 만들어도 그녀를 막은 적은 없었다.


심용각 아래 서 있던 마로는 의아해하며 여라함을 보았다.


그동안 여라함은 아랑누를 살피러 인간세에 내려갔다. 아이일 때부터 지금까지 아랑누조차 모르게 도왔으면서 암흑성단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마로는 침묵을 지키며 여라함에게서 한울로, 영진성단의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울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하지만 미사랑님은 처음부터 천신입니다.”

“그래. 처음에는. 그러나 인간세에 태어났으니 사람이 할 일을 하겠지.”

한울은 대답을 찾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문득 심용각으로 밝고 가는 빛줄기가 피어났다. 그의 손짓에 끌려 빛줄기는 글자와 소리가 되었다.


“부녹에게서 전갈이 왔다.”

여라함이 알리자 마로가 뛰어 올라왔다.


“반파홍귀와 암귀모도 우발수를 넘었다네. 결계가 풀린 것을 알아차렸군.”


마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들은 미사랑님이 갈피에 봉인하셨는데요? 즉위하기 전에 하신 걸로 압니다.”

“누군가 봉인을 풀었네.”

“대체 누가?”


“그만한 신력이 가진 자이겠지.”

여라함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한울과 마로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만한 신력을 가진 자라면 진백성 율명이거나 염라성 아유라였다.


*


혼자 남은 여라함은 심용각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미사랑의 혼이 드러났으니 그들도 움직이겠군.’


영진성단을 둘러싸고 별의 무덤이 내려다보였다. 제대로 수명을 마치지 못한 별 조각이 망망히 펼쳐졌다.

별들은 서로를 부르며 남은 빛을 살랐다.


문득 어린 미사랑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왜 별의 둥지라고 안 부르고 별의 무덤이라고 부를까?’


여라함은 별의 무덤에 시선을 묶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환영임을 알기에 돌아보면 그마저도 사라질 것 같았다.


‘별의 마지막 순간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별이 만들어지기도 하잖아? 끝은 다시 시작인 거야. 사라진다고 정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미사랑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눈을 번쩍 떴다.

손을 들어 별의 무덤을 가리켰다.


“마지막을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의미야. 죽음은 새로운 탄생이니 무덤이 있어야 생명이 따르지.”

여라함과 그의 환영이 동시에 말했다.

미사랑의 환영은 높고 맑은 소리였고, 여라함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별 조각들이 눈물을 글썽이는 듯했다. 아릿한 아픔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


암흑성단이 하늘을 보살피는 시간이 되었다.

천선계가 어둠에 싸여 진정한 쉼을 누릴 시간이었다. 별은 빛 속에서보다 밝게 빛났다.


여라함은 긴 하루를 정리하며 침실에 들었다. 법수재는 이미 고요에 싸여 평온했지만, 그의 마음은 번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우주의 균형이 비틀어지고 있었다. 다른 천인들은 느끼지 못할 정도지만, 균형과 조화를 담당하는 영진성은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기울기였다.

‘한동안 인간세에 내려갈 수 없겠어.’


암흑성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영진성이 시련의 동굴에 묶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우주는 스스로 균형을 찾을 것이다.

그녀가 사람처럼 꾸미고 인간세를 돌아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저 있기만 하면.


미사랑이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땅에 내려앉은 그때가 아니고 지금인 이유.


‘율명을 만나야겠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알아봐야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맞춰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아랑누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야겠구나.’

가늘고 높게 휘파람을 불자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창가에 앉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까만 깃털이 별빛 아래 반짝거렸다. 신조로 태어났으나 어디를 보아도 신조라고 할 수 없는 까마귀가 창턱에서 폴짝거렸다.


까마귀가 목을 한 바퀴 돌리자 머리만 사람으로 바뀌었다.

“여라함님, 부르셨습니까?”


긴 턱에 가는 눈썹, 치켜 올라간 눈이 매서운 인상을 주었지만 목소리는 걸걸하여 목이 아니라 몸통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까마귀는 잠시도 쉬지 않고 오락가락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여라함은 지그시 신조 아닌 신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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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27 사로잔_망나니 22.05.27 54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6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7 1 11쪽
» 선계_호위무사 22.05.24 52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2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19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1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13 아랑누_악몽 22.05.19 61 1 10쪽
12 아랑누_귀령송환사 22.05.18 66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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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로잔_비르삼 알찬 22.05.16 64 2 11쪽
9 사로잔_여행 준비 22.05.15 68 2 12쪽
8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5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3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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