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106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5.19 08:49
조회
60
추천
1
글자
10쪽

아랑누_악몽

DUMMY

시장 골목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돌과자와 널브러진 판자 조각, 끙끙거리는 할머니에 앞 못 보는 여인.

다섯 무사를 상대로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남자까지.


그러나 싸움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누님!”

이연이 놀라 뛰어왔다. 붓과 종이를 내던지고 아랑누를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난 괜찮아. 할머니가 다치셨어.”


이연이 노인의 상처를 살피는 동안 퇴마사의 부하들은 저잣거리를 빠져나갔다. 하나 같이 절뚝거리며 욕을 퍼부었다.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남자가 손을 툭툭 털고는 지팡이를 들었다.

희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어깨를 덮을 정도였고, 눈동자만 짙은 갈색이었다.


아랑누는 그제야 남자의 기운을 제대로 읽었다.

‘백호족?’


여느 백호족과는 달랐다. 몸집이 크고 기운이 넘치는 것은 같지만, 내면에 다른 힘이 섞여 있었다. 그 힘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어도 악의가 없음은 분명했다.


남자가 축 늘어진 노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어디로 가시오?”

“모둔각이요. 거기 약도 있어요.”

이연이 대답했다.


모둔각에 가면 치료할 약도 있고, 바로 옆에 의원도 있었다. 이연은 붓과 종이를 그러모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앞장섰다.


*


모둔각은 세운랑 원로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세운 수련원이었다. 수련생뿐 아니라 어려운 이들을 위한 숙소로도 쓰였다.


소박하고 정갈한 건물이지만, 이 층 난간에 서면 드넓은 디들평야와 유유히 흐르는 소나강이 보였다.

아랑누는 강 건너 반다산이 보이는 그 자리를 좋아했다. 반다산 중턱에 자리 잡은 모여사원이 보일 리 없어도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를 발견한 관리인이 뛰어나왔다.

“아이고, 아랑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이 늦으셨네요.”

“네. 그보다 할머니 좀 봐주세요.”

관리인이 손짓하자 일꾼 하나가 뛰어나왔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노인을 업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랑누는 천둥 같은 백호족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 아랑누입니다. 들어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아, 그 아랑누···.”

남자는 무언가 깨달은 듯 말끝을 흐리며 그녀를 살펴보았다.


야윈 몸이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얇고 검은 두루마기 안에는 모두 흰색 옷이었다. 흰 치마와 검은 겉옷이 같이 살랑거리며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남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다시 볼 테니 오늘은 이만.”

커다란 몸집과는 달리 가볍게 뛰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연은 멍하니 저잣거리를 바라보았다.

“저건 무슨 뜻이래요?”

“사정이 있겠지.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분이야.”

“은인치고는 종잡을 수 없네요.”


“그보다 빨리 할머니를 보러 가자. 오늘은 여기서 모셔야겠어.”

그녀는 서둘러 문턱을 넘었다.


*


방에는 두 개의 침상이 마련되었다. 하나는 노인을 위해, 하나는 아랑누를 위한 것이지만 그녀는 노인 옆에 앉았다.


“밤새 얘기하면 좋겠어요. 진짜 할머니 같아요.”

“꼬맹이 할망은 어디 사는데?”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다섯 살 때요.”

“에고. 그것참 안됐구먼.”


“그래도 스승님을 만났으니 다행이죠. 참, 집이 어디세요? 내일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이것도 감지덕지야. 돌과자도 팔아줬잖아?”

“과자를 다 버려서 어떻게 해요?”

“걱정 마라. 그런 건 금방 생기니까. 모여사원 얘기나 해줘. 귀신도 부린다면서?”


귀신을 부린다는 말에 아랑누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스승님은 굉장하시죠.”


모여사원은 귀령송환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망령뿐 아니라 생령도 치료했다.

스승인 세운랑 원로는 세상 모든 것을 알면서도 온화하고 다정했다. 적어도 아랑누에게는.


처음 만난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영험한 기운이 변하지 않았다. 사무장인 슬옹의 말로는 조금도 늙지 않는다고 했다.


“스승님한테 데려다준 오빠가 있었어요. 영의 빛이 맑고 고와서 또렷하게 기억해요. 그만큼 깨끗한 영은 못 봤거든요. 다시 만나고 싶어요.”

“만나서 뭐 하게. 지나간 사람은 추억 속에서나 아름다운 거야.”


노인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눈도 반쯤 감겼다.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더니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랑누는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누워 노리개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금화 한 닢뿐이었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반들거리며 윤이 났다.

‘할머니, 제가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금화는 오래전 기억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마을에 도적 떼가 들기 며칠 전이었다. 할머니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금화 한 닢과 바꿔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던 걸까.


손수 만든 노리개 주머니에 넣고 다섯 살 아랑누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이걸로 엄마, 아빠를 찾으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라고 부르며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녔다.

그때까지 아랑누도 이름이 없었다. 그냥 애기였다. 화산으로 터전을 잃고 친척을 찾아가던 길에서 주운 아기.


아랑누는 몸을 돌려 누웠다. 노곤한 몸은 어느새 어수선한 꿈을 불렀다.


불길이 치솟더니 집은 재로 바뀌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다섯 살의 아랑누는 울면서 할머니를 불렀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를 찾아 헤매는 아랑누 옆으로 시커먼 기둥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온 힘을 다해 할머니를 불렀다. 울부짖으면서 몸 안의 모든 힘을 끌어냈다.

다음 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폭풍처럼 울렁이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누구야?’

‘네 친구야.’

다정하고 온화한 소년의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천옥으로 가셨어. 거기서 편히 쉬실 거야. 아이야, 나랑 같이 가자.’

소년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어졌다.


아랑누는 깨어나려고 몸을 뒤척였다. 마음만 간절할 뿐 눈도 뜰 수 없었다. 숨이 가빠졌다.


세상은 온통 불바다였다. 그녀의 몸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몸을 비틀었으나 불길을 잡지 못했다.


몸부림치는 자신을 다른 아랑누가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눈이 있었다. 불길에 싸인 자신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번쩍 번개가 치더니 몸이 조각조각 나뉘었다. 뼈와 살이 갈라지는 고통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아랑누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식은땀으로 옷이 젖어 들었다.


이연이 뛰어 들어왔다.

“누님! 또 꿈꿨어요?”

익숙한 일인 듯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닦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꽉 눌렀다.

몇 년 전부터 같은 꿈을 꾸었다. 생일을 앞두고 늘 찾아오는 꿈.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니 세운랑 원로가 생일이라고 정해준 날이었다.

오늘은 여느 때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때마다 영력이 폭발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이연이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이연이 덜덜 몸을 떠는 아랑누를 침대에 눕혔다.

“영력이 너무 강하면 몸을 장작으로 쓴대요. 그러다 재가 되면 귀령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안 남아요.”

속상한 마음에 씩씩거렸다.


아랑누는 이마의 땀을 닦다 말고 건너편 침상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 어디 가셨지? 아직 새벽인데.”

가지런히 정리된 이불과 베개 사이 쪽지가 놓여있었다.


“누님, 편지가 있어요.”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 집에 간다. 다음에 보자꾸나.


“뭐야, 벌써 가셨네. 괜찮아지셨나 봐요.”

이연의 말에 아랑누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똑바로 누워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마에는 여전히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영력이 너무 강해 허약한 몸이 영력을 제대로 품지 못했다.

사악한 망령을 보내고 나면 실신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새로운 주술을 배울 때마다 점점 더 강한 영력을 사용하니 자주 혼절했다.


이연은 수건을 적셔 그녀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사원까지 하루는 더 걸리겠네. 원로님이 일찍 오라고 하셨는데.’

입을 삐죽거리며 달궈진 수건을 찬물에 헹궜다.


갈 곳 없는 이연이 모여사원에서 지내게 된 것은 세운랑 원로 덕분이었다. 집도 가족도 없는 소년은 오 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랑누만 따라다녔다.

심부름도 하고 식사도 챙겼으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이연은 잠든 아랑누를 지켜보다가 수건을 다시 적셨다.

“누님, 내일은 꼭 사원에 닿아야 해요. 오늘 저녁이면 손님이 도착할 거라고요.”


아랑누가 들을 리 없는데도 이연은 손님이 어떤 분일지 상상하며 조근조근 속삭였다.

소년의 목소리는 높낮이 없는 소리는 자장가처럼 고요하게 방안을 울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숨은 사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4 아랑누_바람의 아이 이루다 22.05.30 50 1 10쪽
33 사로잔_합류 22.05.30 49 1 10쪽
32 사로잔_성물의 주인 22.05.29 47 1 9쪽
31 사로잔_새놀호수 22.05.29 47 1 13쪽
30 사로잔_변수 22.05.28 61 1 12쪽
29 사로잔_증거물 22.05.28 54 1 11쪽
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27 사로잔_망나니 22.05.27 53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6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7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1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1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19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1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 아랑누_악몽 22.05.19 61 1 10쪽
12 아랑누_귀령송환사 22.05.18 66 2 13쪽
11 사로잔_결심 22.05.17 71 2 12쪽
10 사로잔_비르삼 알찬 22.05.16 64 2 11쪽
9 사로잔_여행 준비 22.05.15 68 2 12쪽
8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4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3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