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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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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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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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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선계_노각부줄

DUMMY

여라함은 바로섬 꼭대기에 앉아 눈을 감았다.


우주의 기둥 바로섬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그를 맞아주었다. 선계의 기운이 빚어내는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바로섬은 아래로 시련의 동굴을 품고, 위에는 넓고 평평한 회합의 바위를 올려두었다.


지금의 삼신성이 어렸을 때 함께 세상을 내려다보던 자리였다. 어린 삼신성이 매우 좋아한 자리여서 바위에 리우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몸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맑아지자 그는 드넓게 펼쳐진 우주를 내려다보았다.


천선계를 둘러싸고 별의 무덤이 끝없이 펼쳐졌다.

리우에서 바라보면 광활한 아름누리도 손바닥처럼 보였다. 선계와 천계를 나누는 별밭 미리내도 반짝이는 강물처럼 보였다.


멀리 있는 모든 것이 맑게 보였지만 정작 바로섬 아래는 짙은 안개에 싸였다.


여라함은 손수건이 묶인 오른팔을 들어보았다.

팔꿈치를 감싼 피 묻은 손수건은 아랑누가 매어준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싸매던 아랑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잠깐 사이 많이 자랐구나. 영안도 밝아지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을 쓰다듬었다.


아랑누가 머물렀던 이을 폭포의 물줄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운비암의 영진성 돌조각도 그가 잠시 깃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수련자의 기도와 정성이 가득 담긴 물건은 삼신성이 머물 힘을 가졌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울퉁불퉁하고 볼품없어도 천인이나 선인을 품는 힘은 다른 문제였다.

인간세에 그만큼 간절하고 정갈한 정성이 담긴 물건은 극히 드물었다.


아랑누 뒤에 엎드려있던 하얀 호랑이가 떠올랐다. 자신이 머문 돌조각을 흘끗거리며 보일 듯 말 듯 웃던 눈빛.


‘그 친구가 아랑누 곁에 있다니···.’

여라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지금은 하얀 호랑이지만 그동안 수없이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존재였다. 사람과 시공간을 함께 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름도 안 만든다는 그가 호설이라는 이름까지 받고, 아랑누를 지킬 줄은 몰랐다.


‘분명 이쪽 세계의 혼은 아닌데···.’

호설은 인간세에서 찾을 수 없는 기운이면서 천선계에 속한 존재도 아니었다.


여라함이 영진성으로 즉위하기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 자신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호설은 밤새 아랑누를 지켰다. 동굴로 들어가는 바람도 몸으로 막아주었다. 틀림없이 아랑누가 누구인지 아는 존재였다.


‘설마 아유라가 보낸 자인가···.’

여라함은 자신의 질문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유라가 나타난 다음 만나긴 했으나, 대분성 전투가 일어나기 훨씬 전이었다. 수없이 다른 모습으로 만나면서 우정과도 같은 감정을 나누었다.

그는 호설을 믿었다.


여라함이 믿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아랑누였다. 미사랑의 혼 조각이라도 미사랑은 아니기에 지켜볼수록 달라 보였다.


암흑성 미사랑에 비해 너무 연약하고, 어딘지 가벼웠다. 아랑누를 보러 갈 때마다 미사랑의 빈자리만 두드러졌고, 그리움만 깊어졌다.


바로섬 아래에서 마로의 기척이 느껴졌다.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시련의 동굴 앞에서 영진성을 찾았다.

‘여라함님, 암흑성단에서 천사장 온담이 왔습니다.’


다음 순간, 시련의 동굴 입구에 여라함이 나타났다. 그는 가볍게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


천사장 온담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호위무사라고 착각할 만큼 크고 건장한 몸집에 부리부리한 눈과 짙은 눈썹이 드러났다.


온담은 여라함을 보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가 바로 내뱉었다. 천선계의 아름다움을 모두 담으면 저런 모습이겠지,


온담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암흑성단의 천사장이 여기까지 오다니 영광일세. 무슨 일인가?”


“아도가 영천옥에 들었습니다.”

“아도가 벌써?”

여라함은 온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아도는 반인반선이라 인간세의 시간으로 삼백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인간세에 반인반선이 몇 안 되지만, 그중에서도 선력이 강하고 심지가 굳은 아이였다.


“아무래도···. 용각의 알을 지키느라 선력을 소진한 듯 싶습니다.”

“용각의 알이라니?”


“저희는 우발수를 건널 수 없으니 선사들에게 들었습니다만, 요귀들이 귀사전에 세운 진신궁이 인간세의 용각섬이랍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어서···.”

“알았네. 인간세에서 많은 일을 할 아이였는데 안타깝군.”


여라함의 눈에 한 가닥 그늘이 지나갔다.

“하지만 선계에선 반가운 소식이네. 부녹 이후에는 새로운 선인이 없어 곤란했거든.”


새로운 선인에 대한 생각은 다시 미사랑으로 이어졌다.


슬픈 영혼을 찾아내 위로하고, 그중에서 알맞은 혼을 천인이나 선인으로 데려오는 역할이 바로 암흑성이었다.

미사랑이 사라진 이후 슬픈 영혼도 길을 잃었고, 천선계에서는 새로운 식구를 맞지 못했다.


“아도는 영천옥에 오래 있을 혼이 아니야. 씻김이 끝나면 여기로 올 걸세. 알려줘서 고맙네. 암흑성단에서 여기까지 먼 길인데.”


“당연히 할 일입니다. 미사랑님을 찾아주신다고요. 성심껏 돕겠습니다.”

온담이 육중한 몸을 숙여 감사의 마음을 나타냈다.


탄탄한 등 근육이 불끈거렸다. 현월도만 들면 지금이라도 오만의 군사를 한칼에 무찌를 듯 힘이 넘쳤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 여라함은 알고 있었다.


대분성 전투에서 미사랑이 사라졌을 때 온담은 인간세에 있었다. 천계로 돌아와 처절한 소식을 묵묵히 듣던 그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수련장 구석에서 어린아이처럼 울던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온담을 보내고 저택으로 돌아오던 여라함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용각이라.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여라함이 머뭇거리자 앞서가던 마로가 돌아보았다.

“여라함님, 선사들이 기다립니다.”


*


영진성 저택에서도 라온당은 정원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청초하면서도 밝고 우아한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났다. 흥에 겨운 작은 새들도 꽃잎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손님을 위한 라온당에는 다섯 명의 선인이 와 있었다. 인간세로 파견되는 선사들이었다.

이들 중 시나와 니무는 인간세가 처음이었다.


“그대들은 어디서 소임을 마쳤소?”

세 번째로 인간세에 내려가는 하날이 묻자 니무가 대답했다.


“달숲과 별똥숲에 있었지요. 별밭에도 잠시 머물렀고요.”

“그럼 인간세에서 충격 좀 받겠구려.”

하날이 엷은 한숨을 내쉬며 니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인간세는 궤네가 지키지 않습니까?”

“그나마 궤네 덕분에 이만큼 유지되는 거라오. 선대 삼신성께서 궤네로 감싸놓지 않았다면 벌써 사람들 손에 자멸했겠지.”

하날이 쯧쯧 소리를 내자 시나가 말을 받았다.


“궤네가 그렇게나 많이 뿌려졌는데도 요귀를 만들다니 사람도 대단하네요.”

“그러니 저희 같은 선사나 천사가 할 일이 많지요.”

인간세에 한 번 내려갔었던 여문이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은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요. 지금껏 자기들 힘으로 살아낸 줄 알죠.”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우리에겐 우리의 사명이 있으니까요.”

인간세의 경험이 가장 많은 달애가 선사들을 위로했다. 인간세에 눈을 고정하면 그림자만 있는 듯 세상이 어두워진다.


달애는 사람이 처음 나타날 즈음 인간세에 내려간 적 있었다.

짐승과 비슷하던 종족이 천사와 선사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대견하고 애처로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겉모습도 천사와 선사를 닮아갔다. 사는 방식과 언어, 문자까지 따라 하면서 천선계와 비슷해지려 애썼다.

그런 욕망이 지금의 그들을 키운 원천이었다.


그럼에도 요귀가 태어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천선계에는 없는 존재였다.


선사들의 두런거림은 여라함의 등장과 함께 사그라졌다.


여라함은 선사들에게 향기 짙은 차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이미 잘하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오. 다만, 인간세에 깊이 관여하지 말아 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경험 있는 선사들은 동시에 대답했지만 시나와 니무는 입만 벙끗거렸다. 인간세에 관여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날이 찻잔을 내려놓고 운을 떼었다.

“사람들 일에 너무 간섭하지 말라는 말씀이네. 인간세는 나름의 규칙이 있어서 그걸 건드리면 안 되거든. 그랬다가는 노각부줄에 들어서지 못한다네.”


시나와 니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노각부줄은 인간세와 천선계를 잇는 하늘길로 그 길에 못 들어서면 선계로 돌아올 수 없었다.


천사와 선사에게는 공기처럼 자유로워 아무런 장애 없이 다니지만,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설령 볼 수 있어도 발을 들여놓으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아직도 못 돌아온 천인이 있다네.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지.”

“그, 그렇게까지 위험합니까?”

“겁낼 것 없네. 사람들에게 기적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그만이거든.”

여문이 껄껄 웃었다.


시나와 니무는 웃지 못했다. 어디부터가 기적이고, 어디까지가 간섭인가.


달애가 경고하듯 결론을 지었다.

“노각부줄은 사람들에게서 천선계를 지키기도 하지만, 천선계에서도 인간세에 함부로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라네.”


하날과 여문도 눈썹을 치켜뜨며 입을 꾹 다물었다. 시나와 니무는 입이 바짝 말라 한입에 잔을 비웠다.


여라함이 웃으며 차를 더 따라주었다.

“영영 못 돌아오는 건 아니오. 관여한 정도에 따라 잠깐 발이 묶이는 것뿐이니.”

“아···, 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여라함이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다정하게 말하니, 마음의 짐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시나와 니무가 한숨을 쉬자 다른 선사들이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선사들이 내놓는 인간세의 경험담이 흥미진진해지자 라온정은 활기에 넘쳤다. 여라함도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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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6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7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1 1 10쪽
» 선계_노각부줄 22.05.24 62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19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1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13 아랑누_악몽 22.05.19 61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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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5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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