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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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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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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소명장군

DUMMY

단비에 젖은 숲은 촉촉하고 싱그러웠다.

새봄을 따라 피어난 여린 이파리와 막겨울을 이겨낸 묵은 잎이 어울려 초록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여덟 번의 계절 중 다봄보다 새봄이 아름다운 이유는 막겨울의 추위와 시련이 컸기 때문이리라.


재잘대는 새소리만큼이나 흥겹고 요란한 소리가 초루산 입구를 가득 채웠다.

너른벌 세 개의 대륙에서 무예로 이름 높은 용각국의 사냥대회이므로, 참가하는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 모두 기대가 컸다.


게다가 삼 년 만에 열리는 대회였다. 격년으로 진행되던 사냥대회가 남쪽에서 일어난 산불과 홍수로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재해의 상흔이 남았기에, 이재민을 위한 기금과 고기, 모피를 마련하는 자리가 되었다.



초루산 입구에 마련된 본부는 별궁을 옮겨놓은 듯 북적거렸다. 목적이야 어떻든 사흘간의 여정에 부풀어 웅성거렸다.

가장 큰 화젯거리는 누가 최고점을 받는가였다.


최고점에 대해 말할 때면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장군에게 머물렀다. 비르삼 알찬의 용상 아래 서 있는 사로잔과 해무찬이었다.


내기를 거는 구경꾼들 못지않게 용상에 앉은 알찬 역시 미소가 가득했다. 모두 뛰어난 무사인데다 인품과 지혜도 훌륭했다.

아름다운 선남선녀가 총명하고 용감하기까지 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알찬은 자신의 좌우에 선 신하를 돌아보았다. 오랜 벗이자 충신들이었다.

“거모부 대로, 뫄한 대장군, 저토록 아름다운 그림이 또 어디 있겠소?”

“네, 정말 보기 좋습니다.”

거모부와 뫄한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몸집에 구릿빛 살결을 가진 뫄한은 날카로운 눈매를 반짝이며 아들 해무찬을 바라보았다.

해태족의 후예답게 탄탄하고 기골이 장대한 것도 기특했고, 아내를 닮아 선하게 생긴 이목구비도 보는 사람을 기쁘게 했다. 그는 아들이 최고점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거모부도 외동딸 사로잔을 지켜보며 보일 듯 말 듯 웃음 지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오뚝한 콧날, 날렵하고 섬세한 몸집, 탄탄한 근육까지 자신과 아내 타내를 똑 닮았다.


거모부와 타내는 용맹하고 뛰어난 무사로 전설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다. 그들이 혼인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무조건 하늘이 내려준 무사라고 떠들었다.


최고점 따위에 연연할 사로잔이 아니니, 거모부는 그저 딸이 사냥대회를 즐기기를 바랐다.


사로잔과 해무찬을 바라보며 황홀해하는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궁녀들도 삼삼오오 소곤거렸다.

“누가 최고점을 받을까?”

“당연히 해무찬님 아니겠어?”

“누가 최고점을 받든 무슨 상관이야. 보고만 있어도 좋은걸.”

“그러게. 저분들은 서 있기만 해도 빛이 난다니까.”

궁녀들이 깔깔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언제쯤 혼례를 올리시려나.”

“얼마나 멋질까? 혼례복을 입은 두 분의 모습.”

“맞아, 맞아. 지금도 저렇게 아름다우시니.”

두 사람이 혼인하여 낳은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며 키득거렸다.


뫄한과 거모부가 친구인데다 이웃에 사니 두 사람은 젖먹이 때부터 함께 자랐다. 사람들은 둘이 혼인하여 새로운 전설을 낳을 것이라고 기대에 차 있었다.


비르삼 알찬 조차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작 두 사람의 생각이 어떤지 알아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소명장군 사로잔과 소태장군 해무찬은 출전 준비를 마쳤다.


다른 참가자들이 하인의 도움을 받으며 부산스럽게 치장하는 것과 달리 간편하고 소박한 차림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말 옆에 나란히 서서 활기차고 부산스러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젊은 무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사로잔에게 다가왔다. 그녀보다 몸집이 크고 나이도 한두 해 많아 보였다.

해무찬이 먼저 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사로잔이 이끄는 뱔의대의 부대장이었다.


그를 발견하자 사로잔이 활짝 웃었다.

“지탈! 부대장도 준비를 끝냈군?”

“초루산은 위험하니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괜찮아. 훈련도 아니고. 초루산은 어릴 때부터 누비던 곳이니 맡겨둬.”

사로잔은 지탈을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말고삐를 놓고 지탈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얹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이번 대회에서 최고점 받으면 청혼한다면서? 나 때문에 청혼 못 하면 마리가 얼마나 실망하겠어?”

그녀의 웃음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지탈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하하, 알고 계셨군요.”

사로잔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는 아랑곳없이 사로잔과 해무찬은 근엄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사람들에게는 진지하게 보였다.


“올해 최고점은 나한테 양보해. 이번에는 특별히 예감이 좋다고.”

해무찬의 자신 있는 말투에 사로잔이 피식 웃었다.


“사냥감이 어서 옵쇼 기다리나 보지?”

“비웃지 마. 이번에는 달라. 오묘한 기운이 넘친단 말이지. 마치 운명처럼.”

“그럼 넌 운명이나 갖고 사냥감은 나한테 넘겨.”


겉으로는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기에 작전회의를 하는 장군처럼 보였다.

어디에나 지켜보는 눈이 있고, 따르는 부하도 많기에 늘 위엄있는 몸가짐이지만, 둘이 있을 때만큼은 장난꾸러기 소꿉친구였다.


사로잔이 훌쩍 말 등으로 뛰어올랐다. 말 위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그녀는 조각처럼 수려했다.

햇볕에 그은 피부에 윤기가 돌았다. 예리한 눈빛이 속을 들여다보는 듯 사람을 긴장하게 하지만 웃을 때는 천진난만한 눈매가 어린아이 같았다.


해무찬도 가볍게 말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두 사람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다. 무예 실력도 막상막하였다.


사로잔은 부드럽고 빠르며 날카로운 검법을 구사했고, 해무찬은 힘차고 묵직한 검법을 구사했다.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검술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사냥을 시작하는 나발이 울리자 초루산 입구는 요란한 북소리로 가득 찼다. 사흘 뒤 이 자리에서 사냥의 결과를 품평하고 최고점을 가릴 것이다.

비르삼이 내리는 귀한 보물과 최고의 무사라는 명예가 주인을 기다렸다.


*


사로잔과 해무찬은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초루산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수련한 곳이었다. 어디에 사냥감이 많은지 정확히 알았다. 선두에 나설 필요도, 서둘러 산을 오를 필요도 없었다.


“찬, 국경 근처에서는 조심해.”

“알아. 날 뭘로 보고.”

해무찬은 정색했지만, 과거가 있기에 곧 입을 다물었다. 따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오솔길을 채웠다.

“넌 하나에 빠지면 다른 건 못 보잖아. 지금은 스승님도 안 계시고.”


스승인 지곡대사가 살아있을 때였다.

멧돼지를 쫓던 해무찬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마내국 국경 너머였다. 첩자로 몰릴 뻔한 위기는 지곡대사의 도움으로 무마되었다. 마내국 수비대장이 한때 지곡대사에게 무예를 배운 덕분이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 그럴 일 없어.”

해무찬은 말고삐를 쥐고 앞장섰다.


*


삼 년 만에 찾은 초루산이지만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물가에 앉아 목을 축이고 땀을 식혔다. 골짜기를 따라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자 공기마저 달콤했다.


해무찬이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사로, 들었어? 아버지가 그러시더군. 사냥대회 끝나면 혼인하라고.”

“너나 나나 신경 안 쓰잖아?”


“이번엔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던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그분들이 뭐라든 난 떠날 거야.”

“떠난다니?”


비장한 목소리에 해무찬이 몸을 틀었다. 발이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풍덩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대원들은 어떻게 하고? 소명장군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 잊었어?”


사로잔은 하늘을 삼킬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빼곡히 자란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푸른 조각보처럼 보였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새로운 것도 배우고. 경험도 쌓고.”

“지금도 잘하잖아?”

“신비한 일이 세상에 널려 있어. 유리산, 얼음섬, 시조새···. 이상하지 않아? 왜 용각에만 없는지? 심지어 소문이 자자한 요귀도 나오지 않아. 그걸 볼 거야. 내 눈으로, 직접.”


“말은 그럴듯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알아. 하지만 누군가 날 부르고 있어. 요즘 그 느낌이 강해져.”

이쯤 되면 아무도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순서였다.


“정처 없이 떠다니는 삶이라. 어떻게 지낼 건데?”

“비파를 연주하며 돈을 벌 거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어.”

해무찬은 오래전부터 그녀의 소망을 알고 있었다.


사로잔의 방에는 전설과 신화에 관한 책이 쌓여있고, 탐험가나 보물 사냥꾼의 모험담도 끼어있었다. 지나가는 꿈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행동으로 옮길 줄은 몰랐다.

‘거리의 악사라···. 떠돌이 무사보다 안전할지도. 사로는 타고난 무사여서 금방 정체가 탄로 날 테니까.’

친구의 계획을 따져보던 해무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모부 대로한테 어떻게 말하려고? 타내 대모는? 무엇보다 비르삼께서 허락하실까. 사반의 성곽을 나가기도 힘들 거야. 국경을 넘는 건 더더욱 어려울 테고.

‘소명장군이 용각국을 떠난다니. 절대 불가능하지.’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 적당히 장단이나 맞춰주자. 사로의 엉뚱한 장난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까.

“나도 대금이라면 자신 있지.”

“뭐, 너도 관심 있어?”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고 해무찬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거리에서 돈을 벌다니? 그야말로 어이없다.”

“하긴, 나도 너까지 간수하기는 싫어.”

사로잔이 큰 소리로 웃으며 일어섰다.


“오늘은 사냥에만 집중하자고. 이왕이면 좋은 물건을 선물해야지!”

“당연하지! 이번에는 진정한 승부를 내주겠어!”

해무찬도 자신 있게 외쳤다.


갈림길에 오르자 사로잔이 손짓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해무찬은 오른쪽을 가리켰다. 결이 고운 갈기를 펄럭이며 검은 말 두 마리가 양쪽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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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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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6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7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5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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