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142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5.11 11:22
조회
202
추천
6
글자
10쪽

선계_회상

DUMMY

해밀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여라함이 어떻게 나올지 조심스러웠다. 길고 넓은 소매로 땀을 닦는 척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인간세에 갔습니다.”

“암흑성단의 호위대장이 인간세에는 왜?”

“그것이···.”

해밀은 어디까지 설명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숨을 들이마셨다.


“한 아이를 만나러 갔는데, 아니 도와주러, 아, 지켜보러 간 겁니다. 지켜보러. 그러니까 천사의 신분으로 간 거지요. 허허허.”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여라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탄생과 죽음을 보살피는 암흑성단의 천사가 살아있는 사람을 보러 갔다니?”

“아하하, 네. 뭐,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이기에 한울이 직접 내려가나?”

여라함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해밀은 긴장이 풀렸다.

대분성전투 이후 한울과 여라함의 사이가 좋아졌으니 무사히 넘어갈 것이다.


해밀은 너털웃음을 뱉었다.

“사로잔이라는 여자아이인데, 곧 스무 살이 된답니다. 작은 나라의 무사라는데 어찌나 각별한지, 잃어버린 가족을 찾은 것처럼···.”


그의 말에 여라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해밀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말을 멈추었다. 여라함이 천천히 돌아섰다.


곧은 눈길로 마주 보자 해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군.”

“아, 아닙니다. 그저 사소한 일이라.”


해밀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치기는 했지만 숨겨도 소용없었다.

여라함이 알고자 한다면 기억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읽을 것이다. 그러느니 미리 털어놓는 편이 홀가분했다.


“그것이···, 혹시 미사랑님의 혼 조각일지도 모른다고···.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닙니다. 절대, 절대로! 네, 네. 천계의 기운이 너무나 미약하다고 했으니까요.”

조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손가락 끝을 잡아 보였다.


“언제 찾았나?”

“인간세의 나이로 다섯 살 때였나···. 여하튼 천계의 시간으로는 한두 해 전입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어디서, 어떻게 찾았는지.”


“반파홍귀를 쫓다가 우연히 만났답니다. 미사랑님의 혼 조각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그가 직접 내려가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여라함은 가던 길을 따라 돌아섰다. 영진성단 너머 아득한 끝에 시선을 두었다.

‘한울이 내게 알리지 않았단 말이지. 벌써 그렇게 성장했나.’

그가 한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장의 피가 끓어올라 온몸으로 내달았다.

미사랑의 혼 조각을 하나 더 찾았다. 그것은 더 많은 조각을 찾을 수 있다는 암시였다.


암흑성으로 돌아오지 못해도, 예전의 모습을 찾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미사랑이 인간세를 선택했다면, 그곳으로 가면 된다. 그곳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니까.


가슴이 뻐근해졌다. 새로 찾은 조각은 한울이 지키고 있다.

천선계 호위대 중 그만큼 뛰어난 무사가 없으니 한울이 곁에 있다면 그 아이는 안전할 것이다. 그라면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소중히 여길 것이다.


*


영진성 저택으로 가는 길은 싱그러운 나무와 풀이 저마다의 빛깔을 자랑했다. 탐스러운 꽃과 어울려 황홀하지만, 해밀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바람과 새소리가 음악처럼 흘러도,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늘 온화한 미소를 짓는 여라함도 미사랑과 관련된 일에는 예민했다.


해밀은 조바심이 났다. 지금 암흑성단을 도와줄 존재는 여라함 뿐이지 않은가.

‘둘 사이가 가까워진 줄 알았는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분성전투에서 암흑성이 사라진 뒤 여라함은 한울을 자주 찾았다.


주군의 소멸을 목격한 이후, 한울은 성격도, 혼의 빛깔도 바뀌었다. 이전보다 훨씬 과묵해졌지만, 여라함의 부름에 잘 응했고,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슬픔과 원망은 해밀에게도 응어리로 남지 않았던가.

한울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한동안 꼼짝 못 했다. 그래서 한울이 말을 잃고, 혼빛마저 바뀌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로잔을 찾아냈을 때, 한울은 날아갈 듯 기뻐했다. 여라함에게는 직접 말할 테니 확신할 때까지 알고만 있으라고 부탁했다.


해밀은 기다렸고,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그 작은 혼 조각마저 인간세에서 스무 살을 맞게 되었다.


‘한울이 잘못 생각한 걸까.’

발만 내려다보며 묵묵히 기다렸다.


“이만 돌아가게. 수석이 암흑성단을 오래 비우면 위험하니. 인간세에는 내가 내려가겠네.”

여라함은 고개를 돌려 해밀에게 눈인사를 했다.


해밀은 넋 놓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마무리에 정신을 차렸다.

“고맙습니다. 여라함님, 미사랑님을 꼭 지켜주십시오.”


허리를 깊이 숙인 해밀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미리내에 와 있었다.


밝은 하늘을 받치고 별들도 힘껏 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만큼 밝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해밀은 멀리 우주의 기둥 바로섬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암흑성을 되찾아주십시오.’


그는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숙였다.


*


영진성의 정원은 꽃과 나무로 소담하게 꾸며졌다. 모든 것들이 머물고 싶은 자리에서 가장 맑은 기운을 뿜어냈다.


마로가 여라함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랑누를 보러 자주 내려가지 않으십니까? 왜 말씀 안 하십니까?”


정원을 돌아보던 여라함은 마로의 질문에 미소로 대답하고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율은 어떻게 지내는가?”

“여전히 저택에만 머무십니다. 아유라는 자주 찾는다더군요. 그러고 보니 아유라는 가끔 종적을 감춘다고 합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고요.”

“무슨 일을 꾸미는지 보면 알겠지.”


“한울을 부를까요?”

“아니, 곧 찾아올 거다. 그보다 부녹에게 알려라. 혼 조각 하나를 더 찾았다고.”

“네. 알겠습니다.”

마로의 몸은 빛이 깜빡이듯 이내 사라졌다.


여라함은 정원의 가장자리 무지갯빛 연못에 다다랐다.

영진성단의 드넓은 정원에 비하면 작은 연못이지만 맑고 시원한 물이 솟아 주변의 공기마저 싱그럽게 만들었다.


그는 이 연못을 섬김이라고 불렀다. 섬김은 가끔 인간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알영처럼 그가 바라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연못가에 앉아 일렁이는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마다 다른 색깔과 모양의 물고기들이 미끈하고 활기차게 헤엄쳤다.


그 날렵한 움직임을 보니 아랑누를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아랑누는 다섯 살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미약한 영안으로 세상을 보았다.


‘저기서 춤추는 것은 뭐야? 부드럽지만 아주 힘이 세.’

작은 손이 가리키는 곳은 골짜기 아래 넓게 펼쳐진 늪지였다.


줄무늬 물고기들이 먹이 사냥을 하고 있었다. 힘차게 뛰어올랐다가 몸을 뒤틀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곡예처럼 보였다.


‘저건 가물치야.’

아홉 살 소년이 대답했다.


‘물고기마다 기운이 다르네?’

‘물고기도 종류가 많아. 인간세에 수많은 종족이 어울려 사는 것처럼.’

‘종족?’

‘응. 인간세에는 너나족 말고도 여러 종족이 있고, 정령도 있어서 서로 어울려 찬란한 기운을 뿜어내.’


‘예쁘겠다. 나도 보고 싶어.’

‘언젠가 보게 될 거야. 넌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도 볼 수 있어.’

소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가리개를 두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라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미사,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손가락으로 연못물을 휘젓자 물결이 거세지며 푸른색에서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울렁이는 물결을 따라 그의 머릿속에도 많은 장면이 어지럽게 스쳐 갔다.


그 속에서 해밀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사람의 눈에는 인간세만 보인다는데,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천계는 완전히 잊은 걸까요?’


너나족 사람으로 태어난 미사랑의 혼 조각을 발견한 날이었다. 다섯 살의 아랑누를 처음 발견한 날.


여라함의 기억은 해밀에서 멀어져 빠르게 회오리치다가 열여섯 살의 아랑누에서 멈추었다.


‘빛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요. 사람이 빛을 가리는 거예요.’

여전히 눈가리개를 하고 검은 지팡이를 쥐고 있지만, 그때는 영안으로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여라함은 어지러운 생각을 털어내려고 차가운 물에 깊숙이 손을 넣었다.

보랏빛 물결을 타고 인간세가 비쳤다.


넓은 초원에 창과 화살을 갖춘 무사들이 말을 타고 모여들었다. 군데군데 천막이 세워졌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모두 기대에 부풀어 상기된 얼굴이었다.


갑작스레 드러난 인간세를 보며 여라함은 또 다른 혼 조각을 떠올렸다.

‘사로잔이라···. 내가 못 느낄 정도면, 영력이 아주 미미하겠군.’


연못은 이내 투명해졌고, 희미하게 드러났던 인간세의 모습도 어느새 사라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숨은 사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4 아랑누_바람의 아이 이루다 22.05.30 52 1 10쪽
33 사로잔_합류 22.05.30 49 1 10쪽
32 사로잔_성물의 주인 22.05.29 47 1 9쪽
31 사로잔_새놀호수 22.05.29 49 1 13쪽
30 사로잔_변수 22.05.28 61 1 12쪽
29 사로잔_증거물 22.05.28 54 1 11쪽
28 사로잔_뒷거래 22.05.27 49 1 10쪽
27 사로잔_망나니 22.05.27 55 1 12쪽
26 사로잔_부망 약초시장 22.05.26 58 1 13쪽
25 사로잔_일함루 이곤 22.05.26 53 1 13쪽
24 사로잔_부망으로 22.05.25 53 1 12쪽
23 사로잔_거대상단 아순치 22.05.25 59 1 11쪽
22 선계_호위무사 22.05.24 53 1 10쪽
21 선계_노각부줄 22.05.24 63 1 11쪽
20 아랑누_사람의 손 22.05.23 52 2 10쪽
19 아랑누_폭풍 전야 22.05.23 63 1 9쪽
18 아랑누_무언의 암시 22.05.22 53 1 10쪽
17 아랑누_흰 호랑이 호설 22.05.22 55 1 9쪽
16 아랑누_불청객 22.05.21 55 1 10쪽
15 아랑누_백호족 온설지 22.05.21 58 1 15쪽
14 아랑누_세운랑 원로 22.05.20 62 1 12쪽
13 아랑누_악몽 22.05.19 62 1 10쪽
12 아랑누_귀령송환사 22.05.18 66 2 13쪽
11 사로잔_결심 22.05.17 73 2 12쪽
10 사로잔_비르삼 알찬 22.05.16 64 2 11쪽
9 사로잔_여행 준비 22.05.15 68 2 12쪽
8 사로잔_타내 대모 22.05.14 76 2 11쪽
7 사로잔_단검의 주인 22.05.14 77 2 15쪽
6 사로잔_용족 다루영 22.05.13 84 3 12쪽
5 사로잔_녹디사원 22.05.12 125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