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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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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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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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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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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랑누_뱃삯

DUMMY

주홍빛 길잡이 구름은 서쪽 하늘 끝 수평선에 걸렸다. 구름이 손짓하는 곳은 바다 건너 유우대륙이었다.

배를 타기 위해 송원국 서쪽 아맹항에 이르렀지만, 뱃삯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랑누는 시장이 시작되는 골목 입구에 주저앉았다.

보라사막 끝자락에서 열흘이나 걸었기에 더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종아리를 두드리며 담장에 기댔다.

온설지와 이연도 덩달아 그늘을 찾아 기대앉았다.


아맹항은 송원국에서 가장 큰 항구이기에 시장 골목까지도 북적거렸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사람 사는 냄새가 섞여 독특한 냄새로 가득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만, 골목을 따라 늘어서선 먹거리도 많아 저절로 침이 돌았다. 갓 튀겨낸 주전부리 냄새 때문에 뱃속에서 끊임없이 천둥이 쳤다.


온설지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바다를 건너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말이야. 꼬마야, 뱃삯은 있어?”

이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머니에는 잎전 몇 개뿐이었다.

“다 썼어요. 그나마 며칠 야영해서 이만큼 버틴 거예요.”


“보석 팔면 다 해결되는 거 아냐?”

온설지가 투덜거리자 까마귀 도조가 소리쳤다.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내가 목숨 걸고 지키겠어!”

“그 말은···, 까마귀 고기?”

온설지의 하얀 눈썹이 더 하얗게 빛났다.


매서운 눈초리로 입맛을 다시자 도조가 깃털을 부르르 떨었다. 아랑누의 어깨 위로 포르르 날아가 등 뒤로 숨었다.


아랑누가 지팡이를 세워 잡았다. 기력을 회복했는지 얼굴에는 들뜬 미소가 가득했다.

“연아, 잎전 남은 거로 요깃거리 좀 사줘. 우리도 장사하자.”

“무슨 장사? 우리가 가진 게 뭐 있다고?”

온설지가 나귀 등에 실린 보잘것없는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아랑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알고 보면 우리도 가진 거 많아.”


*


시장 골목에 좌판이 두 개 늘어났다. 하나는 귀령송환사의 것이고, 하나는 그림쟁이의 것이었다.

뒤쪽 벽에는 ‘길 잃은 망령을 귀히 보내 드립니다’,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원하는 것 모두 그려드립니다’라고 쓴 커다란 종이가 걸렸다.


“이제 손님이 오기만 하면 돼.”

아랑누가 손을 모으고 정좌하고 앉았다. 눈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기운을 살폈다.


검은 눈가리개를 두른 귀령송환사에게 관심을 두는 이가 없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한 건이라도 성사되면 오늘 숙식이 해결되는 것이다.


온설지와 이연은 가락을 넣어 읊조리듯 사람들을 부르면서 한편으로 속닥거렸다.

“연아, 그럼 춘화도 그리냐?”

“아우, 형님도 참···. 무슨 그런 말씀을···. 당연하죠!”

두 사람은 고개를 돌리고 킥킥거렸다.


“거기 두 분. 다 들리거든요.”

아랑누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도조는 몸을 비비 꼬더니 참지 못하고 날아올랐다.

“이 몸은 시장을 구경해야겠다. 눈사람은 여기를 지켜라.”

“까망아, 구경만 하지 말고, 물고기라도 몇 마리 잡아 와. 저녁으로 해먹게.”

“어허, 신조에게 그런 요구를 하다니, 무엄하구나!”

도조는 콧소리로 흥흥거리더니 휘리릭 날아가 버렸다.


날개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던 아랑누가 재빨리 일어나 꾸러미에서 보석 하나를 빼냈다.

“온형, 이거 사줄 보석상이 있는지 알아봐 줘.”

“오! 좋은 생각. 역시 아누는 달라. 얼른 알아보고 올게.”

온설지는 품 안에 보석을 숨기고 뛰어갔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귀령송환을 부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연은 초상화 한 장과 풍경화 한 장을 그렸다.


“저녁 값은 벌었네요.”

이연이 싱글벙글 웃는데 온설지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왔다.


“보석상은 있는데, 자기들이 다룰 수 없다는 거야. 뭔 말인지.”

“혹시 이거 너른벌에선 안 나오는 거야?”

“그건 모르지만, 확실한 건 뱃삯이 날아갔다는 거지.”

온설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벽에 기대앉았다.


아랑누가 이마를 짚고 끙끙대는 사이 이연에게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이거 두 장을 부모님이 함께 계시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나요?”

“당연하죠. 어디 보자. 옷도 똑같이 그릴까요?”

“고급 옷감으로 화사하게 그려주세요.”


이연이 그림 값을 흥정하는 모습에 온설지는 혀를 내둘렀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꼬맹이 수완이 보통이 아닌데?’


아랑누는 망령이 떠다니는지 보려고 영력을 모았다. 예상대로 그들 곁을 스쳐 가는 영이 있었다.

‘이건 망령이 아니라 혼의 염원인데?’

이끌리듯 일어서니 온설지도 눈치 채고 따라 일어났다.


“연아, 넌 여기 있어. 내가 갔다 오마.”

이연은 고개만 끄덕이며 이내 붓에 집중했다.


아랑누는 지팡이 끝을 또각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혼의 염원이 향하는 곳은 한 군데야. 여인의 뱃속에 아기가 있는 곳이지.’


*


순수하고 간절한 혼의 염원이 들어간 곳은 희고 고운 돌로 쌓은 담장 안이었다. 귀족의 양식은 아니었으나 손꼽을 만한 부자의 저택이었다.

담장 안을 자세히 둘러보니 혼의 염원만이 아니라 망령들까지 뭉쳐있었다.


육중한 대문을 두드려 문지기를 불러냈다.

“이 집에 아이를 가진 여인이 있나요?”

“아니오. 잘못 아셨습니다.”

문지기가 문을 닫으려 했다.

아랑누는 지팡이를 내밀어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며칠 동안 변괴가 일어났을 텐데요. 날이 밝은 데도 집안만 어둡다거나 잠든 채 돌아다니는 여인이 있다거나,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는 사람이 없었나요?”

“예?”

그의 얼굴이 하얗게 바뀌었다.


세 가지 일이 모두 일어난 데다 눈앞의 낯선 방문자는 더욱 신기했다. 눈가리개를 한 가녀린 여자인데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누, 누구십니까?”

“반다산의 귀령송환사입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문지기가 멀어졌다.


잠시 후 안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반달음으로 다가왔다. 그녀 역시 아랑누가 특별한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귀령송환사라고요?”

“모여사원에서 수련한 귀령송환사입니다. 귀댁에 근심이 깊어 보여 도와드리려 합니다.”

아랑누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안주인은 입을 꾹 다물고 대문 밖으로 나와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쪽에 관심 두는 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녀를 마당 안으로 이끌었다.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대청마루에서 아랑누는 향기 좋은 차를 대접받았다. 고위관리가 아닌데도 이 정도 고급 차를 마신다면 대상이 틀림없었다.


아랑누는 안주인의 불안한 손짓을 모른 척하고 차의 향기를 즐겼다. 따뜻한 차가 지친 몸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안주인은 망설이다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딸아이가 밤마다 돌아다닌답니다. 벌써 한 달이 넘었어요. 깨어나서는 기억을 못 하고, 낮에는 잠만 잡니다. 밥도 안 먹어요. 물이나 조금 마실까. 약을 써도 듣지 않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아랑누는 별채 지붕에 몰려있는 염원과 망령을 바라보았다. 안주인의 눈에는 그녀가 하늘 저 멀리를 응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향차를 다 마신 아랑누가 검은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따님을 보고 말씀드릴게요.”


아랑누는 별채 앞에 서서 망령과 딸의 기운을 살폈다. 디딤돌에 놓인 여인의 신발이 그녀의 영안을 잡아끌었다.


모양은 평범해도 특별한 감정이 깃들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아련한 기운이 자신을 보아달라고 안달이었다. 아랑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방안 구석구석 혼의 염원이 숨어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다행히, 한이 서린 망령은 바깥벽을 둘러쌀 뿐 방안에는 보이지 않았다.


“따님은 아기를 가졌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안주인의 몸이 뒤로 젖혔다.


“뭐라고요? 사내도 없는데 무슨···.”

“혼의 염원이 몸을 가지려고 몰려들었어요. 사람으로 태어날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의원들은 그런 말 안 하던데요?”


아랑누가 고개를 돌렸다. 안주인은 흠칫 놀랐다. 그녀에게 눈이 있는 것만 같았다.

“혹시 그들에게 약초를 대시나요? 아니면 귀댁에서 약방 운영권을 갖고 계시겠지요?”


안주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화를 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진땀을 흘리며 씩씩거렸다.

“아니,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이런 망측한 일이!”

여인은 중얼거리며 제 가슴을 쳤다.


과희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몇 차례 있었다. 여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거래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명예와 위신을 거들먹거리며 약을 쓸 테니까.


“따님을 혼인시키면 제대로 영을 맞을 수 있지만···, 아기가 목숨을 잃으면 망령이 몰려들겠지요.”

아랑누는 침착하게 잠든 여인의 손을 잡았다.


안주인은 누워있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해괴한 일은 한 달 넘도록 충분히 겪었다. 그런 일이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견딜 수 없다.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이 사람 믿을 수 있나?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둘째가 아기를 가졌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다고? 혹시···?’


아랑누는 그 혼란스러운 마음을 읽었다. 하소연하려고 창가에 몰려든 망령에게도 귀를 기울였다.


“큰 따님이 상단을 따라 과희국으로 가버려 작은 따님을 애지중지 키우셨군요. 그래서 모여사원에 대해서도 아셨고요.”

안주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입술을 꼭 다물었다.


아랑누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놓지 않았다.

“따님을 은애하는 남자는 오랫동안 따님을 지킨 사람이에요. 그분과 맺어주면 따님의 병이 나을 거예요. 다만···.”

“네, 네. 말씀하세요.”


“작년에 월영국으로 가던 상인들이 사고로 많이 죽었군요. 제대로 보상하지 않아 남은 가족들이 힘겹게 살고 있답니다.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망령으로 남았어요.”

아랑누가 방을 둘러보았다.

안주인도 덩달아 방을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벽을 주의 깊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켰다.


아랑누가 망령을 대신해 부탁했다.

“남은 가족도 돌봐주시면 상단 일도 잘 풀릴 겁니다.”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인데도 서늘한 느낌에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섰다.


“따님에게 누가 신발을 만들었는지 물어보세요.”

아랑누의 말에 안주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


마당에 홀로 선 아랑누가 낮고 부드러운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난 빛줄기가 그물이 되어 떠올랐다.

망령들은 빛나는 글자에 달라붙어 춤을 추다가 멀리 사라졌다.


별채에서 딸을 지켜보던 안주인이 환호성을 질렀다.

“깨어났구나, 깨어났어!”

눈물범벅이 되어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왔다.


“둘째가 일어났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몸조리를 잘 해주시고, 부디 약속을 지켜주세요.”

“사례를, 사례를 해야죠.”

“아니에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 당연히 할 일이지요.”

”아니, 그래도···“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서 이만···.”


아랑누는 황망히 바라보는 안주인을 뒤로 하고 저택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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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4 아랑누_금협 시장 22.06.14 46 1 13쪽
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 아랑누_뱃삯 22.06.12 45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3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7 1 9쪽
51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22.06.08 43 1 13쪽
50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22.06.07 46 1 11쪽
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6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2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6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6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4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6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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