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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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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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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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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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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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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사로잔_도리사 해협

DUMMY

항해하기 좋은 날씨였다. 첫여름이 끝나고 내가을이 시작되는 무렵은 폭풍도 쉬는 계절이었다. 바람도 알맞고 하늘도 맑았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힘차게 나아갔다.


광검국과 올뫼국 사이의 도리사 해협은 작은 돛단배로 열흘 정도 걸리는 바닷길이었다. 사로잔이 구한 배는 돛이 여섯 개나 서있는 중형의 여객선인데다 바람까지 도와주어 닷새 안에 도착한다고 했다.


아순치는 뱃전을 떠나지 않고 올뫼국이 있는 서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명산 청옥선원에서 사귄 벗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여전히 밤마다 산을 헤매겠지? 그때 이후로 못 만났는데···.’


지금은 쫓기지도 않고, 단주의 허락까지 받은 여행이니 여유로웠다. 벗을 만나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도 묻고 술잔도 기울이고 싶었다.

물론, 해지기 전에 술자리를 끝내야겠지만.


“뭐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올뫼국에 숨겨놓은 연인이라도 있나?”

해무찬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찬 발소리로 해무찬임을 알기에 놀라지 않았다.


“좋은 기억이 생각나서.”

“어디? 이 바다에?”

웃음을 머금은 채 아순치는 해무찬을 돌아보았다.


해무찬의 머리카락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꼭대기 갑판에서 수련한다더니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수련하다니 제법인걸.”

“내 몸이 아니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윽박지르면 아주 귀찮거든.”

“그래. 어서 씻어라. 저녁에는 특식이 나온다니.”

“오! 좋은 소식! 다루에게 알려줘야지.”

해무찬이 선실로 향해 뛰었다.


그의 등을 향해 아순치가 소리쳤다.

“가더라도 씻고 가라.”

해무찬은 알았다며 손을 흔들고는 뛰다시피 걸었다.


‘내 안에 사는 또 다른 나···.’

아순치가 중얼거렸다.

‘그 녀석, 여전히 요리에 빠져있으려나.’

주명산 청옥선원을 생각하니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


낮에는 첫여름의 기운이 남아있지만, 밤바다는 내가을에 들어섰는지 서늘했다. 수평선을 따라 구름이 깔렸어도 머리 위 하늘은 맑고 별은 무리지어 빛났다.


보름달이 눈부실 만큼 밝은 빛을 내뿜었다. 덕분에 갑판 위에 앉은 아순치의 모습이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보였다.


사로잔은 모포 두 장을 들고 아순치 옆에 앉았다.

“지금 보니까 정말 헷갈리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름다움이 지나쳐.”

아순치는 피식 웃으며 모포를 받았다.


두 사람은 밤바람에도 꿋꿋하게 앉아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물에 비친 달은 춤을 추듯 출렁였다.

“찬과 다루는?”

“다루는 약초 손질. 떨이로 팔던 거 있었잖아? 찬은 당연히 그걸 돕고 있지.”

“바늘이 가는데 실도 가야지.”

“그 목걸이는 뭐야? 달빛을 받으니 색깔이 오묘하네.”


아순치가 유리구슬을 쓰다듬었다.

“이 안에 신비한 물건이 들어있거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뭔가 들어갈 크기도 아니고.”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지. 그래서 신비한 거야.”


“신비한 일이라···. 용각국에는 전설 같은 것도 없는데.”

“용각에 전설이 없다고? 아, 모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용각국에서만 지워졌으니.”

“무슨 일인데 그렇게 거창해?”


“하늘에 떠 있는 섬, 용각섬의 사마와 반나 이야기야. 하늘섬이 용각이어서 나라 이름도 용각국이고, 그 섬의 수호자가 사마와 반나라서 수도가 사반이지.”

“놀라운데? 그 용각섬, 지금 어디 있어?”


“백 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대. 용각이 사라지자 용각국 사람들의 기억도 통째로 지워졌다지. 그래도 하늘섬이 어딘가에서 용각국을 지킨다고 해. 거기서는 요귀가 안 나타나니까.”

“전혀 몰랐어. 우리가 모르는 우리 이야기네.”


“책에서 얻는 소식은 한계가 있어. 대륙을 넘어가면 상상도 못할 일을 만날 거야. 순단대륙은 그나마 안전하지만, 보면서도 믿기 힘든 일이 많아.”

아순치는 밝은 달을 바라보며 목걸이에 손을 얹었다. 유리구슬이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아치, 왜 우리와 동행하는 거야? 진짜 이유가 뭐야?”

“글쎄. 이유가 꼭 필요하다면···. 거대한 시조새가 말해줬어. 전설을 완성하라고. 그게 뭔지 보고 싶어. 너희가 그 답을 알 것 같고.”

“다루가 얘기한 거랑 비슷하네. 그 이상한 전설. 순례자들이여, 진실을 여는 바늘을 따라가라, 길을 시작하면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뭐 이런 거.”


“한 눈에 너희를 알아봤다니까.”

아순치가 모포를 걸친 채 일어나 기둥을 붙잡았다.

“아치대륙이여, 이 아치가 너를 만나러 간다.”


사로잔은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해맑은 얼굴에서 거친 말투가 튀어나올 때마다 기름과 물이 한 그릇에 담긴 것 같았다.


아순치를 뭐라고 부를지 물었을 때의 너털웃음도 그랬다.

‘부를 때는 아치. 아치대륙과 같은 이름이야. 그만큼 내가 큰 인물이라는 뜻 아니겠어?’

그때의 말투와 목소리가 떠올라 팔뚝이 부르르 떨렸다.


사로잔도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달구경을 하자든 타내 대모가 비쳐 보였다.

‘그때도 이상했어.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데.’

허리띠 끝의 장공거 문양을 쓰다듬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금 네가 가는 길이 너의 길이다. 기쁘게 그 길을 열어라.’


그때는 뱔의대에 대해 말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가는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 길일까.

사로잔은 밤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차가운 바다 공기가 들어가자 머릿속까지 얼얼했다.


*


내일 오전이면 올뫼국 하말항에 닿을 것이다.

다루영은 증상별로 사용할 수 있게 약초를 손질했다. 응급처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더 있다면 찌고 말려서 보관하기 쉽게 만들 테지만, 지금은 시간과 도구를 욕심낼 수 없었다.

상자를 작은 궤짝에 넣고 갑판으로 나왔다.


달이 머리 위로 떠올라 환하게 바다를 비추었다.

사로잔은 바다 위의 이지러진 달을 바라보았다. 하루도 아니고 사흘이나 배에 갇혀있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선실에 박혀있기는 더 힘들었다.


다루영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 피곤해?”

“응. 피곤하지는 않아. 답답해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그동안의 강행군에도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새놀 호수에서 나온 이후 머리도 맑고 몸이 부쩍 가벼워졌다. 몸으로 스며들던 신묘한 기운 때문인가.


“이렇게 바다를 보는 건 처음이다. 하늘 위에서만 봤는데.”

“다루, 예전에는 변신을 자주 했어?”

“그 정도는 아니야. 스승님이 절대로 변신하면 안 된다고 하셔서 몰래 다녔어.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나중에는 눈치 보는 것이 힘들어서 시들해졌어.”

“말썽꾸러기 제자였구나. 그렇게 안 보이는데.”


“독지린 사냥꾼에 대해 들은 다음부터는 무서워서 변신하지 않았어.”

“독지린?”

“용족의 비늘이야. 모든 독을 찾아낼 수 있고, 어느 정도는 해독도 가능하지. 그것을 얻으려고 사냥꾼들이 다니거든.”

“부망에서는 변신했잖아? 그렇게 위험한 줄 알았으면 안 하는 건데.”

“그때는 구름이 가려줘서 좋은 날이었고.”


“사냥꾼이라···. 너른벌에 용족이 얼마나 있어?”

“순수 용족은 곧 사라질지도 몰라.”

사로잔이 다루영의 어깨를 감쌌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지켜줄게. 찬이 그냥 있을 리 없지.”


‘그래서 더 걱정이야. 너도, 찬도 위험해질까 봐.’

다루영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부망의 약초시장에서 보았던 푯말이 떠올랐다. 실제 독지린은 안쪽 금고에 두었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끔찍했다. 몸이 오소소 떨렸다.


*


한밤중이 되자 거센 비구름이 몰려왔다. 배가 심하게 출렁였다.

사로잔은 선잠에서 깨어 아래위로 파도를 타는 흔들림을 세기 시작했다.


선원들이 갑판을 뛰어다니며 부르짖는 소리가 선실까지 들렸다. 복도의 불빛도 위아래로 흔들렸다.

다루영은 어느 상황에서도 깊이 잠들기에 깨지 않았다. 아마 배가 뒤집힌다면 깨어나리라.


천장을 바라보던 사로잔은 눈앞으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 스며드는 불빛에 진회색 무늬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꽃받침으로도 보이고, 두 손 위의 물방울로도 보이는 무늬였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타내 대모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를 쓰지. 기록으로 남지 않아도, 누구도 관심 없어도 그에게는 자신만의 역사가 존재한단다. 용각은 용각의 역사를 쓰는 중이야.

사로야, 너는 너의 역사를 쓰면 된다.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아. 선택도, 책임도 자신의 몫이니,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단다.’


“용각의 역사, 나의 역사.”

사라진 용각섬을 되찾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진짜라면 되찾아야지. 우리의 전설도.’

왼손을 꽉 쥐었다. 진회색 무늬 위로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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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아랑누_금협 시장 22.06.14 46 1 13쪽
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59 아랑누_뱃삯 22.06.12 44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3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7 1 9쪽
51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22.06.08 43 1 13쪽
50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22.06.07 46 1 11쪽
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6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2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6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6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4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6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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