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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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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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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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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DUMMY

올뫼국의 북쪽 끝, 월영국과 경계을 맞대고 있는 현월성.

한낮인데도 저잣거리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상금 사냥꾼들이었다. 무기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발에 채는 바구니나 채반을 있는 대로 걷어찼다.


넓은 평야와 우거진 숲을 가진 현월이건만, 이삼년 사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멀리 홍석산이 묵묵히 현월을 내려다보았다. 꼭대기에 붉은 바위가 있어 붉은머리산이라고도 불렸다.


홍석산의 바위계곡을 헤매며 한 청년이 약초를 찾아다녔다. 주홍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긴장한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석음초만 찾으면 돼.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서두르자.”


현월의 시장에서 약초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필요한 약초는 직접 찾아야 했다.

작년부터 갑자기 늘어난 괴물 때문에 약초를 구하러 다닐 수도 없었고, 상인들도 들어오지 않았다.


석음초에 대해 알려준 이는 현상금 사냥꾼 중 하나였다.

‘높은 산그늘에서만 자라는 약초라네. 종일 빛이 들지 않는 축축한 바위에 붙어 자라지. 자네 아버지 병을 고칠 수 있을 걸세.’

그것을 알려준 사냥꾼도 괴물에게 목숨을 잃었다.


괴물의 숫자도 늘어났고 현상금이 늘어나니 덩달아 사냥꾼도 늘어났다.

다친 사람은 나날이 늘고, 약초밭에는 마름병이 돈데다 상인마저 들어오지 않으니 시장의 약초가 바닥을 드러냈다.


불편한 다리로 산비탈을 구르며 기어 다닌 탓에 옷자락마다 흙과 마른 풀잎이 달라붙었다. 머리카락도 헝클어졌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괴물에게 들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석음초는 보이지 않았다. 응달마다 평범한 이끼뿐이었다.

청년은 풀이 죽어 바위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야 했다.

‘괴물을 만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다음에는 찾을 수 있을 거야.“


미끄러운 산비탈에서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고 말았다.

청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우거진 잡목 사이로 굴러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곡시단이 소담하게 피어있었다. 온몸이 쑤시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노랗고 빨간 곡시단을 한 움큼 잡아 뜯었다.


일어서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저기 욱신거리고 따가웠다. 비틀거리며 나뭇가지를 붙잡고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제법 넓은 오솔길로 들어섰을 때 북쪽 기슭에서 괴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를 찢을 듯 울리는 소리는 곧 다른 소리를 불렀다. 수백 마리가 함께 내는 고함이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 천둥이 울리는 듯 하늘을 찢는 소리였다. 산을 가를 듯 울리는 비명은 위협이 아니라 통곡에 가까웠다.


청년은 허둥지둥 내려갔다. 절룩거리는 다리가 균형을 잃고 삐죽 솟은 돌을 피하지 못했다. 종아리가 찢겨 상처가 났지만 멈출 수 없었다.


괴이한 소리는 어두워져서야 사그라졌다.


*


현월에서 그나마 장사가 되는 곳은 여관뿐이었다. 여관에 식재료와 물품을 납품하는 장사치들도 아직은 밥벌이가 되지만, 밑천이 드러나고 있었다.

술과 음식이 모자란 데에는 사냥꾼들의 횡포가 한몫했다.


”당장 가져오라고! 귀 먹었어!“

”술이 다 떨어졌다니까요.“

”그럼 다른 데서 빌려와. 그 정도 인심도 없어?“

한 남자가 탁자를 부술 듯 내리쳤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탁자를 내리쳐 조만간 부서질 것 같았다. 남자는 흔들리는 탁자를 발로 내치며 칼을 빼 들었다.


하인을 위협하며 칼끝을 흔들자 현월성의 시위대가 슬금슬금 들어왔다.

시위대원들도 칼을 빼 들기는 했지만 싸울 의욕은 없었다. 분대장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작게 웅얼거렸다.


”좋게 해결합시다. 술이 떨어진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현상금이 남의 손에 들어가면 아깝지 않습니까? 떡 쪄서 개 주는 꼴 되는 것보다는 힘을 보충했다가 괴물을 한방에 때려눕히시죠.“


열 명 남짓한 시위대원의 칼끝을 노려보다가 남자는 칼을 거두었다.

”흥! 현상금 타면 이따위 것은 마시지도 않아!“


사냥꾼이 자리에 앉자 시위대원들도 여관을 나왔다.


”분대장님, 잘하셨습니다.“

”똑같은 말만 하루에 열 번씩 해보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울 정도라네.”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그리 말하면 얌전해지네요.”

”내 생각도 아니야. 무휼이 알려주었으니. 우리도 가능한 한 싸움은 피해야지.”

분대장과 시위대원들은 여관이 모여 있는 골목을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


주홍빛 머리카락의 청년이 민가촌 옆 야산에 나타났다.

망태기 안에는 노랗고 빨간 곡시단이 들어있었다. 바짓가랑이는 찢어진데다 흙과 피가 달라붙었지만, 산에서보다는 잘 걸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룩거리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청년이 멈춘 곳은 한 민가 앞이었다.

야산의 한쪽을 약초밭으로 삼아 크게 농사를 지었던 것 같지만, 밭은 뭉개졌다. 사람이 없는지 별채가 몇 개나 있어도 휭하니 바람만 머물다 갔다.


”시향여, 곡시단을 구해왔어. 여기 놓을게.”

울타리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청년은 집안을 기웃거리다가 한숨을 쉬고는 망태기에서 꽃다발을 꺼내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도 없는 마당을 들여다보며 청년은 한참 동안 서성였다.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머물고, 몸을 돌리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결국 청년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가고 나자 뒤뜰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곡시단과 비슷했다. 노랗게 솟아 나와 끝으로 갈수록 빨갛게 변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곡시단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


민가촌 거리에서 순찰 중이던 분대장이 청년을 알아보았다.

”여어, 무휼! 시향여 집에 갔었나?“

”음.“

”여전히 문전박대인가? 참나, 여자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일세. 그렇게나 애틋했는데.“

그의 말에 무휼은 한숨을 쉬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분대장의 눈길이 무휼의 바지에 머물렀다.

”자네 또 다쳤나? 그새 약초를 구하러 갔었어?“

”석음초를 찾으려고.“

”이번에도 괴물을 보았나?“

”아니. 소리만 들었네. 수백 마리는 되는 것 같더군.“


”큰일이네. 성주님도 안 계시는데, 괴물은 늘어만 가고. 작년부터 갑자기 늘지 않았나.”

”사냥꾼들이 많이 오니 조만간 해결되겠지.“

“모두 피난 갈 생각만 하니···. 난감하네.”


분대장은 무휼의 팔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자네가 한 밥이나 먹여주게.“

”아버지 약부터 챙겨드리고.“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네.”

무휼은 분대장에게 끌려가다시피 골목을 빠져나갔다.


*


주명산 청옥선원에서는 사로잔이 다루영의 옆을 지키며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밤에서 새벽으로 가는 시간이라 사로잔은 졸다 깨기를 거듭했다.


까딱이던 고개가 결국 다루영의 소매 옆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가늘게 코 고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부스럭 소리에 눈을 뜬 다루영은 오래토록 사로잔을 바라보았다.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사로잔은 놀라 깨어 머리를 번쩍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잡초더미처럼 머리 위에 얹어졌다.

”깨어났어? 괜찮아?“


다루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로잔의 손을 잡았다.

”밤새 고민했어. 이건···, 양파 껍질을 벗기는 거라고.“

”뜬금없이 양파는 뭐야?“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너희가 찾아왔어.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녹디에 있었겠지. 여기 와서 스승님의 사정을 알았어. 단검의 주인을 따라온 덕분이야.“


다루영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암흑성도 모르고, 요귀의 정체를 몰라도, 양파 껍질을 까듯 하나씩 알게 될 거야. 계속 널 따라가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어.“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


문밖에 서성이던 해무찬은 잎차가 든 주전자를 들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찬,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오지?“

방안에서 사로잔이 소리쳤다.


그제야 해무찬이 문을 열었다.

”허허, 어떻게 알았어?“

”네 덩치가 보통인 줄 알아? 발소리가 그렇게 큰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차를 가져왔어. 얼른 일어나야지.“

해무찬이 차를 따라 주었다. 그가 다루영 옆에 앉을 수 있도록 사로잔이 비켜 앉았다.


”다루, 녹디에 알이 있었어?”

“아니. 난 못 봤어.”

“아우, 지금 다시 뒤져볼 수도 없고.”

사로잔이 한숨을 내쉬자 해무찬은 등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무슨 암호 아닐까? 진짜 알이라면 썩어 문드러졌겠지. 그 편지는 삼십 년 전에 쓴 거라고.”

“일리가 있네. 암호라···.”

사로잔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명의 나그네가 뒤늦게 식당으로 들어섰다. 청옥선원의 수련자들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간 뒤였다.

무추가 기다렸다는 듯 야채죽을 그릇에 담아왔다.


“나침반이 움직였어. 이번엔 북쪽이야.”

사로잔이 말하자 아순치가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거리를 계산했다.

“여기서 북쪽이라면 현월성이야. 홍석산이 유명하지. 붉은머리산이라고도 해.”


그 말을 들었는지 무추가 쪼르르 다가왔다.

“여행을 가더라도 북쪽으로는 가지 마세요.”


해무찬은 가지 말라는 말에 더 흥미가 생겼다.

“왜?”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잡아먹는대요.”

“괴물이라고? 어떤 괴물?”


“그건 몰라요. 현상금도 많이 붙었어요. 그렇지만 다 죽거나 도망갔대요.”

“현상금이라고?”

해무찬과 사로잔이 동시에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소리가 너무 커서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무추가 협박하듯 눈을 부릅떴다.

“가지 말라니까요.”

“그래. 걱정 마.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을게.”

다루영이 무추의 어깨를 다독였지만, 갑자기 빛나는 사로잔의 눈을 보며 웃음 짓고 말았다.


무추가 나가자 식당은 회의실로 바뀌었다.

“현상금이라면 당연히 우리 거지.”

해무찬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확신했다.


다루영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물론 그보다는 주민들의 안녕과 목숨이 중요하지.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이 말이야.”


사로잔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만 해댔다.

‘찬. 정말 너를 어쩌면 좋냐.’


사로잔과 달리 아순치는 해무찬의 그런 모습이 즐거웠다. 어딘지 백호족 친구와 닮았다. 어쩌면 그래서 이들과 쉽게 친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는 기분 좋게 그릇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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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아랑누_금협 시장 22.06.14 46 1 13쪽
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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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아랑누_뱃삯 22.06.12 45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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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4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7 1 9쪽
51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22.06.08 44 1 13쪽
»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22.06.07 47 1 11쪽
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7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3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7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7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5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8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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