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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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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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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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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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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아랑누_무시궁

DUMMY

온설지는 무너진 성벽 그늘에 숨어 보리죽을 끓였다. 사다녜부터 아랑누 찾기까지 한바탕 회오리를 겪고 나니 빈속에서 꾸르륵 천둥이 일어났다.

‘누가 주인이고 뭘 찾는지는 몰라도 기다려야 한다면 제대로 기다려야지.’


죽을 젓다가 국자로 냄비를 탕탕 쳤다. 멀건 물이 튀어 올랐다.

‘밤사이 일어난 일을 모르니 답답하네. 대단한 모험을 한 것 같은데···. 그걸 못 보다니. 아우, 아까워라.’


제단을 장식하느라 박아놓은 검은 돌이 다소곳이 열기를 뿜어냈다.

“햇빛이 세니까 불은 잘 붙네. 이거 봐라. 제단 아래 뜨거운 돌을 섞다니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어.”

“힝, 그런 건 관심 없어. 배고프다. 눈사람! 밥은 언제 되냐?”

도조는 그늘 밖으로 날개깃 하나도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종종거렸다.


온설지와 도조가 그늘에서 햇볕을 피하는 동안 이연은 벽을 따라가며 안쪽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폐허가 되었다 해도 남은 벽과 기둥만 살피기에도 하루가 빠듯할 것 같았다.


기둥의 조각은 섬세하고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넓은 회랑과 예배실이 있던 자리를 지나며 어디에 비밀통로가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명상실처럼 만든 작은 방을 바라보는데 흰 벽에서 스르륵 아랑누가 걸어 나왔다. 반짝이는 돌멩이들이 눈높이에서 길을 안내하며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가 나오자 벽은 틈 하나 없는 깨끗한 상태로 돌아갔다.


아랑누의 몸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하늘의 성물과 어울린 은은하고 아름다운 빛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이연은 그 빛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랑누에게 깃든 영력이 소년에게도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눈동자는 어느새 짙은 자줏빛으로 깊어졌다. 눈빛이 바뀌어도 움직일 수 있었다.


달려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미사랑님! 드디어···, 드디어 나오셨군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미사랑을 불렀다.


잃어버린 어머니를 부르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서러움과 반가움이 한데 섞여 듣는 사람의 마음도 측은해질 정도였다.


아랑누도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두 손으로 이연의 눈을 감쌌다. 손바닥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영력을 써버리면 시간이 더 길어진다. 지금은 이 아이에게 맡기고 영력을 보존해야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한 것도 순간에 지나가고, 이내 너나족 아랑누로 돌아왔다.

‘지금 내가 말한 거 맞아?’


그제야 이연의 몸에도 영력이 강한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힘으로 죽어가던 소년이 죽지 않고 목숨을 이어왔다.

그 영은 너른벌에 속한 영이 아니었다. 맑고 선하며 올곧은 신념으로 버티고 있었다.


아랑누는 이연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난 아무렇지 않아.”

이연이 눈물을 닦고 벌떡 일어났다. 눈빛도 소년의 것으로 돌아왔다.


“누님. 걱정했어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구요.”

애써 생글거리며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주위에 둥둥 떠 있던 돌멩이들이 이연에게 인사하는 듯 위아래로 통통거렸다.

“이건 뭐예요?”

“미로에 있었어. 길을 알려주던데?”

내려앉으라고 손짓하자 돌멩이 모양의 성물은 바닥으로 또르르 내려앉았다.


아랑누에게는 환한 돌멩이였지만 이연의 눈에는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와우! 이런 보석이 있었다니!”

이연은 감탄하며 보석을 한 움큼 쥐고 쓰다듬었다. 모양도 색도 다르지만 오묘하게 빛이 바뀌며 반짝거렸다. 손에 쥐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온설지와 도조가 이연의 외침을 듣고 달려왔다.

“이야, 이게 다 뭐야? 나도 하나 가져도 돼?”


“안 돼! 안 돼! 이건 하늘의 물건이야!”

불같이 소리 지른 건 도조였다.

“이건 천계의 성물이야. 감히 사람이 손을 대다니!”


도조는 애가 탔다. 보석의 모양이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대분성 전투에서 사라진 천계의 성물이었다.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암흑성은 모르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주인을 찾기 전까지 보석 모양으로 있겠지만, 사람의 손을 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있는 힘껏 날개를 퍼덕였다.

“웃기고 있네. 이걸 어디다 쓰려고? 넌 쓸데없잖아!”


“뭐야? 까망이가 왜 이래?”

온설지가 비아냥거렸지만, 도조는 날개를 펼쳐 보석을 감싸 안았다. 작은 날개로 보석 다섯 개도 가리지 못했다.


“안 돼, 아무튼 안 된 대두!”

도조는 울먹이면서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버텼다.


그러나 아랑누의 말에는 반대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갖고 다닐 수는 없잖아. 여행경비도 마련해야지.”

“그렇지만. 아랑누님···.”

머리를 사람으로 바뀌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아랑누가 도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시로 나가면 팔 수 있을 거야. 그럼, 맛있는 것 사줄게.”

“맛있는 거요? 그럼 고깃국도 먹는 거죠!”

이연이 해맑게 웃으며 어깨를 덩실거렸다.


도조야 시무룩해서 늘어지든 말든 자루를 가져와 보석을 담았다. 이연과 온설지는 앞으로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사원 밖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길잡이 구름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갈지 망설이자 온설지가 아랑누를 그늘에 앉혔다. 보리죽을 끓이던 그 자리였다.


“이루다에게 가보자. 하루만 더 신세 지자고. 넌 못 봤지? 사다녜들이 싹 바뀐 거.”

“화해했어?”

“아무렴. 확 달라졌지. 일단 끼니를 때우고, 해가 기울면 출발하자고. 살아온 이야기나 하면서.”


온설지가 그릇에 보리죽을 따르며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가 사뭇 다정한 사이가 될 때도 되었잖아?”


즐거운 마음으로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이들과 달리 도조는 구석에 처박혀 고개도 들지 않았다.

보석을 천계로 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도 시장에 팔기 전에 빨리.


*


밤하늘에 흰 구름이 가득 차 달과 삭의 빛이 희미하게 내려앉았다. 설령 빛이 없어도, 아무리 깊은 밤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사다녜들은 바위산 돌안의 북쪽 마른 연못을 파기 시작했다. 아랑누의 키만큼 파라고 했다.


흙에서 태어난 사다녜들이 자갈과 모래를 옮기려 했지만, 땅속에 단단한 바위가 버티고 있는 데다 그만한 깊이까지는 다룰 수 없었다.


모든 사다녜들이 땅을 팔 수 있는 도구를 하나씩 찾아들었다. 이루다도 달려들어 모래와 자갈을 퍼냈다.


아야론이 이루다를 불렀다.

“아랑누님에게 가봐라. 우리를 위해 다시 오셨는데 뭐라도 대접해야지.”

사막의 경계에서 따 모은 말린 과일 다섯 개가 전부였지만 여기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루다는 귀한 과일을 들고 자신의 동굴로 향했다.


바위산 돌안 앞에서 아랑누와 이연은 짐을 다시 꾸렸다.

호설은 그들 곁에 엎드려 사다녜들을 지켜보았다. 거리가 멀어 작은 인형처럼 보였다.


이루다가 나귀 옆으로 다가오자 자루에서 보석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아랑누와 이연의 시선이 굴러가는 보석을 따라갔다.

그것은 이루다 앞에서 멈추었다.


“이거 활 아니야?”

이루다가 손을 대자 보석은 활이 되었다.

아랑누의 영안으로도 돌멩이가 활로 바뀌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이연도 놀라운 광경에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


“사람들이 쓰는 거 봤어. 이게 왜 여기 있어? 어? 이건 줄이 없네?”

이루다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으나 줄도 없고, 주위에 화살도 보이지 않았다.


나귀 보리의 등에서 늘어져 있던 도조가 머리를 사람으로 바꾸며 툴툴거렸다.

“쳇, 인간세에 내려오더니 얘도 헷갈리나 보네.”

날개를 휘휘 내저었다.


“네가 그거 주인이야. 하늘의 성물은 자기가 주인을 찾고, 주인에게 맞는 무기가 되거든. 흥. 인간세에서 주인을 찾다니. 뭔 망신이야!”

“이게 내 거라고?”

“몰라! 네 거니까 네 마음대로 해.”

도조는 다시 까마귀머리로 바꾸더니 훌쩍 날아가 버렸다.


이루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에게 활을 건네자 이연의 눈빛이 짙어졌다.

“이건 정말 네 거야. 하늘의 성물이 주인을 선택한 거야.”


이연이 천천히 활을 쓰다듬었다.

“이건 무시궁이란다. 주인의 생각에 따라 시위가 당겨져. 네가 당길 수 있을 만큼, 네 힘이 받쳐주는 만큼.”

“와, 신기하다. 그런데 화살은?”


“네 힘과 생각으로 화살을 만들어. 열심히 수련하면 빛의 화살이 보여. 마음을 기울이면 이 활이 널 도와줄 거야.”

“나 열심히 연습할게. 요귀가 다시 나타나면 사다녜들을 지킬 거야.”

“그래. 아주 귀한 거니까 소중하게 다뤄야 해.”

이루다는 무시궁을 받아 끌어안았다.


눈빛이 돌아온 이연은 싱글거리며 자루가 풀리지 않도록 감싸 맸다. 소년 이연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이런 거 어떻게 알았대? 나 완전 천재야?’


잠시 생각하던 이연은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아, 그때 그 넋이구나. 나를 살려준···. 그 넋이 몸을 같이 쓰면 안 죽을 거라고 했는데. 그럼 앞으로도 계속 살 수 있는 거잖아? 이히.’


이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잠시 후에는 박자에 맞춰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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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아랑누_금협 시장 22.06.14 46 1 13쪽
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59 아랑누_뱃삯 22.06.12 45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3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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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 아랑누_무시궁 22.06.04 47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3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6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7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4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8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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