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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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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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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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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사로잔_장사꾼 무휼

DUMMY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사로잔은 눈을 찡그리며 돌아누웠다. 방안에는 약초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있었다. 약초는 간 곳 없고 향기만 남았어도 기분이 좋았다.


“우웅, 벌써 아침인가. 어제 늦게까지 연습했더니 눈이 안 떠져.”

눈앞에서 악보가 오락가락거렸다. 베개를 끌어안다가 인기척에 실눈을 떴다.

“뭐해?”

목이 잠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루영이 문가에 앉아 무언가를 챙겼다. 손에 든 것은 침술 도구였다.


사로잔은 벌떡 일어났다.

“그 집에 가려는 구나!”

“소리로는 모르겠고, 맥을 짚어봐야 알겠어.”


“쯧쯧, 환자를 보았으니 그냥 넘어갈 리 없지.”

“고칠 수 있으면 도와줘야지.”

다루영이 일어서자 사로잔도 서둘러 따라나섰다. 목적지는 알고 있었다. 어젯밤 낯선 그림자가 들어간 집.


절룩이던 그림자의 집은 크기도 작고 살림도 단출해 보였다.

처마에 매달린 등불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부드럽고 선한 인상이었다. 어딘지 시향여와 비슷해 남매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것도 잠시 방에서 신음이 들리자 그는 부리나케 들어갔다.


*


이른 아침인데도 남자는 마당에 나와 검술을 연습했다. 울타리도, 대문도 허리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마당이 좁아 쓸 수 있는 검법도 한정적이었다.


언뜻 보니 월영국 군대에서 가르치는 검법이었다. 사로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는 올뫼국인데 월영국 검법을 쓰다니?’


남자의 검법에 흥미가 생겨 잠자코 지켜보았다. 다루영도 나란히 서서 지켜보긴 했으나, 그녀의 관심은 검술이 아니라 절룩거리는 다리였다.


갑자기 사로잔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남자가 익숙한 검법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장공거의 검법이었다.

앞뒤 생각할 여유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장공거에서 수련하셨소?”


남자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땀이 흘러들었는지 눈을 찡그렸다.

“누구시오?”

“아, 이런. 실례. 장공거의 검법을 보니 너무 반가워서.”


그는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장공거에서 몇 개월 수련한 것은 맞소만.”


“여기서 타내 대모의 제자를 만나다니. 이런 우연이!”

사로잔은 기쁨에 가득 차 펄쩍 뛰어올랐다. 긴 여행에 지쳐 어머니가 그립던 참이었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남자가 다가왔다.

“당신도?”

사로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보여드리죠.”


사로잔은 마당에 세워진 막대기를 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외마디 기합과 함께 막대기 끝에 매서운 기운이 서렸다.

그것은 더 이상 울타리를 만들고 남은 막대기가 아니었다.


한 자루 검이 되어 허공을 찌르고 바람 소리와 함께 공간을 갈랐다. 좁은 공간에서도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도록 타내가 고안한 검법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륙을 건너 이 먼 곳에서 어머니의 자취를 찾다니.


“정말이군요. 품새가 타내 대모님과 똑같습니다!”

남자가 경탄하며 장공거의 방식으로 두 손을 모았다.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사로잔도 같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저는 무휼이라고 합니다.”

“사로잔입니다. 대륙을 떠돌며 여행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는 월영국의 검법도 수련하시던데···.”

“예. 월영국에서 수비대원으로 일했습니다. 다리를 다쳐 지금은 장사로 먹고삽니다.”


“그렇군요. 이쪽은 다루영으로, 녹디사원에서 의술을 공부한 수련자입니다.”

사로잔이 느긋하게 다루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덕행을 쌓기 위해 사람을 돕고 있지요. 다리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 봐 드릴까요?”


무휼에게는 자신의 다리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유명한 녹디사원이라니. 약과 침으로 유명한 사원이 아닌가. 이 기회를 흘려보낼 수 없었다.

“저희 아버지가 오랫동안 앓고 계십니다. 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의술은 환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기꺼이 봐 드리지요.”

다루영은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병인지 몰라도 아픈 사람이 있으면 물불을 안 가렸다.


전사와 같은 자세로 용감하게 맥을 보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눈동자에 슬픔과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사로잔은 눈치챘지만 무휼은 보지 못했다.


“어떤가요? 나을 수 있을까요?”

다루영이 대답하지 않자 가망이 없다는 말로 짐작한 무휼이 한숨을 쉬며 두 손을 모았다.


무휼의 아버지 허신은 잠에서 깨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 앉아있는 다루영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손을 뺐다.


“아버지, 이분은 녹디사원의 의원이랍니다. 우리를 도와주신대요.”

무휼이 급히 설명했지만, 허신은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를 바라보던 다루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꽤 오래되었네요. 속이 많이 곪았어요. 처방전을 드릴 테니 약을 구해주세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무휼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물쭈물 망설였다.

“여기선 약을 구할 곳이 없어요.”


다루영이 암담한 표정으로 사로잔을 바라보았다. 사로잔은 이마를 긁적였다.

‘나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석음초가 좋다고 해서 산에 갔지만 못 구했어요. 괴물들 때문에 다닐 수도 없어요.”

사로잔은 괴물이란 단어가 나오자 귀가 번쩍 뜨였다.

‘무휼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있겠구나. 분명 괴물을 봤을 거야.’


같은 자리에 앉아있어도 다루영은 약초에만 생각이 머물렀다.

“누가 그러던가요?”

“지나가는 말을 언뜻 들었어요.”

“이 병에 석음초는 효과가 없어요. 차라리 솜양지가 나아요.”

“솜양지요?”


“석음초처럼 바위에 붙어살지만, 햇빛을 잘 받고 나무가 잘 자라는 땅에서 자라지요.”

“혹시 뿌리 쪽은 푸르스름하고 끝으로 갈수록 새하얀 그 풀 말인가요?”

“맞아요.”

“그거라면 홍석산 기슭에 많아요. 국경 근처라서 자주 봤어요. 솜 뭐라고 하는 걸 들었는데 그거였군요.”

희망이 생기자 생기가 돌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태세였다.


다루영이 침술 도구를 펼쳤다.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으니 다른 약초도 있어야 해요.”

“그, 그런가요.”

무휼이 시무룩해져서 침술 도구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허신을 똑바로 뉘였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벽만 바라보았다.


다루영이 침을 놓고 혈을 푸는 사이 사로잔은 무휼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우린 괴물을 처리하러 왔어요. 사형도 함께 가시죠.”

사로잔의 말에 무휼은 손을 저었다.


“여태까지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어요. 현상금 사냥꾼들이 가득 찼지만 당해내지 못할 거예요. 그들은 그냥 괴물이 아니거든요.”

“그냥이 아니면?”

“저도 멀리서 본 것이 전부지만,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것 같아요. 아주 체계적으로 움직이거든요. 군대처럼. 지금은 그때보다 숫자가 더 늘었어요.”


무휼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더군요.”


사로잔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술을 다시 짜야겠어. 이건 생각 못 한 전개인데.’


“최근에는 본 적 있나요?”

“며칠 전에는 소리만 들었어요. 계곡이 무너질 것 같은 포효인데, 한 마리가 소리치기 시작하면 하나둘 따라 하다가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소리쳤어요. 소리만 듣고도 기절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지요.”


사로잔이 괴물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는 사이 다루영이 천천히 방에서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먹장구름처럼 어두웠다.


골목을 하나 빠져나왔을 때 다루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사로잔도 멈추고 돌아섰다.

“무슨 일 있어?”

“독지린이 박혀있었어.”

“독지린이면 용 비늘이잖아? 그게 가능해?”


“용으로 변했을 때 죽게 되면 비늘이 일어나. 상대의 몸에 박혀서 장기까지 파고들지.”

“그럼 무휼의 아버지가 용족을 죽였다고?”

“죽였거나···, 그 자리에 있었거나.”

“설마···.”

다루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다루, 혹시 시향여의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들었어?”

“어머니는 홍석산 기슭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했어. 아버지는 의원이었는데, 이 년 전인가 시위대와 함께 괴물을 무찌르러 갔다가 시신도 못 찾았대.”


“그럼, 치료 안 하려고?”

“아니. 수련자로서 할 일은 해야지. 하지만 용서가 안 돼. 정말 독지린을 얻으려고 그랬을까?”

사로잔과 다루영은 말없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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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59 아랑누_뱃삯 22.06.12 45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4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8 1 9쪽
51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22.06.08 44 1 13쪽
50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22.06.07 47 1 11쪽
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7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3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7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7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5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8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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