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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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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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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7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6.03 07:00
조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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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아랑누_사막의 혼

DUMMY

아랑누가 깨어난 곳은 고요하고 어두운 바위벽 사이였다.

‘여기가 어디지?’

엎드린 채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서늘한 공기만 느껴질 뿐 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을 더듬다가 벽을 찾았다.

벽을 딛고 일어섰다.

차가운 바위를 더듬어 나가니 벽은 왼쪽으로 꺾였다. 조금 더 가니 다시 왼쪽으로 꺾였다.


그렇게 길을 찾다 보니 영안이 서서히 열리며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미로?’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수천 년에 걸쳐 저절로 만들어진 미로였다.

‘사람이 만들었다면 출구가 있겠지만···. 출구가 없을 수도 있겠어.’


아랑누는 가만히 서서 주위의 공기와 바위가 내뿜는 기운에 집중했다. 마음이 가라앉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벽에 손을 대니 은근한 떨림이 전해졌다.


벽의 떨림을 따라 나온 곳은 원형의 방이었다.

돌과 흙의 냄새,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뺨을 타고 지나갔다. 아련한 향기가 실려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영혼의 소리가 들렸다.

“미사랑님, 드디어 오셨군요.”


“전 아랑누입니다. 과희국 모여사원의 괴령송환사이지요.”

영혼의 소리가 뚝 끊어졌다. 원형의 공간이 꽉 막힌 침묵에 잠겼다.


고요한 공간에 영안을 집중했다.

바위가 깎여 벽이 되었고, 사막의 자갈이 모여 바닥을 이루었다. 바닥에 수많은 돌멩이가 펼쳐있었지만, 유난히 기운이 다른 돌멩이도 함께 흩뿌려졌다.

신비하고 독특한 빛과 모양은 너른벌에서 나는 돌이 아니었다.


한가운데 떠 있는 혼도 길을 잃은 망령이 아니라 수호령으로 선택받은 혼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뭘 지키고 계십니까?”

“사막의 혼 듬삭입니다. 당신은 미사랑님의 혼 조각이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잊지 않고 찾아주셨으니 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군요.”


듬삭, 정확히 말하면 듬삭의 혼은 감동에 젖어 울먹이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연인을 만난 듯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그 덕에 원형의 공간은 아늑하고 따사로워졌다.


“언제인가 미사랑님의 혼 조각이 떨어졌지요. 그걸 지키고 있었는데, 완전히 조각난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인간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엄청나고 무서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암흑성의 혼이 부서질 리 없다. 산산조각나는 고통을 상상하며 듬삭은 진저리쳤다.


‘미사랑?’

아랑누는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었더라?

‘아, 운비암에서! 그런데, 왜 내게 미사랑이라고 하지?’


아랑누는 떠다니는 소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듬삭이 가까이 와 손을 잡았다. 다정한 마음이 느껴졌다.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기다렸습니다. 기억을··· 잃으셨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미사랑은 누구인지···, 약속이라니요?”


듬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게 주어진 사명에 이것도 포함되겠군요.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드리는 일.”


듬삭은 그녀의 손을 이끌어 가장자리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앉게 했다. 아랑누는 바위벽에 기대어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미사랑님의 혼 조각이 당신에게 있네요. 제게 온 건 더 작은 조각입니다.”

“암흑성의 혼 조각이라고요? 내가?”

“왜, 어떻게 너른벌로 오셨는지 모르나, 암흑성 미사랑님은 아름답고 다정한 분이셨죠.”

미사랑을 생각하는지 공기도 부드러워졌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려 깊은 분이니 이유 없이 혼을 조각내고,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닐 거예요. 암흑성은 천계의 신성이잖아요? 지금도 밤과 어둠이 때를 맞추는데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겠어요? 암흑성이 없다면 사람이 제때 죽지도 태어나지도 못하겠지요. 그러니 당신이 기다리는 암흑성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듬삭을 위로하려 애썼다. 길 잃은 영혼을 대하듯 정성스러운 말투였다.


듬삭은 그 마음을 느끼고 아랑누 옆에 가만히 머물렀다.

“오래전 미사랑님께 도움을 받았지요. 내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무언가 생각날 겁니다.”


듬삭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섯 살 때 사원에 봉헌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먹고 살길을 찾으라는 이웃의 뜻이었지요.

그때는 사막이 지금처럼 넓지 않았고, 보랏빛도 아니었어요. 큰 강이 흐르고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강물은 맛이 좋고 약효가 좋아 사람들은 매일 물을 퍼갔죠. 사원도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규모도 커졌죠.

사람들은 흐르는 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구멍을 뚫었어요. 더 많은 물을 퍼내기 위해 나무를 자르고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듬삭이 이야기하는 동안 아랑누는 발끝에서부터 온기를 느꼈다.

온기는 서두르지 않고 다리에서 배로, 가슴으로 어깨를 거쳐 머리까지 채워졌다.


누군가 다정하게 끌어안는 느낌이었다. 노곤하고 아득해졌다. 알 수 없는 힘이 몸속으로 스며들어 자신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듬삭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사다녜들이 차별과 핍박을 피해 바위산 돌안에 모이면서 마찰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불길한 존재로 여겨 몰살시키려 했죠. 그들은 사원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모략이었죠.


제사장 자리를 노리는 수석 수사가 마딘의 군대와 손잡고 제사장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나도 두 눈이 멀고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때가 열여덟 살이었죠.


사다녜들 대부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태어난 원소의 정기를 소화하지 못할 때나 죽으니까요. 내가 사랑한 이들은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앞이 안 보이고 다리도 못 쓰게 되었으니 막막했습니다. 언제까지 돌안에 숨을 수도 없으니까요. 두렵고 서러워 몇 날 며칠을 울었지요.


그때 미사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한쪽 눈은 살릴 수 있다며 약을 주셨어요. 다리의 상처도 번지지 않게 막아주었습니다. 그분을 보지는 못했지만, 선량하고 위대한 힘을 느꼈습니다.


뭘 원하냐고 물으셨죠. 나는 사막의 혼 사원이 생명을 지키는 곳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영원히 계속되기를요.


그건 어렵다고 하셨어요. 사람들의 욕심으로 사막이 계속 넓어질 거라고, 빨리 피하라고 하셨죠. 나는 끝까지 사원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언제까지 지킬 것이냐 물으시기에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미사랑님은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고 말씀하셨죠.


강물이 마르고 사막이 넓어지니 수련생도, 마을 사람들도 떠났습니다. 사원은 오래전에 폐허가 되었습니다.

나는 죽어서도 이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미사랑님이 다시 오시리라 굳게 믿었으니까요.


그리고 이천 년 전, 혼 조각이 떨어졌습니다. 하늘의 성물과 함께요. 그것을 지키며 기다렸습니다.”


아랑누의 표정이 굳어졌다.

발끝부터 스며든 낯선 기운이 머릿속까지 꽉 채우자 눈앞에 언덕 위 마을이 또렷하게 보였다. 멀리 불타는 산이 붉은 용암과 시커먼 재를 내뿜었다.


한 가족이 서낭당 나무 앞에 쓰러져있었다.

갓난아기는 부모가 죽은 줄도 모르고 울며 젖을 달라고 보챘다. 서낭당 아래 깊숙이 들어가 있던 미사랑의 혼 조각이 울음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미사랑의 혼이 아기를 어루만졌다. 울음소리가 칭얼대듯 작아졌다.

‘앞을 못 보는구나. 이렇게 허약해서는 못 버티겠어. 가련한 것.’

숨이 멎어가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언덕 아래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화산 때문에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메고 올라온 사람들은 젊은 부부의 시신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도적놈들한테 당했나 보구먼.’

‘우리가 묻어주고 가세. 그 정도 시간은 되지 않나.’

‘그러자고. 같이 하면 금방 끝날 걸세.’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들을 따라온 노인이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기의 숨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이그, 불쌍한 것. 어미 아비가 죽은 줄도 모르고.’


미사랑의 혼은 갓난아기와 할머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쩌면···.’

아기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망설이던 혼 조각이 아기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몸에 깃드는 순간 이전의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


아랑누는 헉 숨을 내뱉었다.

‘할머니···. 저런 얼굴, 저런 모습이었군요. 지금에서야 할머니 얼굴을 보네요.’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눈가리개가 젖어 들었다.


“난···, 나는 부모님을 찾으려 했는데···, 찾을 필요가 없는 거였군요.”

듬삭은 위로하듯 조용히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그런데, 왜 저한테 금화를 주셨을까요? 부모님을 찾으라고 하셨는데.”

“희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미사랑님도 제가 혼자 남을 것을 걱정하셨지요. 사막이 저를 위로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모래와 자갈이 조금씩 보랏빛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빛이 힘이 됐습니다. 사막 전체가 저와 함께 기다리는 거니까요.”


아랑누가 눈물을 닦았다.

“고맙습니다. 약속을 지켜주셔서···.”

“제가 감사해야죠. 잊지 않고 찾아오셨으니까요. 전 할 일을 다했습니다.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듬삭의 소리에서 아쉬움과 홀가분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사다녜들에게 바위산 북쪽 마른 연못을 당신의 키만큼 파보라고 하십시오. 물이 나올 겁니다.”

아랑누는 손을 뻗어 듬삭의 혼을 어루만졌다. 그의 삶이 가련하고 애틋하여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주문을 외웠다.


“찾아야 할 것을 찾았고,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었으니. 나의 빛과 함께 그대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아랑누의 손끝에서 나온 빛이 듬삭을 감쌌다.


“고맙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당신의 인도로 돌아가게 되어서.”

빛줄기를 따라 듬삭이 사라졌다.


아랑누는 그를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영천옥에서도 평안하기를.’


듬삭이 사라지자 바닥에서 자락거리던 돌멩이들이 빛을 내며 하나둘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러 가지 빛으로 영롱하게 반짝이며 아랑누 주위를 맴돌았다. 까르륵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랑누는 자신의 몸이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힘이 가득 찼다.

더 밝아진 감각, 예민해진 영안, 끓어오르는 생명력, 가득 찬 정기. 가볍고 단단한 갑옷을 입은 것처럼 몸에 힘이 넘치고 가뿐했다.


두 손을 들어 앞뒤로 살펴보았다. 손가락 끝까지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것이 새로운 나인가?’


새로운 내가 암흑성의 기운을 받는 거라면 그 일을 해야지. 분명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일일 거야.

사막의 혼 듬삭처럼. 슬픈 영혼을 위로하고 보내주는 일이라면 어디든 갈 것이다.


그녀의 결심을 응원하듯 손목의 신령석에도 빛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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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59 아랑누_뱃삯 22.06.12 44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3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7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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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3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6 1 10쪽
»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2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6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6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4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6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0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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