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163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6.01 07:00
조회
46
추천
1
글자
11쪽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DUMMY

사막이 넓어진 탓에 지금은 마딘이 사막의 경계지만, 보라사막으로 들어가 보니 물이 흐르던 흔적이 있고, 말라 죽은 잡목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이곳도 한때는 번성한 성읍이었으리라.


사막을 건널 때는 새벽과 저녁에 걷고 한낮에는 그늘을 찾아 쉬어야 했다. 여덟 개의 계절 중 두 번째인 초여름이었다. 두여름보다는 기온이 낮다 해도 한낮과 사막은 상극이었다.


아랑누는 바위 그늘에 앉아 강건환으로 시장기를 달랬다. 바위가 크고 높아 일행이 모두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지팡이에 앉은 도조가 빈약한 식량에 투덜거렸다.

“그러게, 사막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 아이는 왜 그냥 갔대요? 어차피 사막으로 갈 거면 안내나 해주지.”

“사막은 어디라도 먹을 게 부족해.”

온설지가 말린 고기와 주먹밥을 우물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줄 알아. 나리울이 챙겨주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굶었어.”

“빛결의 장례는 잘 치렀겠죠?”

이연이 빛결 생각에 목이 메어 물을 한 방울 삼켰다.


“혼은 이미 갈 곳을 찾아갔으니 쓰고 남긴 몸은 불과 바람에 맡겨야지.”

빛결이 영천옥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며 양손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여린 빛과 바람이 일어났다.


온설지가 남은 음식을 가방에 넣으며 흘끗거렸다.

“뭐해? 새로운 귀령송환법이야?”

“자연의 원소를 아우르는 방법이야. 스승님이 궤짝에 책을 넣어두셨더라고.”

“그 말은 그러니까···, 원로님은 네가 안 돌아갈 것을 아셨다는 거야?”

“그렇지. 찾기 전에는 오지 말라는 말씀이지.”


아랑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쪽을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나마 배운 기억이 있어 쉽게 읽어나갔다.


“수련을 멈추지 말라는 뜻이야. 긴 여행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지루하잖아.”

“여하간···. 넌 멍때리는 연습이 더 시급하다고 본다.”

“그건 온형이 잘하니까 구태여 나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아랑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님, 해가 기울어가요. 슬슬 출발할까요?”

갈무리한 가방을 보리의 등에 실었다.


온설지는 밤에 다니는 것이 마뜩잖았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꼭 저녁에 움직여야 해? 사막은 나하고 안 맞네.”

“그러게. 사막이 온형에게 맞출 수도 없고. 그냥 받아들여.”


아랑누는 지팡이를 잡고 이연을 따라 걸었다.

도조의 자리는 나귀 보리의 등이었다. 늘 그렇듯 몇 걸음 가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래도 용케 떨어지지 않았다.


*


보랏빛 모래 위에 줄지어 선 돌기둥과 만났다. 사막의 혼 사원으로 안내하는 길이었다.


기둥마다 조각이 새겨있고 ‘사막의 혼이여, 영원하라’, ‘사막의 혼이여, 우리를 지키소서’라는 문구가 새겨있었다.


부러진 기둥이 더 많았지만, 군데군데 원래 모습을 간직한 기둥도 눈에 띄었다. 남쪽으로는 멀리 바위산 돌안이 어렴풋이 보였다.


노을마저 지워져 가니 온설지는 어느새 사라진 다음이었다.

푹 자고 일어난 도조는 몸이 가뿐하니 기분이 좋았다.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아랑누의 지팡이 위로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어? 눈사람은?”

“볼일이 있나 봐.”

아랑누가 기둥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허허벌판에 무슨 볼일?”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다쳐.”

“헤헤, 저 이래 봬도 신조라고요.”


도조는 아랑누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멀리 지평선에서 가까운 바위산 돌안까지 둘러보았다.


‘눈사람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찾아내겠어! 이 도조님께 걸리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해주지!’

도조는 돌기둥을 건너뛰며 넓은 사막을 누볐다.


바위산 돌안까지 이어진 돌기둥 사이에서 온설지를 발견했다.

‘눈사람, 여기 있었군!’

도조는 빠르게 그의 곁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온설지의 몸에서 어슴푸레 빛이 났다. 도조는 날개를 파닥이며 공중에 머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윽고 온설지가 호랑이로 변하자 도조는 넋이 나가 더 버티지 못하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안 돼! 안 돼! 날 잡아먹으면 안 돼! 난 신조란 말이야!”


있는 힘껏 날개를 펼쳐 모래 위에서 발버둥 쳤다.

‘여기서 잡아먹힐 수 없어. 내가 어떻게 여태까지 버텼는데!’


미친 듯 날개를 퍼덕이는 도조를 보고, 호설은 콧김을 내뿜었다.

호설은 돌안이 있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뻗어 나오니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도조가 한쪽 눈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나긴 했지만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눈사람이 눈호랑이였다니! 어우, 난 왜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이래?’


날개를 휘저으며 모래를 털어내는 데 엄청난 포효소리가 들렸다. 그저 신호가 아니었다. 살이 찢기는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였다.


눈호랑이를 생각하니 몸이 후들거리고 눈이 뱅글뱅글 돌았지만, 큰일이 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도조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비틀비틀 날아갔다.


호설은 그물에 묶여 돌기둥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보통 그물이면 간단히 찢었겠지만, 주술이 걸린 그물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화살촉이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도조가 이리저리 날갯짓하며 매듭을 쪼려 했지만, 스치기만 해도 찌릿거렸다.

“잠깐만 기다려! 아니, 주세요. 얼른 아랑누를 데려올게요.”


아랑누를 찾아 곧장 날아갔다. 등 뒤에서는 호설의 신음과 포효가 한꺼번에 울렸다.


아랑누와 이연에게도 호설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여기서도 호랑이 소리가 나네? 사막에도 호랑이가 사나요?”

“우리처럼 여행하는 호랑이겠지.”

“누님도 참, 호랑이가 무슨 여행을 해요. 까망이 잡아먹히지는 않겠죠?”


이연이 도조를 걱정하는 사이, 까마귀 도조가 헉헉거리며 두 사람 앞에 내려앉았다.


“큰일 났어요, 큰일!”

도조는 종종거리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눈사람이 호랑이가 되었어요. 에? 호랑이가 눈사람이었나?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지금 그물에 걸렸다고요!”


아랑누는 곧바로 나귀에 올라탔다.

“가자. 호설을 구해야지. 연아, 너는 천천히 따라와.”

“그물이 엄청 아파요. 건드릴 때마다 가시로 찌르는 것 같아요.”

도조가 앞장섰다. 나귀 보리는 아랑누를 태우고 도조를 바짝 쫓았다.


뒤에 남은 이연은 황망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호설요? 호설이 누군데요?”


*


그물에는 주술이 담겨있었다. 만지지 않아도 어떤 주술인지 알 수 있었다.

요귀를 물리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주술을 없앨 힘은 필요했기에 세운랑 원로가 귀령송환만큼 중요하게 여긴 주술이었다. 그것을 정말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호설,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더 파고들어!”

아랑누가 소리치자 호설이 몸부림을 멈추었다.


지팡이와 팔을 크게 움직여 요귀의 주술을 푸는 술법을 펼쳤다. 손가락에서 붉은빛이 일어나 허공에 글자를 썼다.

물결처럼 유연한 손짓을 따라 허공의 그림과 글자는 그물 주변을 덮을 만큼 크고 밝아졌다.


“사라져!”

아랑누가 기합을 넣자 빛나는 그림과 글자는 물에 녹듯 그물의 마디마디로 스며들었다.


살을 에는 통증이 사라지자 호설은 발톱을 세워 그물을 내리쳤다. 그물이 힘없이 투두둑 끊어졌다.


호설은 몸을 가볍게 돌리며 땅에 내려섰다.

“고맙다. 네가 목숨을 구해주었구나.”

“다친 데는 없어?”


아랑누가 호설의 등과 다리를 영안으로 훑으며 상처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여러 군데 베이긴 했어도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호설은 몸을 웅크리고 혀로 상처를 정성스레 핥았다.


“누가 이런 걸 설치했지?”

돌기둥을 살펴보았지만 다른 표식은 없었다.

비슷한 그물이 두 군데 더 설치된 것 외에는 알아내지 못했다. 아랑누는 다른 그물에 걸린 주술까지 풀었다.


단서를 찾아 기둥 사이를 둘러보는데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기둥 꼭대기에서 지켜보던 도조가 소리쳤다.

“여기에요, 여기!”


도조는 무너진 기둥 주변으로 내려앉으며 퍼득거렸다. 기둥 뒤에서 이루다가 쭈뼛거리며 걸어 나왔다.


“이루다? 왜 여기 있어? 맞다, 여기가 집이지?”

아랑누가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도조가 이루다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요마족이다, 요마족!”

이루다가 뛰어올라 도조를 잡아채려 했다.

“난 요마족이 아니야. 아신족이야. 사다녜라고!”


그물에 베인 통증이 가라앉았는지 호설이 제법 느긋하게 상처를 핥으며 물었다.

“사다녜라니. 저 아이 이름인가?”

“요마족은 사람이 지은 이름이야. 이들은 자신을 아신족, 또는 사다녜라고 불러. 너나족이 자신을 사람이라 부르듯이. 신을 닮은 종족이라는 뜻이지.”


“흥. 날 호랑이라 부르는 존재도 사람뿐이지. 나는 나를 가리키지 않는데도 말이다.”

호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일어나 이루다를 마주 보고 섰다. 이루다는 거대한 호랑이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아랑누가 도조를 불렀다.

“도조, 보리를 데리고 가서 이연을 데려와.”

“지금 나더러 빠지라는 말인가요? 설마?”

“걱정되서 그래. 사막에서 쓰러졌을지도 몰라.”

“그런 일이라면 제가 슝 다녀오겠습니다.”

도조는 보리의 고삐를 입으로 물고 날갯짓했다. 보리도 알아듣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아랑누가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이루다 앞에 앉았다.

“왜 우리를 지켜보았지?”

아랑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루다는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바라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소원이 있어. 저기 걸린 주문을 풀 힘이 있으니 내 소원도 들어줘.”

“소원이 뭐야?”

“진짜 이룽이 되고 싶어.”


“이룽이 되어서 뭘 하려고?”

“빛결이 살지 못한 시간을 대신 살고 싶어. 빛결이 보고 싶다고 한 불꽃놀이도 보고 싶어. 시장에도 가고 싶고, 꽃도 키우고 싶어. 꽃불을 강에 띄우면 하늘에서 빛결이 볼 거 아냐.”

이루다는 빛결이 만들어 준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손등 위로 눈물이 똑똑 굴러떨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숨은 사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4 아랑누_금협 시장 22.06.14 46 1 13쪽
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59 아랑누_뱃삯 22.06.12 45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3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7 1 9쪽
51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22.06.08 44 1 13쪽
50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22.06.07 46 1 11쪽
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6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2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6 1 13쪽
»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7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4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6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