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162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6.08 06:00
조회
43
추천
1
글자
13쪽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DUMMY

첫여름의 푸른 기운이 남은 들판은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바위산은 꼭대기만 붉게 빛나 마치 빨간 머리를 가진 거인 같았다. 현월의 홍석산이었다.


사로잔은 말과 나귀에게 샘물을 먹이며 들판과 황무지 넘어 지평선 가까이 솟은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아순치도 같은 산을 바라보았으나 사로잔이 산과 들의 지형을 살피며 지름길을 계산하는 반면, 그는 장사꾼답게 현월에서 나오는 특산품을 떠올렸다.


“현월은 울창한 숲과 평야도 있지만,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요새야. 바위 조각과 돌 세공으로 유명했지.”

“그 과거형은 무슨 의미야?”

해무찬이 물었다.


“지금은 상품이 나오지 않아. 왜 그런가 했더니 괴물 때문이었군.”

아순치가 샘물가의 풀잎을 살랑살랑 흔들며 동쪽의 산맥을 가리켰다.


“저 산을 몇 개 넘으면 사막이 펼쳐진다는 게 믿어져?”

“사막? 모래로 되어 있는 땅 말이야?”

해무찬이 신기해하며 눈을 빛냈다. 그는 모래로만 이루어진 사막은 걸어본 적이 없었다.


“보라색 자갈로 이루어진 사막이야. 그래서 보라사막이지.”

“아름답겠군.”

사로잔이 보라색 자갈밭을 상상하며 아득한 눈길로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보라색이 그렇게 여러 종류라는 걸 처음 알았어. 햇빛을 받으면 보석이 가득한 땅으로 보이지. 하지만 이틀만 지나면 아름답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광활하고 황량하거든.”

“설마 보라사막으로 갈 거야?”

다루영이 물주머니에 물을 다 채우고 사로잔에게 물었다.


“아니.”

“아니.”

사로잔과 아순치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며 동시에 물었다.

“왜?”


“먼저 말해.”

아순치가 손을 들었다.


“거긴 관객이 없잖아. 연주를 듣고 돈을 낼 사람이 있어야지.”

“맞았어. 바로 그거야. 장사꾼의 기본이지.”

아순치가 환하게 웃으며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다.


해무찬이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헛웃음을 지었다.

“사로, 너무 많이 변했다. 소명장군 사로잔은 어디 간 거야? 물을 구할 수 없다거나 나귀가 견디기 어렵다거나 이유는 많잖아?”


“무슨. 여기서는 생존이 가장 큰 화두야. 너도 회계 맡아봐. 생각이 바뀔걸?”

“그래, 그래. 내가 너하고 말싸움해서 이길 수가 없지.”

해무찬이 고개를 내둘렀다.


“서둘러야겠다. 이러다간 오늘 야영할 장소도 못 찾겠어.”

아순치의 독촉에 이끌려 그들은 북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현월은 사람이 사는 성읍 같지 않았다. 성문에서 저잣거리를 따라 걷는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간혹 다니는 사람이 있어도 그들이 다가가기도 전에 도망치듯 멀어졌다.


시끌벅적한 곳은 여관뿐이었는데, 여관이라 이름 붙은 곳은 어디든 현상금 사냥꾼들이 북적거렸다.

“어째, 분위기가 수상하다?”

해무찬이 혀를 끌끌 찼다.

“시위대 병사들이 자주 보인다는 건 그만큼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거든.”

현월에서의 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할 수 없지. 어쨌든 나침반은 멈추었으니 여관부터 알아보자.”

숙소를 알아보는 일은 아순치와 해무찬이 맡고, 사로잔과 다루영은 약초원을 찾았다. 다루영이 만든 비상약을 보관하려면 건습제가 필요했다.


약초원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행인들은 나그네가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현월의 시위대를 기다려 겨우 물어보았다.


저잣거리의 약방들이 모두 문을 닫았으나, 한 군데 빼꼼히 문을 열어둔 약초원을 찾았다. 안쪽으로 주인이 보였다. 나이 많은 주인은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었다.


반갑게 들어간 다루영은 문가에 멈춰 섰다. 선반이고 바구니고 약초가 남아있지 않았다.


주인이 책을 내려놓고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려고 눈을 찌푸렸다.

“뭘 찾으시오? 요즘은 약초를 구할 수가 없는데.”


휭하니 빈 가게를 둘러보던 그녀는 마른 풀이 담긴 바구니에 시선을 두었다.

“이거면 돼요. 다행히 필요한 재료가 남아있네요.”

“그야, 약이 없으니 건습제가 필요할 리 있나. 여기 처음이신가?”

주인은 따뜻한 물을 한 잔씩 따라주었다.


주인은 사람 구경을 못 했다며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았다.

작년부터 갑자기 늘어난 괴물과 현상금 사냥꾼들의 횡포를 설명하며 열을 올렸다. 전 성주가 은퇴하고 새로운 성주는 오지도 않는다는 둥 그동안의 사정을 풀어놓는데, 말하지 못해 안달이 난 듯 침을 튀기며 열심이었다.


현상금을 노리고 온 것은 사로잔도 마찬가지라 주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괴물은 어떻게 생겼답니까?”

“그러니까 거대한 바위 같다 이 말이오. 칼이나 창도 그 검은 털가죽을 뚫을 수가 없다오. 발톱은 어찌나 센지 한 번 훑으면 창자가 다 쏟아진다니까. 현상금 액수가 크면 뭐 하겠소? 내 목숨이 중하지.”


“다친 사람들은 어디서 치료하나요?”

다루영은 부상자를 걱정하며 안타까워했다.

“성주원을 통째로 의원으로 쓰고 있다오. 성주님이 안 계시거든. 아무도 성주로 안 온다니 어쩔 수 있나. 그나마 부성주님이 있어 여태 버텼는데···. 어찌 될지.”

약초원 주인이 마른 입을 적시려 물을 마시는데 한 여인이 들어왔다.


“아저씨, 씨앗 좀 들어왔어요?”

맑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다루영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리카락 빛깔이 노랗고 붉어 특이한 것은 둘째이고 피부며, 눈동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여인도 다루영을 알아보았다.

“용족···?”

다루영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용족의 피가 섞였군요. 어머니 쪽인가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용족의 후손을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다루영이 일어나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 다루영이에요.”

“시향여라고 해요. 현월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다루영은 현상금 때문이라는 말은 못 하고 사로잔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나침반을 따라왔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사로잔이 느긋하게 웃으며 시향여를 올려다보았다.

“빛뜰산으로 가던 길이었소. 그곳에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말이오.”

“그러시군요. 빛뜰산까지 가려면 한참 고생하시겠네요.”


“여기서 필요한 물건을 구할까 했는데···.”

“남아있는 물건이 없을 거예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민가촌 옆 야산으로 오세요.”


시향여는 다루영을 보고 아쉬워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좋아하셨을 텐데···.”

다루영도 아쉬운 마음에 말을 못 꺼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소.”

그녀를 대신해 사로잔이 인사와 함께 일어섰다.

주인의 이야기를 듣느라 늦어졌다. 지금쯤 해무찬이 방을 구했을 것이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 먼저 일어나겠소.”

사로잔은 건습제 재료를 들고나왔다.


시향여는 미련이 남는지 다루영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랐고, 다루영 역시 그녀를 돌아보며 걸음이 느려졌다.


*


마지막 여관에서도 방을 못 구하자 해무찬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햐, 현상금은 이미 우리 손을 벗어난 것 같은데?”

“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아무리 괴물이라도 못 당하겠어.”


쫓기듯 떠밀려 나온 거리에는 쓸쓸한 바람만 휭하니 지나갔다. 여관마다 사람이 들어차 있는 것과는 달리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길 물어볼 사람도 없네.”

해무찬은 거리를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묵을 곳이 있을 텐데. 광검국 부망에서 우연히 찾은 일함루처럼 간판이 없어도 손님을 받는 곳이 있을 것이다.


*


집집마다 불빛이 새어 나왔지만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주민들이 하나둘 떠난다더니 민가촌에도 외곽은 빈집이 많았다.


해무찬이 멀쩡한 상태로 버려진 빈집 앞에서 멈추었다.

“언제까지 돌아다닐 거야? 이거 빈집이니 오늘은 여기서 지내자.”

“먹을 것이 없잖아.”

사로잔이 눈썹에 힘을 주며 꼬르륵거리는 배를 쓰다듬었다. 해무찬의 배에서도 소리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민가촌을 지나 야산을 따라가던 다루영이 손짓했다. 사로잔은 늘어진 다리로 힘겹게 다가갔다.

다루영이 낮은 울타리 앞에서 마당을 가리켰다.

“이 집에 묵을 방이 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저 정도 규모의 텃밭에 푸성귀가 말라가고 있잖아. 별채가 네 채나 있는데도. 돌볼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 그런데 불 켜진 방은 하나뿐이야.”

“그럴듯한데? 좋아. 한번 물어나 보자.”


사로잔이 주인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계십니까?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방을 빌릴 수 있을까요?”


두 차례 더 주인을 찾자 방문이 살짝 열었다.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집주인은 빼꼼히 열린 문으로 사람들의 행색부터 살폈다. 어둠 속에 커다란 붉은 머리 남자가 버티고 서있으니 더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오늘 도착한 나그네인데 방을 못 구해서요. 오늘 밤 신세 질 수 있을까요?”

“방은 있지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였다.


다루영은 민가촌 옆 야산으로 오라던 시향여를 떠올렸다. 울타리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로잔은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괜찮다면 먹을 것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례는 후하게 하겠습니다.”


주인이 대답하지도 않는데 저녁에, 아침까지 달라며 말을 이었다.

“이왕 신세 지는 김에 내일 아침까지 해결하면 좋구요.”


“사로, 아무리 그래도 염치도 말아먹었냐?”

해무찬이 혀를 끌끌 차며 부끄러움을 참아냈다. 아순치는 초승달과 반삭을 올려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혹시 아까 약초원에서 본 분 아닌가요?”

기다리다 못한 다루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제야 문이 활짝 열렸다.


시향여는 어둠 속에서도 두 사람을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다루영님이시죠? 어서 들어오세요.”


*


나그네들은 방 두 개와 툇마루가 있는 별채에 짐을 풀었다.

“요기할만한 것을 찾아오겠습니다.”

시향여가 나가자 다루영도 따라 나갔다. 시향여의 어머니에 대해 듣고 싶었다.


용족이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 어떤지, 다른 용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시향여와 다루영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물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두런거리는 목소리 사이로 간혹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별채의 방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세 사람은 외투를 벗지도 못하고 한 방에 모여 앉았다.

“현상금 사냥꾼이 대략 칠십 명 정도였어.”

해무찬이 몇 군데 여관에서 보았던 사냥꾼들의 풍모와 무기를 떠올렸다.


“그중에 진짜 실력자가 몇이나 되는지가 중요하지.”

아순치 역시 경쟁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기에 그들의 체격과 자세를 기억했다. 핵심이 될 만한 무사는 몇 명 안 되고 대부분 똘마니나 조무래기였다.


“일단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계획을 세우자. 아무래도 괴물의 정체가 수상해.”

사로잔이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너도?”

세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갑자기 괴물이 수백 마리로 늘어났다는 게 말이 돼? 돌연변이라면 한두 마리여야지. 이건 누가 일부러 벌인 일이야.”

“바로 그거야.”

사로잔의 말에 아순치가 손뼉을 쳤다.


*


초승달에 반삭이 어울리니 운치 있는 밤이었다. 별빛도 밝고 아름다워 잠드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사로잔은 별채 툇마루에 앉아 자신의 검과 단검 휼, 수정 막대기를 차례대로 닦았다.

곧이어 다루영도 잠이 안 온다며 툇마루로 나왔다. 기둥에 기대어 별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길은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아도대사님을 생각하나?’

사로잔은 다루영의 시선을 따라 하늘의 별무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검은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사로잔의 손이 멈추었다. 숨을 가다듬으며 곁눈질로 낯선 이의 위치를 살폈다.


검은 형상은 울타리 바깥에 서서 안채를 바라보았다. 사로잔의 굳은 손을 보고 다루영도 시선을 옮겼다.


그는 나무 뒤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절룩이는 서성거림,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현상금 사냥꾼인가. 아니면 강도? 어느 쪽이든 시향여가 혼자인 것을 아는 자야.’


그는 시향여의 방에서 불이 꺼진 뒤에도 잠시 서성이다 돌아섰다. 골목을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왼발과 오른발이 땅에 닿는 소리가 달랐다.

‘발소리를 감추지 않는 건 살수가 아니라는 건데.’


사로잔은 자신의 검을 들고 조용히 일어섰다. 다루영도 표창이 가지런히 정돈된 띠를 허리에 둘렀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들은 그림자를 쫓아 거리로 나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숨은 사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4 아랑누_금협 시장 22.06.14 46 1 13쪽
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59 아랑누_뱃삯 22.06.12 45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3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7 1 9쪽
»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22.06.08 44 1 13쪽
50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22.06.07 46 1 11쪽
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6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2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6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6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4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6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