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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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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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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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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아랑누_바위산 돌안

DUMMY

갑자기 생겨난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름의 두께로 보아 쉽게 그칠 비가 아니었다.

빗줄기가 이내 거칠어졌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영안이 흐려졌다. 빗물이 가진 생명력이 다른 기운을 만들어냈다. 눈앞에 선 이루다의 형체도 구분할 수 없었다.

“어디 비를 피할 곳 없을까?”


이루다는 잠시 망설이다 바위산 돌안을 향해 걸어갔다. 아랑누와 호설도 그 뒤를 따랐다.

비에 흠뻑 젖어 물속을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보랏빛 자갈과 모래가 무겁게 달라붙었다.


어느새 도조와 이연도 다가왔다.


‘어우, 호랑이가 아직도 있다니. 왜 계속 어슬렁거리는 거냐고!’

호설의 뒤를 따르며 도조는 알아듣지 못할 말로 툴툴거렸다. 먹구름 때문에 짙어진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호랑이를 보니 간담이 서늘했다.


이연은 나귀 보리를 끌고 아랑누 옆에 섰다.

“이루다는 어디서 나타났어요? 누님이 아는 호랑이예요?”

“호설이야.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친구··· 랄까?”

“저 호랑이가 친구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하얀 호랑이가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풍겨 나오는 기운이 어딘지 백호족 온설지와 비슷했다.


‘그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았어?’

이연은 이루다의 뒷모습과 호설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


바위틈의 작은 동굴은 입구는 좁아도 안쪽은 호설도 앉을 만큼 넓었다. 이을 폭포 옆에 있던 운비암과 비슷해 아랑누는 들어서자마자 친근감이 들었다.


사막의 동굴답게 건조하고 마른 바위가 벽과 천장을 대신했다. 바닥에는 고운 모래와 마른 풀잎이 깔려 아늑했다.

바위산 돌안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이루다가 조그맣게 모닥불을 피웠다. 연기는 바위 사이 숨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요란한 빗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젖은 옷을 말리는 동안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호설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이룽이 무엇이냐?”

“사람. 사다녜가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야.”

“그렇다면 우리는 세 사람이 아니라 세 이룽이 되겠군.”

호설이 말하자 도조가 깍깍거리며 웃었다.


“우하하, 넌 이룽도 아니잖아! 호랑이 주제에···.”

호설이 코웃음 치고는 갑자기 도조의 부리 앞에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도조는 까무룩 쓰러지고 말았다.


호설은 큼 콧소리를 내더니 입구를 향해 섰다.

“둘러보고 오겠다.”

“아직 비가 많이 오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지.”

호설은 은물결처럼 걸음을 옮기더니 훌쩍 뛰어나갔다.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아늑한 불빛이 공간을 채웠다. 자갈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경쾌하게 울렸다.


이연이 일어나 동굴을 둘러보았다.

“너 혼자 살아?”

“사다녜들은 여기서 같이 살아. 동굴이 많으니까 한 개씩 써도 남아.”


아랑누가 모닥불에 손을 쪼이며 이루다를 보았다.

“누가 그물을 쳤는지 알아?”

“요귀의 짓이라고 했어. 아야론이 그랬어. 우리는 주술을 풀 수 없으니 피해서 다니라고.”

“어떤 요귀인지는 모르겠구나.”

아랑누의 말에 이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빛결 옆에 있었어. 밤에는 마디다 언덕에서 자고, 낮에는 조약돌을 주웠어. 빛결이 만드는 장신구도 함께 만들고.”

“다른 사다녜들은 어디 갔어?”

“몰라. 다들 날 싫어해. 나한테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어. 말도 안 해. 나도 싫어. 내가 사다녜인 것도 싫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이루다가 일어나 아랑누에게 다가왔다.

“부탁이야. 날 이룽으로 만들어줘.”

“난 널 사람으로 바꿀 수도 없지만, 사람이 될 필요도 없어.”

아랑누가 손을 더듬어 이루다의 팔을 찾았다.

“빛결은 사다녜여도 널 좋아했어. 나도 그래.”


이루다가 팔을 휙 빼냈다. 씩씩거리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짓말! 이룽은 다 거짓말쟁이야! 아까 봤어. 주술도 풀었잖아. 그런데 내 소원은 안 들어준다고!”

울분 석인 고함을 지르고는 뛰어나갔다.


아랑누가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연도 난감한 표정으로 쓰러진 도조를 끌어안았다.

도조가 꼬르륵 숨을 내뱉더니 켁켁거리며 간신히 눈을 떴다. 깨어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횡설수설하며 비틀거렸다.


*


햇빛이 밝아지자 사막에 남은 물기도 빠르게 사라졌다. 그늘에 남은 물기 덕분에 보랏빛 자갈이 영롱하게 빛났다.

공기가 맑아지니 영안도 밝아졌다. 바위의 생김이 또렷이 보였다.


밤사이 이루다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랑누는 앉아서 꼬박 밤을 새웠다. 허리와 어깨가 쑤시고 아팠다. 이연과 도조는 구석에서 대자로 뻗어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둘러보니 사막 한가운데 바위산 말고는 이루다가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어딘가 다른 동굴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온형도 저기 어디에서 잠들었겠지.’

비에 젖은 호설을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아직 상처가 남았을 텐데.

온설지는 밤의 일은 모르니 궁금해도 물어볼 수 없었다.


아랑누는 이루다를 찾기 위해 바위산을 돌아보았다.

지팡이로 자갈을 더듬으며 나아가는데 딸깍하고 부딪치는 것이 있었다. 조약돌과 달리 맑고 투명한 소리가 났다. 매끈하고 둥근 모양이었다.


손바닥에 닿자 고통과 신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건 돌이 아닌데. 이건···!’


아랑누는 큰소리로 이루다를 불렀다.

“이루다! 거기 있는 것 다 알아. 도와줘. 여기 이상한 것이 있어!”


돌안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루다는 듣고 있을 것이다.


“이루다! 이건 눈물 같아. 고통스러운 신음이 담겨있어.”

지팡이로 휘젓다가 무릎을 꿇고 손으로 자갈을 뒤적였지만 같은 모양의 물건을 더는 찾을 수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보고 있으니 이루다가 조용히 다가왔다.

“뭐야? 그게?”

아랑누는 앉은 그대로 손을 뻗어 올렸다. 손바닥 안의 투명한 물건이 햇빛에 반짝였다.


이루다가 빼앗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건, 아야론의 물방울인데!”

“아야론이면 사다녜의 족장?”


“응. 족장은 물에서 태어났어. 그래서 눈물이 뭉치면 이렇게 변해. 연못이 말랐을 때도 이렇게 울었어. 물에서 태어난 사다녜는 먼지가 될 거라고 하면서.”

그때를 생각하는지 이루다가 씩씩거렸다.


“그래서 마디다 언덕을 함께 쓰자고 했는데···. 그 나쁜 촌장이 마구 괴롭혔어. 그때도 이렇게 울었어. 하지만 이러면 족장의 몸도 말라버려.”


“이 근처에 또 있니?”

아랑누가 일어나 지팡이 끝으로 자갈을 뒤적였다.


주변을 살피던 이루다가 소리쳤다.

“저기, 저기도 하나 있어.”

이루다가 뛰어갔다. 목소리에는 이내 절망이 섞였다.

“아, 이런. 이렇게 많이 떨어뜨리면···.”


“왜 그래? 얼마나 많아?”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어. 이상하다? 이렇게 많이 흘릴 리 없는데.”

“거기 뭐가 있는데?”

“사막의 혼 사원. 거긴 왜 갔지?”


“다른 사다녜들은? 그들에게 물어봐.”

“없어. 내가 왔을 때도 아무도 없었어.”

이루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밀려온 불안에 입술이 떨렸다.


“나만 버려두고 떠났나···.”

“이루다, 이건 도와달라는 신호야. 살려달라는 뜻이라고. 사원으로 가야겠어.”

“지금? 지금 저 사막을 건너는 건 가다가 죽겠다는 건데?”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는 없어. 이건 목숨을 걸고 남긴 거야.”


아랑누의 외침을 듣고 깨어난 이연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도조는 아직 잠이 덜 깨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연의 어깨 위에 앉아있었다.


“누님, 무슨 일이에요?”

“아무래도···. 사다녜들이 위험에 빠진 것 같아.”


이연이 바짝 마른 보랏빛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해가 높이 떠오르자 사막의 마른 공기가 타올랐다.

“누님, 기다렸다가 해가 기울면 출발해요.”


도조가 입을 비쭉거렸다.

“난 처음부터 사막은 아니라고 했어. 아예 그늘도 없는 곳으로 가려고?”

이연이 날개를 툭 건드리니 도조는 반대쪽 어깨로 옮겨가 부리를 딱딱거렸다.


“이루다, 네가 안내해줘.”

아랑누의 말에 이루다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내가?”


아랑누와 이연이 말없이 이루다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싫어. 날 비웃던 놈들이야. 나만 버리고 떠났잖아. 그냥 거기서 살라고 해.”

이루다는 휙 몸을 돌려 뛰었다. 바람처럼 멀어지더니 바위산의 어느 구멍으로 사라졌다.


아랑누는 지평선을 바라보고는 바위산 돌안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자갈마저 눈이 부셔 동굴 안과 밖의 명암차이가 칼로 자른 듯 또렷했다.

지금은 몸을 숨길 때였다. 아랑누는 한숨을 내쉬고 그늘을 찾아 들어갔다.


*


이루다가 숨은 동굴을 어떻게 찾았는지 온설지는 그 앞에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가 구해온 것은 사막쥐 다섯 마리였다.


도조는 냄새를 맡더니 가장 먼저 동굴 앞으로 찾아갔다.

“고기다. 고기 냄새가 나.”

도조는 머리를 사람 모양으로 바꾸고는 입맛을 다셨다. 아랑누와 이연도 연기가 나는 곳을 찾았다.


“사막이라 사냥감이 없어. 새벽부터 헤맸지만 이것뿐이야.”

“온형, 늦잠 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여기서 기다렸다가 출발하자고.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에 아랑누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불가에 앉았다.


온설지는 동굴 안을 가리키며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꼬마가 왜 그래?”

아랑누가 고개를 저었다.


고기가 다 구워지자 도조가 달려들었다. 온설지가 가볍게 도조를 물리쳤다.

“왜 이래? 친구, 다 같이 먹어야지!”


온설지는 벌떡 일어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버둥거리는 이루다를 안고 나왔다.


“내 성의니까 먹어봐. 돈은 안 받는다.”

이루다는 눈을 흘기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두 무릎 사이에 턱을 얹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온설지가 빠른 손놀림으로 고기를 손질하자 이루다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에는 하얀 호랑이였는데, 지금은 하얀 거인이라니.


도조가 통통통 온설지 옆으로 뛰어왔다. 척척 손질되어가는 고기를 보고 흥분했는지 사람의 머리에서 까마귀로, 또다시 사람으로 바꾸었다.

“언제 먹을 수 있어? 나 배고파.”

고기 손질이 끝나자 도조가 제일 먼저 한 마리를 낚아챘다.


온설지가 재를 긁어내고 칼집을 낸 사막쥐를 이루다에게 건넸다. 이루다는 빤히 바라볼 뿐 고기를 받지 않았다.

“아저씨가 호랑이야?”

“맞아. 그게 이상해?”

온설지가 껄껄 웃었다. 다시 꼬챙이를 건네자 이번에는 받아들었다.


이루다는 앞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가만히 보니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물의 주술을 풀었던 사람은 눈가리개를 하고도 잘 걷고, 하얀 사람은 낮에는 사람이고 밤에는 호랑이가 된다. 사람도, 호랑이도 하얀색이다.


까마귀는 머리가 새였다가 사람 얼굴로 바뀐다. 도조의 변신과 목소리는 사다녜라서 듣고 보는 것이지만, 이루다는 거기까지는 몰랐다.

평범한 이룽은 이연 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들은 수미원에서도 함께 있었다. 그 이전부터 함께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 하얀 거인이 말했다. 우린 친구라고.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같이 다녀?”

“왜? 다르게 생기면 친구가 될 수 없나?”

온설지의 말에 이루다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굳게 다물었다.


온설지가 아랑누에게도 꼬챙이를 건넸다. 아랑누를 위해서는 칼집을 많이 내주었다.

“이거 먹을 만한데. 온형 덕에 사막에서 고기를 다 먹고.”

“예. 형님. 그러잖아도 배가 고팠는데.”

아랑누와 이연은 꼬챙이에 붙은 살점까지 깨끗이 발라먹으며 감탄했다.


“눈사람도 쓸 데가 있네.”

도조가 깍깍거렸다.

“그동안 날 뭐로 본 거야?”

“눈사람이니까 햇빛에 녹을 줄 알았지.”

“뭐라고?”

온설지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이루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입에는 씹던 고기가 그대로 물려있었다. 우느라 제대로 씹지 못할 정도였다.


온설지는 자기가 뭘 잘못했냐는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랑누는 조용히 웃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벽이 허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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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아랑누_금협 시장 22.06.14 46 1 13쪽
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59 아랑누_뱃삯 22.06.12 45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4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7 1 9쪽
51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22.06.08 44 1 13쪽
50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22.06.07 46 1 11쪽
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7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3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7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7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4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8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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