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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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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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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6.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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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청옥선원

DUMMY

하말항의 크고 작은 거리 곳곳에서 음악과 시낭송이 울려 퍼졌다. 연주자나 행인들의 표정도 밝았다.

올뫼국은 광검국에 비해 부유하지 않지만, 학문에 관심이 높고 이름난 사원이 많아 너른벌 세 개의 대륙에서 많은 수련생이 찾아왔다. 그만큼 문화와 예술을 누리는 수준도 높았다.


유쾌한 분위기에 이끌려 사로잔도 흥이 올랐다. 볕이 잘 드는 모퉁이에 앉아 비파를 꺼내 들었다.

해무찬이 놀라 사로잔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갑자기? 여비가 떨어졌어?”

“분위기가 좋잖아?”


사로잔은 비파를 조율하더니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를 연주했다.

다루영도 따라서 흥얼거리다가 월금을 꺼내 들었다. 예인은 예인을 알아보듯 그녀는 사로잔의 연주가 좋았다. 왠지 모르게 이끌려 어느새 연주를 시작하곤 했다.


“재미라면 나도 빠질 수 없지.”

아순치가 피리를 꺼냈다.

“드디어 나의 첫 무대인가? 하하하.”

부푼 기대와는 달리 피리에서 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사로잔과 다루영은 연주에 몰두해 쳐다보지도 않는 데 혼자 당황하며 몇 번 숨을 불어넣었다. 피리는 곧 제대로 소리를 냈다.


해무찬이 입맛을 다시며 서성거렸다.

“보석도 팔았으니 그냥 다니면 안 될까? 나의 대금연주를 이렇게 내놓다니. 쩝.”


사로잔이 다음 곡을 위해 현을 튕기며 해무찬을 올려다보았다.

“찬, 우린 거리의 악사야. 이 순간도 즐겨야지. 딱 쓸 만큼만 가져왔으니 게으름피우면 국물도 없어.”

“그러니까 말이야. 구휼소에 기부하는 계획은 무르면 안 될까?”

사로잔이 대답 대신 눈을 흘겼다. 비파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발이 올라갔을 것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하면 되잖아.”

해무찬이 대금을 꺼내 들었다. 투덜거린 모습과는 달리 대금을 잡자마자 온 힘을 기울여 연주에 빠져들었다.


*


마음 맞는 연주에 이어 풍성한 점심으로 기분이 좋아진 네 사람은 나침반을 열었다.


배에서 내릴 때와 마찬가지로 바늘은 계속 사로잔을 가리켰다. 방향을 바꾸어도 빙글 돌아 사로잔 앞에 멈추었다.


“고장 났나? 어디로 가라는 거지?”

“사로, 아직 목적지가 없다면 말이야. 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사로잔이 놀라 다루영을 보았다.


어디를 가고 싶다고 먼저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로잔이 하자고 하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다루영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니.


“나 역시 갈 곳이 있는데 말이지. 주명산이라고···.”

아순치가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다루영이 아순치 앞에 바짝 다가섰다.

“청옥선원?”

“맞아. 거기!”

다루영이 사로잔에게로 돌아섰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이 맞은 아순치와 다루영이 서로 손바닥을 부딪치며 폴짝 뛰었다.


해무찬이 킁킁거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허, 길 한 가운데서 왜들 이러시나.”

은근히 다루영의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잡아끌었다.


사로잔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 얼른 가로막았다. 혹시라도 사로잔이 반대하면 다루영은 아무 말 없이 따를 테니까.

“다루가 가고 싶다면 당장 가야지. 거기가 어디야?”


아순치는 이미 자신의 말, 우듬의 짐을 꼼꼼하게 묶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이틀 정도 걸으면 돼. 평지니까 힘들지는 않을 거야.”

청옥선원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부터 입꼬리가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닌가.


다루영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아치, 잘 아네? 가봤어?”

“이 년 정도 수련했지.”

“아낙거사 밑에 있었다며 이번엔 청옥선원이야? 도대체 스승이 몇이야?”

해무찬이 팔짱을 끼고 떡 버텼다.


“숨어 다녔다니까. 거기선 이 년 만에 끌려 나왔지만.”

“그래···, 그렇단 말이지. 왠지 상상된다.”

해무찬이 씰룩거려도 그는 웃느라 광대뼈가 올라가 내려올 줄 몰랐다.


다루영 역시 마음은 이미 북쪽으로 내달렸다.

“고애온 대선사는 유명한 분이야.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도 있어. 스승님과도 친분이 깊어서 편지를 주고받으셨거든. 꼭 만나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다니.”

설레는 마음을 누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해무찬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 손에는 검불의 고삐를 쥐었다.

“가자고! 청옥이든 홍옥이든! 다루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가야지!”


사로잔은 나침반만 든 채 멀어지는 다루영과 해무찬을 바라보았다. 아순치 역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끌고 따라갔다.


나귀 두 마리와 사로잔만 덩그러니 뒤처졌다. 부랴부랴 나귀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보시오들, 나도 가고 싶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행인들 틈에서 흐지부지 사라졌다.


*


고애온 대선사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늘은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청옥선원의 수련생 무추가 이들을 안내했다.

“스승님은 순회강연 중이세요. 나랏님 부탁으로 떠나신 거라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하셨어요.”

“여간해서는 선원을 안 떠난다고 했는데···.”

다루영은 무너지는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말을 더듬었다.


무추가 허공에 삿대질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요! 속이 터진다고요. 얼마 전에 과희국 모여사원까지 갔다 와서 엄청 앓으셨어요. 완전히 소금에 절인 배추였다니까요. 돌아가시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고, 불쌍한 스승님.”

“그런데 또 강연회를 다니신다고요?”


“제 말이요. 나으신지 얼마 안 되는데요. 여하튼 이번에는 의원님도 따라갔어요.”

무추가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동안 본관 건물인 정음각에 다다랐다. 무추만큼이나 다루영도 울상이었다.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련장 새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아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나이는 삼십이 넘었지만, 작고 동근 얼굴 때문에 훨씬 어려 보였다.


아순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치? 아치 아니야?”

“새인 누님, 잘 지내셨어요?”


새인이 반갑게 인사하는데 아순치의 얼굴에 길게 난 흉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마를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온설지는요?”

아순치는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사원을 둘러보았다.


새인은 대답 대신 다른 일행에게로 몸을 돌렸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스승님이 안 계셔서 죄송하군요. 무추, 손님들을 방으로 안내해줘.”

“넵, 수련장님!”

무추가 씩씩하게 앞장섰다.


“뭐야? 아치랑 아는 사이였어?”

“엄청 친한 사이 같아. 아치는 여기서 뭘 했을까?”

해무찬과 다루영이 귓속말로 속닥거리며 무추를 따라갔다. 사로잔은 묵묵히 사원을 둘러보며 그 뒤를 따랐다.


새인이 팔을 살짝 잡았기에 아순치만 자리에 남았다.


“벌써 칠 년이나 지났네. 소문은 들었어. 소단주가 되었다고?”

“네. 더는 피할 수 없더라고요.”

“너한테는 그 자리가 어울려. 온설지를 보러 왔니?”

“어디···, 갔어요?”

“그게 좀 이상해. 스승님과 모여사원에 함께 갔는데 돌아오지 않았어. 스승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무슨 일이 있었나요?”


고애온 대선사는 온설지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지 알면서 데려갔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몹시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하는 아주 중요하고 위급한 일. 씁쓸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엉뚱한 면이 있어도 좋은 녀석이었는데. 무추도 같이 갔었는데 모른다는 거야.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대. 이상한 건 거기 있던 귀령송환사와 그녀의 시동도 함께 사라진 거지.”

“예?”


“우리끼리 추측해봐야 억지만 늘어놓게 되니까, 더는 말하지 않았어. 스승님이 침묵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아순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토록 설레며 기다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니. 그의 손은 어느새 목에 걸린 유리구슬에 머물렀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새인이 손님방으로 다과상을 들고 왔다. 두 개의 손님방 모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아순치는 넋 놓고 창밖의 초승달을 바라보았고, 다른 방에서는 다루영이 시든 이파리처럼 쳐져 벽에 기대있었다.

새인을 보자 꼿꼿하게 자세를 잡았지만 속은 전혀 태연하지 않았다.


대청마루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다루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스승님이 꼭 만나보라고 말씀하신 분이에요. 많이 기대했는데···.”

해무찬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황급히 손수건을 건넸다.


새인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스승님이 누구신가요?”

“녹디사원의 아도대사님이세요.”

다루영이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아, 나도 알아요. 아도대사님을 존경하는 선배라고 하셨어요. 편지도 가끔 왔었고, 스승님이 남긴 기록도 있어요.”

새인은 이야기를 하면서 손님들의 빈 잔에 차를 따랐다.


“모여사원의 세운랑 원로님와 녹디사원의 아도대사님 모두 이 청옥선원에서 수련하셨대요. 아도대사님을 일컬어 두 번째 스승이라고 하셨죠. 세운랑 원로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서 각별하다고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꽤 오래 편지가 안 왔네요.”

“돌아가셨어요.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났어요.”


“저런! 그럼 더욱 보고 싶겠군요. 내일 도서각에 가볼래요? 아도대사님에 대한 기록이 있을 거예요. 편지도 있을 거고요.”

“제가 봐도 되나요?”

“그럼요. 누구나 볼 수 있어요. 스승님의 편지나 기록은 저희에게 귀한 이정표거든요.”


“다루, 나도 함께 찾아줄게.”

해무찬이 다루영에게 노란 정과를 건넸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기분을 바꾸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루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순치는 같이 앉아서도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듯 초점 없는 눈초리였다.

새인은 그의 표정을 모른 척했다. 그가 기대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손님이 먼저였다.


사로잔은 미지근한 차를 마시며 아순치와 새인,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눈치인데?’

그의 사연을 들으려면 차분히 내일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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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아랑누_뱃삯 22.06.12 4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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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3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3 1 9쪽
51 사로잔_용족 혼혈 시향여 22.06.08 43 1 13쪽
50 사로잔_올뫼국 현월성 22.06.07 46 1 11쪽
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3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6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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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2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6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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