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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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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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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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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랑누_다른 공간

DUMMY

”내가 할게요.“

숨 가쁜 소리가 들렸다. 이루다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날이 어두워 보랏빛 바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머리카락과 옷깃은 계속 살랑거렸다.


그 뒤를 이연과 보리도 따라왔다. 한참 먼저 출발했어도 바람처럼 가볍게 뛰는 이루다를 쫓아오느라 이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루다!”

아랑누가 소리쳤다. 호설이 달빛처럼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방법을 찾았구나.“


”사다녜는 태어난 원소에서 정기를 받으면 근원을 움직일 수 있어요. 저들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아요.“

이루다는 두 개의 주머니에 가득 담긴 흙과 나무 조각을 보여주었다. 허리를 굽혀 자갈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돌은 여기 있으니 불꽃이랑 물만 있으면 되는데···.“


“불꽃은 내가 만들어주마.”

호설이 굵은 자갈을 발톱으로 후려치자 불꽃이 튀었다. 아랑누가 빛의 주문을 외워 불꽃을 감쌌다. 잠깐 사이 수십 개의 불꽃이 만들어졌다.


“물은 내가 갖고 있어.”

이연이 나귀 등에 실린 여행용 물통을 건네주었다.


아랑누는 숨을 몰아쉬는 보리의 목덜미와 등을 쓰다듬었다. 궤짝을 짊어지고 뛰다시피 걸었기에 숨을 헥헥거렸다.

“연아, 보리를 데리고 성벽 뒤에 가 있어. 여긴 위험해.”


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보리를 끌고 갔다. 도조도 어느새 날개를 움츠리고 보리의 등에 앉았다.


이루다는 사원 꼭대기에 매달린 사다녜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기까지 어떻게 가지···.”

“호설, 네가 태워줄 수 있어?”

아랑누의 부탁에 호설은 콧김을 내뿜었다.


“내가 벗어나면 괴령이 널 공격할 거다. 바람에서 태어난 사다녜는 바람을 탈 수 있다.”

“난 그런 거 모르는데.”

“해보지 않고 어떻게 못 하는 걸 알지? 서둘러라. 너의 동족이 죽어가니까.”


발을 동동 구르는 이루다를 보며 아랑누는 세운랑 원로에게 배운 술법을 생각했다. 자연의 원소를 다루는 방법, 거기에 바람도 있었다.

“내가 바람을 일으킬 테니 올라타. 아직 힘이 부족해서 약하니까 집중해.”


아랑누는 양손을 움직여 크게 원을 그렸다. 빛의 주문을 외우듯 바람의 주문을 펼쳤다. 한 줄기 산들바람이 이루다를 감쌌다.


이루다는 살갗에 닿는 산뜻한 바람을 느꼈다. 바람을 쫓아다닌 적은 있지만 바람을 타는 건 처음이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발을 올렸다.

귓가에 빛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바람이 될게. 네가 바람을 부릴 때마다 옆에 있어 줄게.’


이루다는 입술을 앙다물고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몇 번 비틀거리던 이루다가 바람 위에 올라섰다.

자신이 바람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곧바로 사다녜들에게 날아갔다. 그들 각각의 생명의 원천을 정수리에 올리고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 사이에도 끼워 넣었다.


괴령이 이루다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아랑누는 더 빨리, 더 강하게 자극해야 했다.

이루다가 무너진 성벽 끝에서 바람을 타는 동안 아랑누는 호설의 등에 앉아 빛의 주문을 외웠다.


괴령 덩어리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아랑누를 향해 달려들었다.


태어난 근원, 원소의 정기를 느끼자 사다녜들의 눈빛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들의 혼은 사람보다 몇십 배 강력했다. 괴령이 가져갔던 힘이 거꾸로 빨려 들어갔다.


피부에 윤기가 돌았다. 팔다리를 삐거덕거리며 하나둘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들의 힘을 다시 삼키려 괴령이 사다녜에게 몰려들었다.


아랑누는 자신에게 남은 기운을 모두 모아 빛의 문양을 만들었다. 여태껏 시도한 적 없는 최고의 영력이었다.


빛으로 새긴 글자와 기호를 사방으로 흩트리자 조각 하나하나가 빛을 발하며 괴령 덩어리를 완전히 덮었다.

꿈틀거리던 덩어리가 치이익 사그라들었다. 흩어진 가루가 흙먼지처럼 뽀얗게 일어났다.


사다녜들이 모두 풀려나자 호설은 사원의 중심, 괴령의 잔해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톱을 휘두르자 빼액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미 요귀가 다리를 휘저으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호설은 더 높이 뛰어올랐다. 공중에 떠오른 요귀의 정수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호설이 요귀를 상대하는 동안 아랑누는 꽃잎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떨어진 자리에서 그녀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아랑누는 완전히 사라졌고, 그 자리에 검은 지팡이만 남았다.


도조가 그 순간을 목격하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요귀의 신음에 묻혀 까마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새벽빛이 비쳐들자 사다녜들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연은 뛰어 들어가 비틀거리는 사다녜들을 부축했다.


호설의 자리에 되살아난 온설지도 벌떡 일어나 그들을 도왔다.


도조는 정신없이 날갯짓하며 소리쳤으나 두 사람 모두 휘이휘이 손을 저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까마귀의 장난쯤으로 여겼다. 지금은 장난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사다녜를 돌보는 것이 먼저였다.


사다녜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루다를 발견했다.

하나둘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여섯, 열일곱, 서른이 넘는 사다녜들이 큰 원을 이루며 서로의 어깨를 잡았다.


낮은 소리로 자연의 찬가를 불렀다. 하나가 된 그들을 따뜻한 빛이 감쌌다. 둥지에 담긴 알처럼 가운데 선 이루다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족장 아야론이 다가왔다.

몇백 년 전에 태어났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 들어 보였다. 목소리 역시 늪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꼬마야, 네가 우리를 구했구나.”


다른 사다녜까지 한꺼번에 환호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고마워하고, 좋아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도 이름이 생겼어. 내 이름은 이루다야.”

“그래. 바람의 아이 이루다. 고맙다. 우리를 구해줘서.”


얼싸안고 길고 긴 인사를 나눈 뒤에야 아야론은 온설지와 이연에게 다가왔다. 공손히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아, 저희보다는 여기 아누가···.”

온설지는 아랑누를 소개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있는 줄 알았던 아랑누가 보이지 않았다.


“아누는?”

“내가 아까부터 소리 질렀잖아!”

도조가 그의 머리 위에서 푸드덕거렸다.


“누님은 어디 있어?”

이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땅속으로 스며 들었다구!”


도조가 본 대로 말했지만 온설지와 이연은 눈만 깜빡거렸다. 사람이 땅으로 스며들다니.

“비가 스며들 듯 사라졌다고. 못 알아듣겠어?”

“거기가 어딘데?”

이연이 다그치자 도조는 아랑누가 있던 자리로 날아가 앉았다.


이연은 조심스럽게 아랑누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루다의 부축을 받으며 아야론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사원의 다른 공간으로 간 것 같네요. 사막의 혼 사원은 두 개의 공간을 아우른다고 했거든요. 그게 정말인 줄은 몰랐습니다.”


“거긴 어떻게 찾죠?”

아야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모릅니다. 선택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듬삭이 죽은 이후로는 누구도 들어간 적 없습니다.”


이연이 무너진 사원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비밀통로가 있을 거야.’

지팡이를 잡고 뛰어올랐다. 온설지가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연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이분들은 보내고 찾아보자.”


마음이 급해 사다녜들을 잊고 있었다. 그들이 비록 모습을 찾았다고는 하나 내상을 치료하고 원기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온설지가 이루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도 돌아가라. 이제는 혼자가 아니잖아?”

“나도 같이 찾으면 안 돼?”

“저기 봐라. 돌안까지 돌아가기도 벅찰 거다.”

사다녜들이 아야론을 따라 힘겹게 사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네가 돌봐야지. 햇빛이 강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할 거다.”

“누님을 찾으면 돌아올 거지?”

“당연하지. 그러니 먼저 가 있어.”

이연이 다른 사다녜를 보며 손짓하자 그가 알았다는 듯 이루다의 손을 잡았다.


“방해하지 말고 가서 기다리자.”

이루다는 손을 잡아준 사다녜를 보며 깜짝 놀랐다. 겁에 질린 낯빛이 사라지고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기다릴게. 꼭 와야 해.”

이루다는 사다녜들을 따라 보랏빛 자갈 사막을 건너갔다.


*


사막의 혼 사원은 건물 하나가 아니었다.

사다녜들이 묶였던 성벽 뒤쪽으로 같은 모양의 사원 두 개와 탑이 있었다. 폐허가 되었어도 찬란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온설지와 이연은 벽을 더듬으며 틈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도조는 반쯤 무너진 천장 주위를 맴돌다가 지붕 위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락거렸다.


도조의 인내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너 번 맴돌다가 창틀에 앉아 온설지와 이연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제일 안쪽의 사원터로 들어가니 우물의 흔적이 있었다.

“샘이 있었나 본데. 사원이 지어질 정도면 제법 큰 강이 흘렀단 얘기지.”

“맞아요. 우물이 있다는 건 지하수가 있다는 거예요.”

우물을 들여다보았지만, 입구부터 막혀있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연은 흰 돌로 쌓은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 아래 검은 구멍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손을 집어넣으니 투명한 막이 물컹거렸다. 얼른 손을 잡아뺐다.


“비켜봐. 내가 들어갈게.”

온설지가 머리부터 들이밀었지만, 좁은 구멍에 어깨가 걸려 꽉 끼었다. 구멍은 살아있는 듯 가장자리부터 옥죄어들었다.


“나 좀 빼줘. 이거 올가미 같아.”

“잠깐 기다려요.”

이연은 온설지의 발을 잡고 온 힘을 다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윽! 아야야!”

온설지는 어깨가 짓눌리는 고통에 더욱 크게 신음했다. 구멍이 점점 좁아졌다.


“뭐 하는 거야? 더 심해지잖아!”

“가만있어 봐요. 바동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었거든!”

“아!”

이연은 비로소 깨달은 듯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힘으로는 빼낼 수 없는 것이다.


“왜? 뭔데?”

“기다려야 해요. 주인이 아니니까요.”

“뭔 소리야? 이 꼴로 언제까지 있으라고?”

“숨은 쉴 수 있잖아요.”

온설지가 훅훅 숨을 내쉬었다. 밧줄로 묶인 꼴이지만, 숨쉬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리니 옥죄던 힘도 느슨해졌다. 조금 더 지나자 막이 꿈틀거리면서 그를 서서히 밀어냈다. 몸이 미끄러져 나왔다.

“아휴, 이제 살았네. 얘는 또 뭐냐?”

“결계인가 봐요. 비슷한 전설을 들었어요.”

“어떻게 전설이 이렇게 현실적이야? 그러면 전설이 아니지.”


온설지는 팔을 휘휘 돌리며 묶였던 몸을 풀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주인이 찾을 때까지요.”

“좀 알아듣게 설명해라. 무슨 전설이 이 모양이야?”


이연의 맥박이 빨라졌다. 눈동자가 짙은 자줏빛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드디어. 하늘의 성물을 찾는 건가!’

눈빛은 이내 연한 자줏빛으로 돌아왔다.


창틀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도조는 조는 것도 지루해 눈을 떴다.

온설지는 제단 그늘에 기대어 눈을 감았고 이연은 제단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도조는 이연에게로 날아갔다.

“꼬맹이, 아직도 못 찾았냐?”

“여기로 들어가 봐.”

도조는 이연이 가리키는 구멍을 바라보았다.

검은 물체가 숨을 내쉬듯 꾸물거리는 환각이 보였다. 흠칫 뒤로 물러섰다.


“뭐야, 뭐야? 이건?”

“다른 공간으로 가는 구멍이야. 누님이 궁금하면 따라가 봐.”

“오우, 나, 난 아니야. 나, 날개가 젖으면 안 되거든.”


온설지가 눈을 뜨지도 않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조가 펄쩍 뛰었다.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알았다, 알았어.”


도조는 몸을 떨면서도 똑바로 검은 구멍을 응시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눈을 통해 지켜보는 것을 도조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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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아랑누_금협 시장 22.06.14 46 1 13쪽
63 아랑누_예인 길가온 22.06.14 42 1 13쪽
62 아랑누_바다 위에서 22.06.13 43 1 15쪽
61 아랑누_금협의 사정 22.06.13 43 1 10쪽
60 아랑누_매수인 22.06.12 45 1 11쪽
59 아랑누_뱃삯 22.06.12 45 1 12쪽
58 사로잔_새로운 주인 22.06.11 46 1 13쪽
57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3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52 사로잔_장사꾼 무휼 22.06.08 47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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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사로잔_주명산 22.06.07 45 1 12쪽
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46 선계_진백성 율명 22.06.05 46 1 11쪽
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44 아랑누_길잡이 구름 22.06.04 44 1 9쪽
43 아랑누_무시궁 22.06.04 46 1 10쪽
42 아랑누_사막의 혼 22.06.03 45 1 12쪽
» 아랑누_다른 공간 22.06.03 43 1 12쪽
40 아랑누_사막의 혼 사원 22.06.02 46 1 10쪽
39 아랑누_바위산 돌안 22.06.02 46 1 13쪽
38 아랑누_요마족 혹은 사다녜 22.06.01 47 1 11쪽
37 아랑누_이별의 밤 22.06.01 44 1 10쪽
36 아랑누_마딘 수미원 22.05.31 46 1 14쪽
35 아랑누_까마귀 도조 22.05.31 5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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