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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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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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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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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로잔_고대 유적

DUMMY

창문 너머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다루영은 힘겹게 뜬 눈으로 액자 속 그림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벌써 저녁때인가.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는 빈 포대 자루가 된 것 같았다. 충격이 너무 커서 슬픔이 다가오지 못했다.

몸을 뒤척이자 기다렸다는 듯 사로잔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어났어?”

“나 얼마나 누워있었어?”

“하루하고 반? 여태까지 찬이 지켰어. 막개가 도착해서 아치와 함께 나갔어. 약재를 가져왔대. 다행이지?”


다루영이 천장을 바라보며 몸을 똑바로 뉘었다.

“꿈을 꿨어. 스승님과 녹디사원에 함께 있었어. 약과 독에 대해 가르쳐주셨어. 그런데···, 그런데. 스승님이 선력을 잃은 게 나 때문이라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로잔이 수건으로 그녀의 볼을 닦아주었다.


“내가 우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눈물로 해결되는 일은 없으니까.”

다루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로잔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건 너 때문이 아니라 요귀 때문이야.”

손을 토닥이자 다루영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사로, 넌 단검의 주인이야. 날 도와줘.”

“당연하지. 우린 이미 한배를 탔잖아.”

“부모님과 스승님의 원수를 갚고 용각섬을 되찾을 거야.”

“그래. 우리가 꼭 해낼 거야.”


사로잔이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고 일어섰다.

“찬에게 알려야겠다. 그 녀석 엄청 기뻐할 거야. 너한테 무슨 일 나는 줄 알고 어찌나 애를 태우던지. 아주 민망했다니까.”

일어서서 나가려 하자 다루영이 부어오른 눈으로 붙잡았다.


“이제 뭘 해야 해?”

“그야, 홍석산에 가서 단서가 있나 뒤져봐야지. 솜양지도 찾고.”

다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친구가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 스승님이 그토록 기다리던 단검의 주인도 찾지 않았는가.

이렇게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다. 단검의 주인을 따라가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다.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


홍석산 기슭을 따라 네 명의 악사들은 하염없이 풀숲을 헤집었다. 괴물과 맞닥뜨렸던 산등성이에서 시작해 무엇을 찾는지조차 모르면서 주변을 살폈다.


무휼과 시향여는 솜양지를 찾기에 목표가 확실했지만, 악사이자 무사인 네 사람은 무엇이 단서인지 모르니 막연하게 풀숲을 헤집었다.


아순치는 나뭇가지를 던져버리고 무휼에게 다가갔다. 뭔지 모르는 것을 찾으러 헤매는 것보다 작더라도 아는 것을 찾는 쪽이 마음 편했다.

“솜양지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하오?”

“상인들이 다니는 지름길이 있어요.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됩니다.”


“지금은 잎이 검푸른 빛일 거예요. 잎끝이 새하야면 구별하기 쉬운데 다른 독초와 헷갈리지 않게 조심해야 해요.”

시향여가 다짐하듯 말했다.

비슷한 모양의 풀 중에 만지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나는 것도 있고 구토와 설사를 일으키는 것도 있었다.


“우리에겐 다루도 있고, 시향여도 있으니 걱정 안 해.”

사로잔이 여유만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해무찬이 사로잔의 말에 동의하며 어깨를 폈다.

“그렇지. 그 여유. 그게 우리의 방식이지.”


수상한 증거를 찾지 못하자 결국 포기하고 모두 약초를 찾는 일에 나섰다.


*


솜양지는 쉽게 찾았다.

다리가 불편한 무휼도 그들을 따라 험한 산길을 제법 잘 타고 넘었다. 곡시단과 솜양지 말고도 허신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약초를 모두 구했다.


“너무 간단하게 끝나는데. 이러면 시시하지 않아?”

사로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꺼운 안개가 그들을 덮었다. 바로 옆사람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해무찬이 원망을 담아 외쳤다.

“우, 말이 씨가 된다고. 사로, 무슨 저주를 이렇게 심하게 걸어?”


기분 좋게 웃던 사로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게···. 이건 또 뭐지?”


어느 방향으로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서서히 안개가 걷혔다.

안개가 걷히자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높이 자라 하늘을 가렸다. 군데군데 굵은 고사목이 군락을 이루어 앙상한 가지가 거대한 가시처럼 보였다.

살아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의 뿌리가 엉켜 거대한 바위를 움켜쥐었다. 거뭇한 바위들이 나무뿌리를 떠받들고 긴 벽을 만들었다.


“여긴 어디야?”

해무찬이 외치자 무휼이 산봉우리를 살펴보았다.

“여기도 홍석산이에요. 저쪽에 붉은 머리가 보이니까, 현월의 반대편이네요.”


“이건··· 분명···.”

사로잔이 팔짱을 끼고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뭇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런 그녀를 해무찬이 눈으로 쫓았다.

“분명 뭐?”


“하늘의 성물이 우릴 부른 거야.”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번에도 나를 부른 것인가.

허리에 찬 수정 막대기를 쓰다듬었다. 막대가 제 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입구가 있을 거야. 찾아보자.”

사로잔은 바위벽 위를 덮은 흙을 걷어냈다.

나무뿌리가 움켜쥔 것은 커다란 바위문이었다. 그 둘레에도 흙이 쌓여 또 다른 벽을 이루었다.


모두 달려들었으나 바위문을 덮은 뿌리도, 흙덩이도 사람의 손으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수정 막대기가 사로잔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잡은 것이 아니라 막대가 주인의 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어린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처럼 머릿속에 다음 행동까지 그려주었다.


막대기를 꺼내 들자 괴물을 상대할 때처럼 길이가 늘어났다. 손바닥이 시원했다. 사로잔이 씨익 미소 지었다.


“찬, 너 주공 갖고 있지?”

“아니. 그 귀한 걸 어떻게 갖고 다녀. 왜?”

“다음부터는 꼭 갖고 다녀. 그게 네 살이라 생각하고. 자, 다들 물러서.”


일행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더 멀리 가라고 손짓했다. 조그맣게 보일 때까지 떨어지자 막대기를 서서히 휘두르며 기운을 불어넣었다.


숨을 고르자 손끝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막대 끝으로 바위문을 겨누었다.

“이얍!”

외마디 기합과 함께 막대기를 내리쳤다.


수정 막대기에서 눈 부신 빛이 뿜어나오며 엄청난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은 뿌리 아래 흙더미와 바위에 붙은 자갈까지 씻어냈다.


바람의 위력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 역시 역풍에 떠밀렸다. 막대기가 막아선 사로잔은 괜찮았지만,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밀려드는 흙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흙먼지가 가라앉자 바위문 안쪽 통로가 보였다. 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이런 힘도 있었어?’

해무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앞으로는 반드시, 기필코, 어떤 일이 있어도 주공을 갖고 다니겠어!.’


*


오래된 동굴이지만 내부는 제법 온전한 상태였다. 틈마다 이끼가 끼고 거뭇해졌다 뿐이지 모양은 그대로였다. 벽면을 따라 빼곡히 장식된 그림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았다.


시향여가 주머니에서 조각초를 꺼냈다.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이라면 항상 갖고 다니는 필수품이었다. 조개 모양의 초는 반 시간 정도 불을 밝힐 것이다.


그림에 촛불을 비추었다.

“삼신성을 모시던 유적일 거예요. 고대의 유적이 있다고 소문은 들었지만 진짜 있을 줄은 몰랐어요.”


해무찬도 통로를 따라 걸으며 그림을 흘끗거렸다.

“여기 그림 좀 봐. 무슨 뜻이 담긴 것 같은데?”

“산꼭대기에서 일어난 일인가 봐요. 여기 후광이 있는 건 빛의 신이고 이쪽에 떨어지는 건 검은 눈물 같아요.”


시향여가 가리킨 곳을 자세히 보니 검은 옷의 여인이 하늘에서 땅으로 거꾸로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은 지워졌으나 머리카락과 치마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그림을 들여다보자 사로잔은 가벼운 멀미를 느꼈다. 벽이 숨을 쉬듯 울렁거렸다.

어지럼증이 일어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 그림이 나를 부르나?’

여인의 그림에 손을 대자 손가락 끝이 따끔거렸다. 벌레인가.

그녀는 손끝을 그림에 대고 문질렀다. 꾸물대는 벽을 뚫고 손이 들어갈 것만 같았다.


“사로!”

아순치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손이 어깨를 스치자 눈을 다시 떴다. 눈앞에는 그저 딱딱한 벽이었다.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사라지고 아순치만 혼자 남았다.

“갑자기 사라졌어! 무슨 장치가 있나 봐.”

“이 좁은 통로에서 움직일 곳이 어디 있다고?”


사로잔은 통로의 양쪽 끝을 둘러보았다. 하늘의 성물이 부르는 것이다. 확신이 들었다.

“어쨌든 가보자.”


두 사람은 벽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봐. 빛이야.”

사로잔은 통로 끝에서 스며 나오는 빛을 보고 뛰었지만, 아순치에게는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어디서 빛이 난다는 거야?’

어리둥절했지만, 그녀를 따라 무작정 뛰었다.


빛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넓은 방이었다.

바위로 이루어진 방에는 파도 거품 같은 물방울이 무릎 높이의 허공으로 탁탁 튀어 올랐다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사로잔이 들어서자 거품이 한데 모여 기둥처럼 일어섰다.

‘왔구나. 기다렸어.’


거품 기둥이 사로잔에게 다가왔다.

‘넌 아직 준비가 안 되었구나. 괜찮아. 아직 시간이 남았어.’


“당신은 누구지?”

‘나는 너지. 너와 나는 서로의 일부이고. 이제부터 함께 하자.’

거품이 날아와 사로잔의 몸에 달라붙었다.

왼손의 무늬가 서늘해졌다. 몸이 가벼워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개운하고 시원했다.


바닥을 채웠던 거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빛나는 보석만이 놓였다.


사로잔이 새로운 느낌에 빠져있을 때 아순치가 뛰어 들어왔다.

“성물을 찾았구나!”


기뻐하며 보석 더미로 달려들던 아순치는 뜬금없이 거기 섞인 부채를 집어 들었다.

“이 부채는 뭐야? 정말 뜬금없네.”


보석에서 합죽선으로 모습을 바꾼 성물을 보며 사로잔이 으흠 콧소리를 냈다.

“네가 주인이니 너에게 맞는 모습으로 바뀐 거지. 찬의 주공처럼.”

“하! 부채? 무기가 아니고?”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헛웃음만 뱉었다.


사로잔이 아순치의 부채를 받아 펼치자 눈앞에 한 천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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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잔_고대 유적 22.06.11 44 1 11쪽
56 사로잔_독지린의 진실 22.06.10 43 1 12쪽
55 사로잔_괴물의 정체 22.06.10 42 1 10쪽
54 사로잔_진혼곡 22.06.09 43 1 12쪽
53 사로잔_아수라장 22.06.09 4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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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사로잔_청옥선원 22.06.06 48 1 11쪽
47 사로잔_도리사 해협 22.06.06 44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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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선계_선인 부녹 22.06.05 43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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