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내일은 뭐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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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 내일은 뭐 할까?
프란은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지방에서 올라온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겨울 귀리 농사가 폭삭 망하는 바람에 영지민들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다가왔다. 하지만 능력이 출중한 부인을 둔 덕에 처가에서 식량을 꾸어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니 콧노래가 안 나올 수 있는가. 그는 커피를 홀짝이며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이 서류가 마지막이었는지 그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기지개를 켰다. 역시 부인이 업무를 분담해주니 일을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부인은 아직도 일하는 중이려나?’
프란은 일에 지쳐 힘들어하고 있을 부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에게 시집오면 힘든 일은 시키지 않겠다고 했는데... 생각을 마친 그는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지금 당장! 헉! 부인!”
프시케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의 옆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녀의 기척 죽이기는 대단했다. 프란은 그녀 대신 암살자가 서 있었다면 죽은 목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암살자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정말 바보 같지만 말이다.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아, 나는 당신이 아직 서류업무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누가 누굴 도와준단 말입니까? 제가 론데르만 영지와 관련한 서류 대부분을 처리했는데.”
팩트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 이 때문에 저택 내부에서는 론데르만 영지의 실질적인 주인은 후작 부인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프란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자 프시케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프란은 그녀의 웃음이 천사의 미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눈앞에 있는 천사와 결혼을 한 행복한 남자였다. 물론, 가끔 얻어터지는 건 조금은 불행했지만 말이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부르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어... 부인, 나는 안 가면 안 될까? 가면 또 된통 혼날 것 같고... 또...”
프란이 횡설수설하며 말하자 프시케는 굳은 표정으로 변했다. 웃음기가 단 1%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에 프란은 창백해졌다. 분명 주먹이 날아오리라. 부인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가장 싫어했으니까. 맞지 않으려면? 싹싹 빌어야 했다.
“부, 부인, 미안하오! 다 내 잘못이오!”
“하아... 혼을 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묻는 프란이었다.
“그럼, 무슨 일로?”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같이 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라뇨?”
“멀지 않아 가문의 위기가 올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프시케의 말에 프란은 멍청한 얼굴을 지우고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프시케의 빛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그는 왕립 아카데미 사학과 수석졸업생이었다. 한 마디로 인재인 거다. 그런 그의 눈에 생기가 돌자 프시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자신이 결혼을 잘했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프란의 이런 표정이었다. 중요한 일에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 이게 바로 프란의 매력이었다.
“알겠소. 그럼, 가도록 합시다.”
하지만 그 매력을 자꾸 떨어뜨리는 일을 저지른다.
“제 옆구리에 올린 손을 치우시지요.”
“헤헤. 안 되겠소? 나는 부인의 컥!”
항상 잘 나가다가 꼭 싫은 일을 저지르는 그였다. 그래도 프시케는 그가 싫지 않았다. 바보 같은 일을 해도 이제는 그런 행동도 좋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변화에 당혹스러운 감도 있었지만,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막냇동생인 엘렌도 잘 이겨내지 않았는가? 오히려 자신이 똑같은 변화를 겪었을 때보다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런 그녀를 누구보다도 아끼는 프시케였다.
‘엘렌은 현명한 아이지. 그리고 위험한 위치에 있고.’
세자의 눈에 들어온 이상 엘렌을 향한 위협이 시작될 수도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세자의 적대세력은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특히 케이샤 후작 쪽에서 손쓸 가능성이 높았다. 공공연하게 세자비가 될 사람이 케이샤 후작의 첫째 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슈네이도르 가문이 끼어든다? 이건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 슈네이도르가 지켜야할 법이자 초대가주의 유언이기도 했다.
이런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남편이란 자는 실실 웃으면서 자신의 가슴에 슬쩍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그것도 복도 한복판에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프란의 정강이를 가볍게 때렸다. 그런데 짜증이란 놈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자 한 대 더 때렸다. 그러자 비명이 복도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늘 있었던 일이라 하녀들도 이젠 그러려니 했다.
“제 낭군님의 머리가 지시한 게 아니라면 그 나쁜 손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겠죠?”
프란은 프시케의 스산한 분위기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녀가 화나면 부모님이라도 말리지 못했으니까.
“그럼, 그 손을 잘라버리는 편이 좋겠군요. 이리 주세요. 그 손은 이제 낭군님의 손이 아닙니다. 사악한 악마가 깃든 손이지요.”
그러자 프란은 프시케가 어떤 짓을 할지 단번에 파악했다. 이럴 때만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니 프시케로선 미칠 노릇이었다. 아까 생각했던 긍정적인 변화들. 재검토하기로 했다. 이번엔 그 경우가 심했다.
“부, 부인! 내가 잘못했소! 이 손! 이 나쁜 손! 성수를 뿌리면 악마가 나갈 것이오!”
프란은 자기 오른손을 때리며 성수를 부어대려고 했다. 이에 프시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에도 제발, 자기 남자가 1인분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이반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나는 에스텔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크기는 나쁘지 않았다. 내 방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었고 둘이서 사용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침대가 두 대, 책상과 의자도 두 대. 옷장을 비롯하여 화장대도 두 대니 움직일 공간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가구들이 모두 새것이니 왠지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엘렌! 여기 좀 봐! 이 원단 엄청 부드러워!”
“고급인가 보지.”
“엘렌! 이 책상 좀 봐! 내 방에 있는 책상보다 엄청 커!”
“그래. 그것 참안됐구나.”
나는 그 이후에도 에스텔의 말에 대충 둘러댔다. 일일이 답해주기 싫었지만, 내 기분은 업! 업! 업! 대박 업이다! 표정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건 다 연극일 뿐이다. 에스텔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내 속마음을 덮어버리는 가면이다.
“엘렌, 창문 쪽 사용해도 돼?”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이 몸은 지금 기분이 좋으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관대하게 받아주겠노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환호성을 지르는 에스텔. 아니, 새끼고양이였다. 음, 한 가지 확인해볼까?
“에스텔.”
“응? 왜?”
“지금 내 얼굴 어떤 것 같아?”
그러자 에스텔은 신음성을 내며 대답했다.
“으으음, 바보 같아. 마치 사랑에 빠져있는 소녀? 헤헤헤.”
나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감추고 있었거늘! 어떻게 안 거지? 그러자 에스텔은 어른스러운 행동을 보이며 말했다.
“에헴! 엘렌의 표정은 다 읽을 수 있다구! 우린 친구잖아!”
나는 허탈감에 내 침대에 누웠다. 그 감정을 감출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워낙 생소한 감정이라 그런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치라곤 1도 없는 에스텔에게도 들키니 내 가면은 불량품이 분명했다. 언릉 수리점에 맡겨야지.
“엘렌,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나도 너를 생각하면 좋아하는 감정이 마구마구 생기거든.”
“그러니?”
“응! 너도 나를 생각하면 그런 감정이 마구마구 생기지? 그렇지?”
이 질문은 이런 거다. 내가 질문을 하면 넌 반드시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울어버릴 테니까. 애초에 이 질문은 답이 정해져 있다.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10% 담아서.
“당연하지. 다프네 언니보다 훨씬 좋은걸?”
참고로 다프네 언니는 9.9%다. 에스텔은 내 말에 침대 위를 방방 뛰며 좋아한다. 사랑하는 감정을 파악하는 건 눈치 100단이면서 이런 거짓말은 잡아내지 못하는 거냐? 정말 이상한 아이다.
“그런데 엘렌은 이반의 어디가 좋아? 외모? 신장? 아니면 성격?”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반의 모든 게 다 좋... 아니! 누가 걔를 좋아한대? 그냥 눈이 가는 거야! 그래! 관심이라고 하지. 하하하!”
이놈의 입은 정말 제멋대로다. 뇌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녀석 하나 제대로 통제 못 하는데 말이야. 확 자격을 박탈해 버릴까 보다. 나는 가까스로 내 본심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스텔의 눈빛은 반짝 빛난다. 저 밤하늘에 떠 있는 스타! 처럼 말이다.
“후후후후. 걱정하지 마. 나 입 무거워.”
그래, 너 입 무겁다. 에휴, 도대체 에스텔에게 들켜서 이런 고생길을 자초하게 되는지... 이게 내 업보라면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엘렌! 내일은 뭐 할까? 또 카페 갈까? 아니면 도서관? 아니면 아카데미를 둘러볼까?”
후후후. 미안하지만 에스텔, 내일은 바쁘다구. 나는 그녀의 말에 대충 둘러댔다. 왜냐하면 내일은 이반과 약속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귀찮게 하는 새끼고양이와 놀아줄 시간은 없단 말씀! 내일이 빨리 오기를 신께 기도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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