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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SF

디페랑스
작품등록일 :
2022.05.13 00:31
최근연재일 :
2022.06.18 17:15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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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3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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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구해 줘요

DUMMY

철이 지난 바닷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둘 이상이 함께 거닐었는데 유독 천기영만 혼자였다.

둘이 나란히 손잡고 거니는 사람들은 그와 비슷하거나 젊은 남녀였고 간혹 나이 든 연인들도 보였다. 셋 이상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람들은 남자들, 혹은 여자들, 그리고 가족 단위라 할 수 있었다.

그게 이삼 십여 명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독 혼자 쓸쓸히 모래사장과 솔숲 사이를 걷는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혼자 있고 싶었고 혼자 있어야 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비참했다.

남들은 경치 좋은 바닷가에 놀러 와서 한 아름씩 추억을 쌓고 가는데 그는 괴로운 심정을 달래지 못해 발길이 무겁기만 했다.

곧 닥쳐올 겨울이 지나면 졸업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시간이 너무나 암담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3년 동안은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하기 시작한 야구 선수로서, 그것도 가장 중요한 포지션인 투수로서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기록을 매일 새로 쓰며 지난 십 년, 아니 이삼십 년 이래 최고의 유망주로 각광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온 주전투수 자리를 한 번도 동료들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년 벌어진 여러 차례의 대학 리그에서 절반 이상을 그의 힘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대학리그 내내 0점대의 방어율을 자랑했고 세계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서도 유감없이 기량을 발휘해 한 번의 우승과 준우승 한 번, 사강에 한 번 올랐는데 국내외 야구 관계자와 언론에서 그의 역할이 태반이 넘는다고 평가했다.

지난 이십여 년 이래 최고의 신인이라며 프로야구 구단과의 협상에서 역대 최고의 계약금과 연봉을 받고 데뷔를 할 것이라며 연일 전망을 쏟아내곤 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하루아침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서서히 찾아왔던 것이다.

봄철 리그전을 앞두고 허리가 뜨끔한 것이 신경 쓰여 병원을 찾아갔더니 이미 오래 전에 망가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학 2학년 때 타자가 친 공을 잡으려다가 허리를 삐끗했는데 통증이 그다지 크지 않아 가벼운 찜질로 때운 것이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도 경기 때마다 가볍게 넘길 만한 통증이 여러 번 있었다. 그걸 가볍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은 누구나 통증을 피하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는 법인데 사실 그는 허리의 힘을 많이 이용하지 않고도 상대 타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리에 무리가 가는 강속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팔과 손목의 움직임을 주로 하는 변화구를 사용하면서 타자들의 허를 찔러 삼진을 잡아내곤 했다.

그 즈음 야구 해설위원이나 스포츠 전문 기자들도 그의 전략 수정을 앞 다퉈 칭찬하다.

빠른 구속과 강한 위력으로 타자들을 압도하는 정면 승부도 좋지만 상대의 예상을 깨는 방식의 두뇌 피칭이 전성기를 오래 끌고 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승부에서 어떤 전략을 쓰고 어떻게 전략을 바꾸는 것이 과연 현명한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오로지 결과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결과가 좋으면 그 이전에 했던 모든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반면 결과가 나쁘면 온갖 험담과 비판이 쏟아지는 게 그쪽 세계의, 아니 세상 어디서나 통용되는 논리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허리는 점점 더 고장 나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올해 봄, 병원에서 종합 진단을 받은 결과 척추분리증과 추간공 협착증 등 여러 가지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왔다.

물론 꾸준히 치료를 받거나 수술을 하면 완치가 가능하긴 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치료를 하지 않은 채 운동을 계속하면 영영 허리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도 따랐다.

병원을 옮겨 진단을 받을수록 그의 증세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작은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고 몇 달이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더 큰 병원에 가서 다시 첨단 기계 장비를 동원한 진단에서는 몇 년으로 늘어났다.

문제는 그 사실이 매스컴에 노출되어 그가 입단하기로 했던 프로야구 구단뿐 아니라 다른 구단들까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완치되는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섣불리 계약해 데려가려는 곳이 없었다.

처음엔 연고지 구단 외에 몇 군데서 입질을 하다가 언론에서 그의 재기 가능성이 점점 뒤로 미루어질수록 스카우터들의 발길도 끊어졌다.

심지어 병신을 가져다 뭐에 쓰느냐는 말까지 간접적으로 듣게 되자 그의 상심은 깊어만 갔다.

이미 웬만한 선수들은 거의 갈 곳이 정해진 가을이 되자 그에게는 적막함만 남았다.

같이 뛰었던 선수들이 다 제 실력대로 둥지를 찾아 떠나는 동안에 그는 찬바람만 휑하니 부는 곳에 쓸쓸히 남게 되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한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던 연고 구단의 스카우터에게 연락을 했더니 완치되면 보자는 말만 듣고 말았다.

물론 종합병원의 의사들도 정확히 몇 년 후에 완치된다는 보장을 하지 못했다.

5년이나 10년 후 허리가 완치되어 복귀한다 한들 전성기가 지난 선수로 얼마나 활약을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진작 벌어졌다면 남들과 같이 취업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조차 하지 못한 채 졸업을 맞이하게 되니 지금까지 23년의 생애 중에서 최고로 막막한 겨울을 나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그가 국가대표로 나간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한 결과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고 일정액의 연금을 매달 받게 된다는 점이었다.

천기영이 혼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난 뒤 그의 휴대전화에 쏟아진 문자는 대개 두 가지였다.

심란한 마음을 잘 정리하고 오라는 것에 셋이라면 나머지 일곱은 행여나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거나 당장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에게는 미리 얘기를 해서 안심을 시킬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다행이었고 나머지는 다 무시해 버렸다.

그럼에도 여행하는 내내 계속 울리는 전화와 문자음에 최근엔 아예 전원을 꺼 놓고 다니는 중이었다.

요즘은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시국이라 꽤 알려진 자신의 얼굴을 감출 수 있어서 혼자 여행하기는 수월했다.

계절은 이제 초겨울로 접어들어서 꽤 쌀쌀했고 오후 대여섯 시인데도 날이 어둑어둑했다.

바다와 야산의 샛길을 걸으며 이제 무심한 지경에 이르러 단지 푸른 바다와 하늘의 멋진 풍경만 한눈에 가득 담고 있을 무렵 그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도와 줘요······.


그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무 작은 소리라서 어느 쪽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어린 아이거나 적어도 그 자신보다 어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또 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구해 줘요······.


여전히 방향을 짐작하기 어려웠고 오히려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이상한 울림이라니.

그럼에도 두 번이나 구원을 청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환청이라 보기도 어려웠으므로 근처를 돌아다니며 찾아보아야 했다.

소나무가 밀집한 수풀 사이로 다가가기도 하고 바위가 가로막힌 언덕바지로 고개를 내밀기도 하면서 여기저기를 허둥대며 오갔다.

산 쪽인가 아니면 바다 쪽인가?

그는 양쪽을 번갈아 이동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얼마 후 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렸는데 해안 쪽으로 백여 미터 이동했을 때였고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해안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멀리 커다란 바위들이 박혀 있는 곳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 바위들 너머 어딘가에서 젊은 여성이 구조의 신호를 보내고 있을 터인데 문제는 바위무더기가 좌우 양쪽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다.

해수욕장으로 쓰기에는 그리 크지 않은 백사장은 좌우 양쪽 끝에 위치한 바위들 사이에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다시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이번에도 역시 구해달라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이었다.

그건 그가 투수로서 타자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면 상대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강한 확신을 주었다.

기영은 오른쪽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그리고 모랫바닥에 단단히 박혀있는 바위의 뒤로 돌아가 보니 어스름한 가운데 몇몇 그림자들이 눈에 띄었다.

약 백여 미터 밖에서 세 명의 검은 그림자가 한 여자를 쓰러뜨린 후 깔아뭉개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 명은 거칠게 저항하는 여자를 강한 힘으로 억누르며 옷을 벗기는 중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주변을 둘러보며 사방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여자가 너무 세게 저항하자 주먹으로 얼굴이며 머리를 마구 때리고 목을 조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치마를 벗기려 애를 쓰고 있었다.

모랫바닥에 등을 대로 쓰러진 채 두 발을 내지르며 발버둥을 치니 억센 남자라도 쉽게 벗겨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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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체포 22.06.02 136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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