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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랑스
작품등록일 :
2022.05.13 00:31
최근연재일 :
2022.06.18 17:15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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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679

작성
22.06.13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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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판결

DUMMY

제3형사 단독 재판이 열리는 서부지방법원 309호 법정은 재판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재판은 공개로 열리기 때문에 다소의 구경꾼, 곧 참관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취재나 견학을 위해서든 단순히 구경을 하기 위해서든.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건의 재판은 구경꾼이 많이 몰리고 그렇지 않은 건 적당히 머릿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오는데 오후 3시에 진행되는 309호 법정은 재판에 관계된 사람이 더 많았다.

검사와 변호인단이 자리를 잡았고 피고인 세 명과 피해자, 정리(廷吏), 속기사, 담당 형사 등 재판에 꼭 필요한 인물 십여 명에 방청객은 피해자인 백설이의 부모와 친구들 댓 명,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 서너 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 언론사의 기자는 거의 안 보였다.

그건 가해자 쪽에서 미리 손을 써 놓았기 때문이었다.

폭행이나 성폭행 미수 사건은 하루에도 수 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큰 이슈가 되기 어렵고 하루 이틀 지나면 바로 묻혀버리기 마련이었다.

이번 사건은 누군가 나서서 불을 지피기만 하면 적어도 며칠을 타오를 정도의 화제가 될 만했다. 피해자가 미모의 여대생이라는 것과 가해자가 강남의 가장 큰 손 이세라는 점, 결정적으로 흑기사는 전 국가대표 톱스타라는 점들이 다 부합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불씨를 서문태의 변호인단이 꺼 버렸다.

유력 언론사에도 정보원을 두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 만하면 미리 밟아서 꺼트렸다.

인터넷 신문 <팩트인팩트>의 조진오 기자는 전 직장 동료를 만났다가 그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전 동료가 휴대폰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온 메시지를 얼핏 보게 된 것이다.


‘서문태에 관심을 갖는 자 있으면 알려줄 것’


서문태?

기자들은 감에 민감하다.

뭔가 넝쿨이 잔뜩 딸려 나올 것 같은 작은 이파리를 슬쩍 본 것 같았다.

이 전직 동료라는 인간이 워낙 마당발이고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생겼다 사라지는 소문에 박학다식해 건수 하나 얻으려고 찾아와 만난 것인데 이걸 보자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물론 동료는 술이나 저녁을 얻어먹을 때마다 복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듯 하나씩 던져주긴 했다.

그게 영 쓸모없는 건 아니어서 적어도 몇 시간 정도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기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서문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조진오는 돌아온 동료에게 얻은 소스를 고맙다고 넙죽 받아들고 바로 헤어져서는 서문태에 대해 조사를 했다.

기자라는 짬밥이 모두 똥으로만 나간 것은 아니어서 몇 시간 열심히 인터넷을 뒤진 끝에 그는 서문태와 관련한 사건의 전모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정도는 대박은 아니어도 중박 정도는 칠 수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건 역시 서문태 쪽이 막강한 재력과 숨겨진 힘을 바탕으로 싹싹 지워나간 까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재판 진행 일정을 알아낸 후 굳이 기자라는 티를 내지 않은 채 방청석에 들어와 앉은 것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기 전에 얼핏 보니 검사 쪽의 피해자 여성이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고 그 뒤편에 여자의 가족이나 지인으로 보이는 인물 네 명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는데 이들 네 명 외에는 모두 긴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검사나 변호사야 원래 이게 일상이니 그렇다 쳐도 재판을 받는 가해자들과 피해자 여성, 기타 참관인들 모두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조금은 의외로 여겨졌다.

그렇게 장내를 둘러보는 그의 눈이 마침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는 피해자 여성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빨려들 듯한 눈동자의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평소에도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여성과 눈길이 마주치면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로잡혔다.

누군가 그에게 지금, 그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여자에게 반했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돌아본 백설이에게 있어서는 다른 의미였다.

그리고 조진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 몇 초에 불과한 눈길이 마주친 순간에 자신의 영혼이 털리고 그녀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을.

그건 한편으로는 그가 백설이에게 꽤 쓸모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얼마 후 법복을 입은 판사가 등장하고 그가 자리에 앉아 재판 개시 선언을 함과 동시에 서문태와 두 명의 피고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피고인 인정신문이 있고 검사의 논고와 변호인의 변론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증인으로 나선 피해자가 담담하고 일관성 있게 진술한 반면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간략하고 짧게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증거로 백설이의 병원 치료 기록이 제시되었고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대질신문을 녹화한 영상이 다시 한 번 축약된 내용이 법정에서 상영되었다.

검사가 범죄 사실을 적시하고 그걸 확인할 때 변호인들은 묵묵히 듣기만 했고 변호사가 범죄의 우발적 발발과 주범인 서문태의 인간성에 대해 얘기할 때 검사 또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하는 일도 없고 사실 관계를 다투는 일도 없었다.

조진오는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심리를 지켜보면서 상당히 지루함을 느꼈다.

사실 재판을 재미로 관람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대부분의 재판이 승부를 다투는 경기와 비슷하다 보니 최소한의 흥미는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만큼 제3자가 보기에도 긴장감을 갖게 하며 어느 쪽이 이기는가, 누가 더 정의로운가, 잘 싸우는가 하는 점들은 최소한의 흥미유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이 법정은 그냥 서로가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느낌의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실제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 맞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피해자 쪽만 빼고 가해자와 변호인, 검사, 그리고 판사까지도 한통속이 아닌가 싶었다. 혹시 거액의 위자료를 약속했다면 피해자 또한 거기 포함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흥미가 돋았다.

이대로라면 최종 판결은 벌금형 혹은 징역 1년 이내에서 집행유예 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각종 사건과 사회 문제에 관한 기사는 법정만큼 취재하기 좋은 곳이 없는 까닭에 자주 참관하는 편이고 그 때마다 최종 판결을 예상해 보는 것도 재미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꽤 맞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진행되는 과정이 너무 뻔해서 거의 확신을 가질 만했다.

검사의 구형이 내려졌는데 서문태는 징역 10월, 나머지 두 명은 2년씩이었다.

이어서 변호인의 최후 변론과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이 끝나고 잠시 휴정한 뒤 모두들 뒤숭숭한 얼굴로 판결을 기다렸다.

잠시 후에 돌아온 판사는 자리에 앉아서 법정 안을 한 번 둘러본 다음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사건의 개요와 피고인의 범죄 사실, 증거, 증언 등을 나열하며 유죄임을 확정함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정상참작의 사유들도 적시했다.

곧 이어 김질과 최영만을 한 명씩 불러 일으켜 세웠다.


“피고 김질은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에 처한다.”


땅땅땅.


“피고 최영만은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에 처한다.”


땅땅땅.


“피고 서문태는 징역······.”


-10년에 처한다.


순간적으로 조진오의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

이게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하는 순간 판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10년에 자격정지 10년에 처한다.”


땅땅땅.


순간적으로 법정 안에 숨막힐 듯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모두가 놀라 판사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하는데 판사 또한 당황한 눈에 얼굴빛이 눈에 띄게 굳어져 있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말들은 순간적으로 입에서 나왔을 경우 취소할 수 있다.

대통령의 연설 또한 중간에 딴 소리가 나왔다고 여겨질 때 실언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재판관의 판결 선언은 그럴 수 없다.

판결문에 어떻게 적혀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입으로 나온 말은 그대로 결정된 것이 된다. 속기사에 의해 작성된 결정문은 공식 문서와 같은 효력이 있다.

아무도, 판결을 내린 본인조차도 번복할 수 없다.

모두들 벙찐 가운데 서문태가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소리쳤다.


“뭐야 이거, 거짓말이지? 장난 아냐? 세상에 이런 개 같은 게 어디 있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판사 뭐야, 대답 좀 해 봐. 이 새끼야!”


서문태가 피고석에서 일어서 판사에게 달려들려 하자 건장한 체격의 정리 두 명이 그의 양 팔을 붙잡고 눌러 앉혔다.

앞에 높인 문서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일어서려던 판사 또한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제 자리에 앉아 돌덩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고 서문태는 법정 모독과 난동죄로 징역 5년을 추가한다.”


다시 땅땅땅!


그리고 누가 잡을세라 재빨리 법정을 나가버렸다.

그 뒤통수를 잡아끌듯 서문태의 외마디 고함소리가 들렸다.


“뭐가 10년이고 5년 추가야 이 씨발놈아아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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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징검다리 22.06.08 114 2 10쪽
24 타인의 시선 +1 22.06.06 134 2 9쪽
23 어떻게 싸울까? 22.06.04 126 3 10쪽
22 양동작전 22.06.03 144 3 10쪽
21 유인(誘引) +1 22.06.02 129 3 9쪽
20 체포 22.06.02 136 5 9쪽
19 대질신문 22.06.01 147 3 11쪽
18 재조사 22.05.30 144 3 9쪽
17 읽혀버렸다 +1 22.05.28 166 4 10쪽
16 일진 22.05.26 165 4 9쪽
15 빙의 (憑依) +1 22.05.25 188 3 10쪽
14 교환(交換) +1 22.05.24 171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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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심문(審問) 22.05.23 180 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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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협박 22.05.18 199 4 9쪽
7 확장(擴張) +3 22.05.17 217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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