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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랑스
작품등록일 :
2022.05.13 00:31
최근연재일 :
2022.06.18 17:15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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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33,679

작성
22.05.30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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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재조사

DUMMY

용산경찰서의 베테랑 형사 정기준은 경찰 생활 15년 만에 거의 처음으로 큰 딜레마에 빠졌다.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도 아니고 단지 피해자가 이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관된 사건을 떠맡고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난관에 처한 것이었다.

처음엔 가볍게 넘길 만한 것이어서 같은 팀에게 토스하듯 검찰에 넘겨 버렸는데 상황이 바뀌었다며 재수사 지시가 내려왔고 그 재수사 역시 간단히 진술만 받아 다시 넘기면 되는 것이었다.

한데 거기서부터 막혔다.

진술은커녕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애한테 제대로 수사를 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단순히 야유가 아니었다.

수사 제대로 하라는 야유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짬밥으로 다져진 멘탈이 있었다.

그런데 지시를 받았다.

팀장이나 서장 같은 무시할 수 없는 상사도 아닌데 상사의 말보다 더 큰 무게로 말이다.

관례에 따라 무시해 봤더니 점점 더 알 수 없는 압박이 느껴졌다.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혹은 잠을 잘 때도 여지없이 그를 짓눌렀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을 때 느끼는 부담감, 학교에 다닐 때 숙제를 안 하고 미룰 때 느꼈던 그런 압박감이있다.

그래서 그는 유치장에 있는 김질과 최영만을 다시 불러 심문을 시작했다.

수사 관련 서류철을 앞에 두고 한 명씩 철저하게.

우선 김질을 먼저 불러왔다.


“그날 바닷가에서 두 남녀가 데이트하는 걸 보고 장난삼아 건드려 봤다고?”

“그렇습니다.”

“그게 몇 신데?”

“오후 네 시쯤 되었을 겁니다.”

“강원도 K경찰서에서 진술한 것과는 다른데?”

“그 때는 착오가 있어 잘못 말한 겁니다.”

“정말 서문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 대로입니다. 그 전에는 이름이나 얼굴을 알지도 못했고 그 이후 체포된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동해안에는 왜 간 거야?”

“회사에서 휴가를 얻어 동료와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다 늦은 가을에 휴가를 얻어?”

“몇 년째 쉴 틈이 없었거든요.”

“회사가 어디라고?”

“청담동 한일회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일회관이면 유명한 음식점 같은데, 거기서 네가 할 일이 뭐 있다고? 조폭이 말이야.”


한일회관은 고급음식점이었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요정(料亭)인 셈이었다.

한일호텔 및 그 지하의 클럽과 나이트가 한 블록 안에 들어있어 하룻밤에 수백만 원은 가볍게 쓸 수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요정은 대기업 임원이나 고관 이상이 예약을 해야 이용할 수 있는데 비밀 유지에 워낙 철저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스캔들에 거론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조폭 아닙니다.”

“그럼?”

“그냥 평범한 직원입니다, 손님 안내를 담당하는.”

“거기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끗발 있는 양반들이라던데 안내를 하면서 안면을 익혔나봐. 이렇게 당당한 거 보면.”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냥 신발이나 정리해 주는 따까리일 뿐입니다.”

“에이, 선수끼리 이거 왜 이래. 당신 경력이 남들 뒤처리나 해 줄 정도로 얄팍하지 않다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자 봅시다, 3년 전 신림동 노숙자 살인사건에 용의자로 올라서도 쫄따구를 대신 밀어 넣고 빠져나올 정도로 무게가 있었잖아. 그런 사람이 이런 하찮은 일에 휘말려 유치장에 갇혀 있다니 영 가오가 안 서는 거 아냐?”

“그 때는 술김에 예쁜 여자를 보고 혹했던 거 같습니다. 술 먹으면 남자들 개가 되는 거 흔하잖아요.”

“그런데 당신들 진술과 피해자의 얘기가 백팔십도 다르니까 문제지. 대질이라도 시켜야 하나?”

“제발 좀 그렇게 해 주십시오.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면 피해자분도 제대로 말하겠지요.”


김질이 워낙 당당하게 하소연하자 정기준은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믿을 뻔했다.

대질을 시켜달라는 말은 최영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이 어린 아가씨라고 만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책상을 앞에 두고 눈 한 번 부라리면 겁에 질려 하자는 대로 다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조폭들이 경찰 앞에서야 순한 양처럼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난폭한 늑대이기도 하니까.

그는 의자를 비뚜름히 돌리며 휴대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앞에 앉은 피의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대질신문을 해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어 보였다.


“여보세요?”


여자애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용산경찰서 정기준입니다. 백설이 씨 사건 피의자 두 사람이 그쪽과 대질을 원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해야죠. 언제 가면 돼요?”


이것 봐라?

서로가 직접 보겠다고 한다.

원래 범죄자와 피해자는, 특히 성범죄에 있어서는 직접 대면을 안 하는 편이다.

한 번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는 그 경험을 바로 떠올리게 되기 때문에 심리적 고통이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래서 정신과 상담의들도 대질신문에 의한 수사는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럼없이 만나러 오겠다니.


“가능한 빨리 오셨으면 합니다.”

“그럼 지금 갈게요. 택시 타면 15분이면 가니까 적어도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거예요.”


전광석화 같다.

백설이가 바로 온다고 하니 그는 긴장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에 굴복했든 다시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니까.

증인이나 피해자가 경찰서에 출두해 진술을 할 때는 담당 형사의 책상 앞에서 할 수도 있고 독립된 공간, 그러니까 조사실 같은 곳에서 할 수도 있다.

다만 타인의 시선이 차단된 방에서 할 때는 녹화장비가 있어 인물들의 행동을 녹화해야 한다. 증언을 공식적인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서라면 음성 녹음까지 더하면서 제3자의 입회하에 진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질신문을 하게 될 경우에 마주보는 경계에 투명, 혹은 불투명 칸막이를 설치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모든 장비가 다 필요한지 애매해졌다.

피해자인 백설이가 선뜻 하겠다고 나섰으니 다 필요 없을 듯하지만 우선은 갖춰놓는 게 뒷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직속상관인 강력팀장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뭐라고, 강원도 성폭행 피해자가 직접 대질신문을 위해 오겠다고?”


형사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예.”

“저번에 왔던 그 아가씨냐?”

“예, 맞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것치고는 너무 멀쩡한 것 같았는데······.”

“실제로 당하지는 않고 당하기 직전에 정의의 흑기사가 나타나 범인들을 물리치고 구해서 병원에 데려다 줬다고 합니다.”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사건이 이곳으로 이관될 때 받아서 대충이나마 살펴보고 자신에게 넘겼으니 버젓이 알 터인데 모르는 척하는 걸 보면 팀장도 보통 의뭉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조사실에서 따로 신문을 했으면 하는데 장비가 갖춰진 곳이 있을까요?”

“······뭐 말 나오지 않게 하려면 제대로 갖춰놓고 하는 게 좋지. 칸막이와 녹화장비 다 있어야지?”

“그러면 좋죠.”

“알았어. 내가 알아보지.”


그러면서 팀장은 내선 전화로 관리과에 사용할 수 있는 방을 수소문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고간 후 팀장이 말했다.


“4호실 사용 가능하다는군.”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정기준은 조사실로 가 탁자와 의자, 그리고 카메라 장비 등을 부하직원과 함께 정비했다.


“형님, 누가 오는데 이렇게 에프엠으로 준비하는 겁니까?”

“아 있어.”


부사수인 한창길이 묻자 정기준은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증인이나 피의자가 조사를 받으러 올 때 이 정도로 준비를 하는 건 깐깐한 변호인단을 대동한 상당한 거물급이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정기준이 맡은 사건들에 그럴 만한 인물들은 없었으니 한창길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녹화 내용을 바로 증거물로 채택해야 하거든.”

“아, 예.”


그 뒤에 범인 김질과 최영만을 수갑을 채워 4호실에 데려다 앉히자 곧 백설이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사무실에 있는 수십 명의 시선이 그리로 모였다.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경찰서 형사과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조사를 받으러 온 피의자, 증인, 청소부까지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의 이동을 따라갔다.

그러므로 책상 위의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대고 있던 정기준도 당사자가 접근하기 훨씬 전부터 그녀의 출현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서 집기를 옮기던 한창길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고 그녀가 정기준을 향해 똑바로 가자 조사실을 준비한 이유가 이 여성이었나 생각하며 눈이 둥그레졌다.

반바지 미니정장 차림의 투피스를 입은 백설이가 뚜벅뚜벅 걸어와 정기준의 책상 앞에 섰다.

그 모습은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게 아름답고 세련되었다.

정기준은 벌떡 일어서서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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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타인의 시선 +1 22.06.06 134 2 9쪽
23 어떻게 싸울까? 22.06.04 126 3 10쪽
22 양동작전 22.06.03 143 3 10쪽
21 유인(誘引) +1 22.06.02 129 3 9쪽
20 체포 22.06.02 136 5 9쪽
19 대질신문 22.06.01 147 3 11쪽
» 재조사 22.05.30 144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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