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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SF

디페랑스
작품등록일 :
2022.05.13 00:31
최근연재일 :
2022.06.18 17:15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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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4
추천수 :
138
글자수 :
133,679

작성
22.05.1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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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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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천기영은 눈을 떴다.

물론 얼굴에 있는 눈은 아니었다.

마음의 눈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이 눈을 감아도 사물이 보이는 것은 머릿속에 이미 상(象)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심상(心象), 곧 이미지라고 한다.

그것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어떤 형상이 그려졌다가도 바로 흐트러지고 지워진다.

여기까지는 모든 사람이 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는······.


-보여요?


그는 바로 옆에서, 혹은 머리 위나 발아래 저 밑바닥 어느 곳에선가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방.

확실히 여자의 방이라는 걸 알 수가 있는 깨끗하고 정갈한 침대와 옷장, 책장 및 탁자가 있는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그가 고개를 움직여 본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카메라를 이동하며 보여주는 모습을 수동적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이게······.

-여자의 방은 처음인가요?

-아니, 누나가 있어 처음은 아닌데······.


낯선 남의 방 안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눈, 그 방 주인의 눈을 통해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제가 설이 씨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건가 보네요. 신기하면서 또 떨리고 두려운 마음도 있어요.

-아, 그건 제가 더 커야 되는 거 같은데······.

-실제로는 안 그런가요?

-신기하고 떨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커요. 뭐랄까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요. 그러니까 신나는 것도 있고.

-어쩌면 설이 씨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까닭인지도 모르겠어요.

-기영 씨는 그런 느낌 없어요?

-저도 물론 흥분된 느낌은 있죠.

-어쨌든 저는 처음 만나는데도 기영 씨가 무척 가까운 것 같아요.

-예.

-그게 다예요?

-아니 뭐, 저도······.

-하하, 장난이었어요.


천기영이 당황하자 백설이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휑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있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느낌에 그녀는 당황했다.

가 버렸나?

기분이 상해서 그런 걸까?




아야.

기영은 뒤통수를 만지며 뒤돌아섰다.

돌아보니 야릇한 표정을 한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어디 아프니?”


누나 수영이었다.

그보다 세 살이 많은 누나로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며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벌써 누나가 퇴근해 올 시간인가?


“벌써 퇴근했어?”

“벌써라니 이 녀석아, 일곱 시가 넘었는데. 그런데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왜?”

“사람이 들어오는데도 모르고 혼자서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고,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거실을 계속 서성거리며 또 중얼거리고······. 얘가 야구를 못하게 되어 머리가 이상해졌나 싶어 가슴이 덜컥했잖아.”

“내가 혼자서 중얼거렸어?”

“그래 이 자식아! 네가 잘못됐으면 엄마 아빠를 어떻게 보고 또 내 심정은 어떻겠니? 빨리 떨어진 간이나 주워와!”


누나가 주먹질을 하자 그는 두 팔로 얼굴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동전이라도 찾듯 거실 구석구석을 뒤지다 냉큼 간을 집어들어 누나에게 다가갔다.


“자, 간 여기 있어. 내가 끼워줄 테니까 기다려 봐.”


동생이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쥐려 하자 그녀는 질색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도망갔다.

어쨌든 그렇게 물리친 덕분에 자신의 이상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릴 때는 남매간에 스킨십을 곧잘 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뜸해지다가 이젠 아예 없어져버렸다.

그게 당연한 과정인지 모르지만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몇 시간이나 지났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구해 준 백설이가 갑자기 머릿속을 두드리며 그 존재를 드러내자 그는 너무 놀라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열흘쯤 전 해변을 산책하다가 누군가의 구조 신호를 접하고 달려갔을 때에는 위험에 처한 여자를 구하는 것만 신경 썼지 구해달라는 외침을 어떤 채널로 수신하게 되었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를 구해서 병원에 데리고 갈 때도 입이 막혀있어 소리를 낼 수 없는데도 그녀의 구조 신호를 들은 것은 우연이거나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마치 머리 위로 번개를 맞은 것과 같은.

또는 그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를테면 육체를 이탈한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을 들었거나.

그러니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상을 겪었다 해도 위급한 상황에서 한 번 일어난 일이니 대충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때와 똑 같은 일이 정확하게 반복되었다.

이제는 우연이 아닌 사건이 되는 셈이다.

그 이후로 놀라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백설이가 그의 마음속으로, 혹은 머릿속인지, 들어와 자신과 같은 걸 보고 들었다. 반대로 그가 그녀에게 들어가 같은 현상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제, 이것은 그와 백설이 둘만이 가능한 일인가?


그 때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누나가 그를 보며 말했다.


“너 괜찮은 거지?”

“그럼.”

“혼자 여행 가서 다 잘 털어버리고 왔어?”

“다 털면 너무 허전하잖아. 지금까지 10년 이상 내 삶의 중심이었는데 그게 갑자기 부러졌다고 해 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잖아.”

“그래. 맞는 말이다. 야구를 다시는 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하려고 하면 취미로도 가능하잖아. 운이 좋아 빨리 완치되면 바로 재기할 수도 있으니. 그리고 말이다, 설령 못 한다고 해도 네 또래의 친구들 다 가는 군대 면제에 매달 연금 나오고······. 와, 많이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평생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얘기잖아.”

“하하, 다 알거든.”

“그러니까 누구 앞에서도 죽는 소리 하지 마라. 괜히 처맞을지 몰라.”


기영은 다시 어린 동생을 둔 직장인 누나의 모드로 진지하게 말하는 천수영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을 알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수영은 동생이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자 이게 뭔가? 싶은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역시 안 되나?

전에도 이런 식의 눈싸움은 간혹 한 적이 있었으니 아주 어색한 건 아니었다.

에이 졌다!

항복의 표시로 한 손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입을 꾹 다문 누나의 목소리가 머리를 관통했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아무래도 이상한 걸.


들렸다.


* * *


백설이는 천기영이 자신의 곁에서, 혹은 안에서 사라지자 의아했지만 다시 찾아가 얘기를 더 나누거나 노닥거릴 여유가 없었다.

천기영이 외부의 물리적인 힘에 의해 그녀와의 연결을 끊어버린 것처럼 설이도 그가 사라지자마자 몸부림을 치는 휴대전화를 켤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아니 왜 전화를 안 받아? 엄마 심장마비에 걸리는 줄 알았잖아.”

“아 미안, 엄마.”


수화기를 들자마자 큰 소리로 야단을 치는 엄마 양혜련 여사의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떼어 놓았다.


“병원엔 왜 안 가고? 못 가면 못 간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하든지.”

“아 정말 죄송해요. 조금 피곤해서 잔다는 게 이렇게 시간이 지난 줄 몰랐어.”

“정말 별 일 없는 거야?”

“예, 아무 일 없어요.”


그러면서 통화 목록을 슬쩍 살펴보니 전화와 문자 연락이 각각 열 개 정도가 되었다.

가만 있자, 시간이?

저녁 일곱 시였다.

천기영과 잠깐 접촉한 것 같은데 서너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느라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엄마 그런데 왜 아직 안 들어와?”

“모임 있다고 했잖아.”

“아 그랬지. 그럼 언제 들어와?”

“한 시간쯤 뒤에 모임 끝나면 바로 들어갈 거야.”

“그럼 두 시간 뒤겠네?”

“그래. 혼자서 저녁 챙겨먹고······아빠는 아직이지?”

“오늘 늦게 나가셨는걸.”

“그러니? 하여튼 빨리 들어갈게.”


그 말을 듣자 문득 넓은 집에 혼자 있다는 느낌에 가슴이 약간 서늘해졌다.

중견 기업의 임원인 아빠와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인 엄마.

양친이 모두 바쁜 전문직 직장인이다 보니 그녀는 어릴 때부터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았다.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외박을 하는 경우도 있어 그 넓은 집에서 혼자 밤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친구를 많이 사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연애 또한 극히 드물어 외로움에는 아주 익숙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큰일을 당하고 나자 새삼스럽게 오싹한 느낌이 엄습했다.

천기영과 이야기를 나눌 때 누군가와 함께 있고 든든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걸 놓치기 싫었다.

엄마와의 통화를 끝낸 후 그녀에게 연락 온 목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엄마가 전화와 문자를 각각 두어 차례씩 한 걸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전에 병원에서 예약 확인 문자와 전화 한 번이 왔었는데 그녀에게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보호자인 엄마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졸업여행을 같이 갔던 친구 수경이 전화와 문자를 한 번씩 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걱정하는 문자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자가 그 모든 걸 싸늘하게 바꿔버렸다.


[오늘은 병원에 안 갔네? ㅋㅋ]


번호는 발신자 표지 제한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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