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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랑스
작품등록일 :
2022.05.13 00:31
최근연재일 :
2022.06.18 17:15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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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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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33,679

작성
22.05.2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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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심문(審問)

DUMMY

용산 경찰서의 형사 정기준은 경찰 생활 15년의 베테랑이었다.

일찍 군대에 다녀온 후 경찰에 입문해 수많은 사건을 맡았고 그 중에서 상당수를 해결했다.

형사과의 형사팀 안에서도 서열이 꽤 높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래서 동해안에서 젊은 여성이 성폭행 미수 및 폭행 피해를 입은 사건이 이관되어 자신에게 배당되었을 때도 왜 이 정도의 사건을 내게? 하며 상당한 불만을 내보였다.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일반 폭행에 이른 사건이라면 형사팀보다는 생활범죄 수사팀이이나, 오히려 여성청소년과에 배당이 되어야 옳았다.

아무래도 사건을 이관 받은 위에서 아무데나 홱 던진 것 같았다.

아니면 맡고 있는 업무가 가장 적은 직원을 찍어서 내려 보냈든지.

어쨌거나 그런 불만을 갖고 있었기에 K 시의 K 경찰서에서 보낸 수사 자료를 대충대충 검토하고 사인을 한 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보낸 것이었다.

물론 말이 대충대충이지 경찰 짬밥 15년이면 슬쩍 핵심만 훑어도 사건의 전모는 다 파악하기 마련이었다.

같이 이감되어 온 피의자들도 만나봤다.

폭행 피의자인 김질과 최영만은 조폭답지 않게 순순히 혐의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주범인 서문태의 폭행 가담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문제는 서문태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는 K경찰서 수사에서도 한 번 조사를 받은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고 그 뒤로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그럴 수 있나 싶어 알아보니 강남 일대의 큰손이자 지하경제의 황제라 할 수 있는 유성캐피털 회장의 아들이었다.

강남쪽 동료들에게 슬쩍 알아보니 유성캐피털은 강남을 비롯해 서울과 경기권에 있는 수백, 수천 유흥업소의 돈줄을 쥐고 있는 전주였다.

호텔과 모텔, 룸살롱, 오락실, 술집, 고급 요정 등 해가 진 후에 문을 여는 업소들은 대부분 유성캐피털에서 자금을 빌리거나 지분을 내 주고 있었다.

세무서에 보고되는 원 장부보다 몇 배, 혹은 수십 배의 자금이 회장의 손바닥에서 굴러다닌다는 얘기였다.

매 정권마다 하는 세무조사를 피하는 이유도 간단했다.

정권의 실세나 실무자나 모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정기준은 이 사건이 자신에게 배당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변호인단의 뜻에 따라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관료 조직에 오래 있다 보면 어떤 일이든 ‘외부’와 ‘윗선’의 뜻이 강하게 전달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의욕이 과한 신참들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정석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의감이나 확실한 직업의식이라기보다는 윗선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이전의 수사보고서를 거의 변경하지 않은 채 검사에게 올려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재수사 명령이 내려왔다.

피의자요 폭행의 주범으로 적시되었던 서문태가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폭행의 피해자라는 증거 자료와 함께.

그걸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역시 애초의 피해자였던 백설이를 불러 이전 진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아야 했다.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으니 오직 피해자 진술에만 의지한 기존의 수사 결과는 바뀌어야 할 터이다.

자신의 15년 경력이면 경찰서라고는 구경도 못한 어린 여자애 하나쯤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며 전화를 걸었고 이제 그녀가 경찰서에 출두했다.


처음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정기준은 조금 놀랐다.

이제까지 그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몸매와 얼굴, 그리고 빨려 들어갈 듯한 눈동자, 오뚝한 콧날과 비단별 같은 긴 머리카락 등.

TV 화면이나 스크린에서 본 모든 사람이 다 예쁘다고 하는 연예인을 실제로 본들 눈앞에 있는 졸업 예정의 여대생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서문태 같은 거물의 아들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었겠지.

보통 빼어난 미모의 연예인이나 인터넷 스타를 여신이니 천사니 칭하는데 백설이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이제 그런 아가씨를 몰아붙여야 하는데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는 그녀를 맞았다.


“거기 앉아요.”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좋은 장소나 아무도 없는 조사실에서 신문을 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어쩐지 특혜를 주는 것 같고 한편 사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여 자신의 책상 건너편 의자에 앉도록 했다.

그녀가 사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담당자인 정기준의 앞에 선 뒤에도 그들의 시선은 완전히 거두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와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백설이와 독방에서 면담을 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된다.


“검찰청에서 검사님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고 들었는데?”

“예.”


그녀가 대답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모습조차 매력적이어서 그는 표정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의자로 지목된 서문태 씨와 통화하고 문자를 나눈 사실을 인정합니까?”

“아뇨.”


백설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


그는 통신사에서 제공한 통화내역이 적힌 문서를 그녀에게 흔들어 보여 주었다.


“그런 증거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조작할 수 있다······. 아가씨가 함부로 무서운 말을 하네. 무고죄가 가벼운 게 아니에요”

“제가 누굴 무고할 사람으로 보이나요?”


그녀가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를 마주본 순간 그는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두근두근.

원래 미인과 마주보면 이렇게 되는 건가 싶었다.


“사람은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법이오.”

“아니요, 전 알 수 있어요.”


다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고 그녀의 보석 같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에 찬 강렬한 눈빛을 보면 어느 누구도 그녀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할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게 만드는 미모와 눈동자라. 이런 무기가 있다면 자신의 강력팀은 국내, 아니 세게 최고의 수사기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을 쫓으며 혼미한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백설이 씨의 진술밖에는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게 없어요.”

“몸에 난 상처도 있죠. 치료를 받았던 기록과 머리와 팔, 가슴뼈 등을 수술 받았던 기록들. 그리고 제가 그렸던 범인들의 모습들. 그건 다 보셨어요?”

“아, 물론······.”

“제대로 안 봤군요. 범인들에 대한 심문은 제대로 했어요?”

“······예.”

“그것도 제대로 안 했네요. 더구나 주범인 서문태는 만나보지도 않았고.”


헉!

하나하나 들이대며 몰아붙이는 그녀를 보며 정기준은 이마와 목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상대를 심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심문을 받고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대학생이라더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는 자신에게 전화를 해 준 검찰청 수사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조사실에 불려 와서 바들바들 떨며 아무 소리도 못하는 걸 보니 어린 새 같았다니까. 그렇게 예쁜 아가씨가 말이오. 그러니까 정 형사님은 너무 윽박지르지 말고 살살 달래서 진술을 받아내도록 해요. 요즘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에게 2차 피해를 입었다고 뉴스에도 자주 나오잖아요.’


윽박지르기는 개뿔, 내가 당하고 있다니까.


아무리 상대의 말이 논리에 맞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적이 없었다.

넘겨받은 사건을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은 건 어떻게 알고?

그냥 넘겨짚은 거라면 그야말로 15년 경력의 자신에 못지않은 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노련한 수사관들은 피의자를 앞에 두고 자백을 받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한다. 일차적으로 그들의 진술을 토대로 앞뒤의 어긋나는 부분과 논리에 맞지 않는 걸 지적하는 것부터 근엄함 혹은 무표정함으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 좋은 경찰과 나쁜 경찰 역할, 회유와 협박 등.

때로는 성우 못지않은 여러 억양의 목소리로 용의자를 어르고 달래는 것도 예사다.

한데 백설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었다.


“경찰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안 하면 안 되겠죠?”


이번에는 고저 없이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약간은 상냥하게 초등학생에게 이르듯이 말하자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일단 유치장에 잡혀 있는 범인들을 다시 제대로 심문하고 밖에 있는 서문태도 잡아들여 심문해요. 제 휴대폰을 가져다 어떻게 조작을 했는지 말이에요.”

“예, 알았습니다.”


그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이 장면을 누가 보고 듣는지 걱정스러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24시간 녹화하고 있는 CCTV는 다행히 소리를 녹음하지는 않았다.


“혹시 대질신문 같은 거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바로 달려올 테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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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양동작전 22.06.03 143 3 10쪽
21 유인(誘引) +1 22.06.02 129 3 9쪽
20 체포 22.06.02 136 5 9쪽
19 대질신문 22.06.01 146 3 11쪽
18 재조사 22.05.30 143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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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변보호 22.05.19 184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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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보세요 / 누구세요? 22.05.15 253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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