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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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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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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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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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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멸의 비애 (8)

DUMMY

이찬이 주저없이 태극별관의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텅!


이찬의 앞에 별안간 결계가 생성되며 이찬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처용의 것이었다.


“무슨 소립니까?”


[저것은··· ··· 성주 따위로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건 신입니다.]


처용도 이찬과 비슷한 감각을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이찬은 덤덤했다.

이미 모든 것이 예상 범주 내였다. 옥황상제가 유지하던 결계가 사라져 나타날 적이 하나가 아님을, 백호를 노리는 이가 하나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


처용과 이찬이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 일행들이 별관의 로비에 등장했다.


[저게 대체 뭐냐··· ···?]

[신이다··· ···.]


우사와 운사의 감상이 다시 한번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었다.

이찬은 여전히 굽히지 않았다.


“열어 주십시오.”


처용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이찬의 목소리가 둔중한 신언으로 바뀌며 장내의 모두를 압도했다.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문전신 처용의 주 사용 격이자 가장 웅장한 위엄을 가진 격 수호신 「신도울루」가 큰 타격을 입었기에 처용의 결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쩌저적!


말이 씨가 되듯, 정면의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니, 깨지거나 파괴되기보단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이찬은 스스로 처용의 그것을 부쉈다.


쿠구구구구!


[안에 계십시오. 열기가 내부로 들어오지 않게 조절해 주시고요.]


이찬은 그 말을 끝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스으윽.


조심조심 열에 녹지 않으려 이동하는 이찬의 눈앞에 마치 지옥도가 연상되는 절경이 펼쳐졌다.

싸우다 죽은 이들의 시체가 활활 불타 녹아내렸다. 원형태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땅에 기생하는 풀들은 이미 정체성을 잃었고, 돌과 흙은 진득했다.


[지옥도가 따로 없네.]


그럼에도 이찬은 앞으로 나아갔다.

진득해진 땅이 이찬의 걸음을 방해했다. 신발의 겉창에 달라붙은 흙들이 그곳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자연의 경고였다. 하지만 이찬에게 자연은 지켜야 할 존재지, 지킴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흙의 경고를 무시하고 나아간 앞에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도, 영혼도, 성주도 아니었다.

세계의 끝에 가장 가까운, 그 편린을 볼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진짜 신이었다. 현 <올림포스> 최고신, 태양의 신이라 불리는 아폴론이었다.


[너는··· ··· 너무 큰 변수다.]

[변수라니. 정직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말이네.]


그때, 이찬의 마음을 읽은 것인가 옥황상제의 시스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예상하지 못 한 것이 방문한 것 같은데,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 말에 이찬은 과감히 답했다. 고민할 필요조차 없던 탓이었다.


[계획의 일부입니다. 지켜보고 계시죠.]


옥황상제의 메시지 뒤로 다른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지만, 따로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이찬은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고, 수없이 오랜 세월을 견뎠다. 그의 칼집에서 기도가 ‘스르릉’ 검명을 토해내며 뽑혔다.

아직 이야기를 하지 못해 그런 것이지만 이찬이 견딘 시간은 겨우 2년이 아니다.


[할 얘기가 많은데, 분위기를 다 망쳤다.]


이찬의 격이 기저 없이 발현되었다.

말 그대로 뿌리 없는 격이었다. 근원을 알기엔 너무 멀리 왔고, 탓을 하기엔 오랜 시간이 지났다.


[행동자는 출몰하는 즉시 사살했다지?]


이찬의 기도가 우렁차게 울었다.


[넌 실수한 거야. 내가 등장하자마자 죽였어야지.]


아폴론이 천천히 이찬을 아래로 응시했다.


[흥미가 갔다. 그뿐.]

[오만하다.]


늘 이찬의 곁을 지켜 주었던 전격이 퇴출되듯 발현되었고, 그 뒤로는 지금 《관념》에서 처음 발현하는 격이 잇따랐다.


[고유격 발현. 「경계」.]


그의 뒤로 아득한 세월이 드러났다.


[경계. 내가 수련한 곳의 이름이지.]


이찬은 아득한 세월 동안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그가 흘린 땀은 강이 되었고, 그가 떨어뜨린 살점은 산이 되었다.


[이래도 성지화는 멀었단 말인가.]


이찬의 아득한 세월이 속삭이고 있었다.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가 상대할 것은 저것보다 훨씬 멀리에 존재한다고.

그랬기에 이찬은 두렵지 않았다.


콰아아앙!


땅껍질이 굉음을 쏟아내며 주변으로 튀었다.


철퍽!


녹아 버렸기에 꽤나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쿠우우웅!


이찬의 기도와 아폴론의 손아귀가 충돌했다.


[겨우 이 정도로··· ··· 초월을 자처하는가.]


아폴론의 엉겨붙은 신언이 이찬의 귀로 흘렀다.

<태극>에서 가장 허용 상상력이 많다고 여겨지는 장소인 태극본성에서도 아폴론의 온전한 신언을 감당하기엔 벅찼다.


[고유격 발현. 「인과 관여」.]


이어진 이찬의 격이 그 ‘아폴론’마저 당황시켰다.


끄르르륵.


땅에서 하나의 인영이 솟아나더니 아폴론을 향해 돌격한 것이다.


카아아앙!


어쩔 수 없이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그것의 검을 막아냈다.


[이건 뭐지··· ···.]

[뭐긴. 너 잡을 최종 병기지.]


그것을 본 별관 속 일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건!]


어떻게 저것을 잊으랴.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존재가 이번엔 그들의 적과 맞서고 있었다.


주르륵.


하지만 그것의 단단한 갑피도 결국 아폴론의 열기를 견디지 못했다.


[고유격 발현. 「전신(電神)의 잔재」.]


키트리노스의 고유격, 천둥의 신을 기리는 그 격이 이찬의 왼손에서 발현되어 아폴론의 좌완을 강타했다.

덕분에 그 망인의 검을 억제하던 쪽에 힘이 빠지게 되었고, 영리한 망인은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


촤아악!


순식간에 아폴론의 허리에 긴 자상을 남긴 망인이 이어 타격을 가하려는 순간.


콰아아앙!


별안간 아폴론의 왼 주먹이 망인의 복부에 꽂히며 그의 갑옷이 찌그러졌다.


[쳇.]


혀를 찬 이찬이 격을 해제했고, 그에 따라 망인은 사라졌다.


[큰 타격은 못 입힐 것 같았어.]


이찬은 계속해서 아폴론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상상력을 계속해서 소모시키려는 의도였다.


[흐앗!]


이찬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동시에 수 개의 인영을 분산했다.

그 인영은 모두 손에 기도를 들고 있었다.


[고유격 발현. 「풍화」.]


드디어 극에 달한 이찬의 풍화가 여과없이 자신의 위엄을 드러냈다.


촤자자자작!


열 개가 넘은 기도가 동시에 아폴론을 향했고, 실제로 그만한 위력을 모두가 기대했지만, 아폴론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파앙!


가벼운 공기포에 모든 이찬의 인영이 소멸했다.


[잔재주다.]


이찬에게 승산은 없어 보였다.

두렵지 않은 것이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간과한 것.

이찬은 이 전투에서 이기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아폴론과 거리를 좁힌 이찬이 녹아가는 자신의 피부를 붙들어가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날 죽이러 온 게 아닌 걸 안다.]


아폴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무엇 때문이지?]

[네 격엔 적의도 살의도, 심지어는 악의도 없다. 넌 날 죽이려면 단번에 도륙 낼 수 있었어. 내가 별관에서 나오던 그 순간에 말이야.]


이찬이 씨익 웃었다.


[게다가 이게 네 본체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그제서야 아폴론은 흥미가 생긴 듯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아마 경고 차원이겠지. 넌 내 성장세를 어느 정도 유추했고, 그랬기에 다른 이들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위협이 되지 않을 것. 그것마저 예측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정확하군.]

[그러니까 조금 기다려라. 내 노력의 결실을, 너는 반의 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이찬은 아폴론에게 경고하듯 속삭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너희 성단에게 어마어마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넌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의 일에 관여해 왔다. 이젠 신물이 날 지경이야.]


이찬의 뒤로 무수한 형상이 겹쳐 보였다. 격을 내어준 이들, 아예 모두를 내 준 이들의 모습이 이찬의 모습을 투영했다.

그때 아폴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유여(有餘)하군.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겠지.]

[뭐?]

[난 ‘경계’의 존재를 알고 있다. 나도 그곳에 갔었으니까.]


이찬의 동공이 옅게 흔들렸다.

한층 안정된 아폴론의 신언이 행성 전체를 울렸다.


[네가 말했듯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흥미가 붙었다. 네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이찬은 다시 한번 기도를 그러쥐었다.


[나를 유희거리로 만들지 마.]

[글쎄. 그건 네 선택이 아니다. 운명이지.]


이찬의 기도가 횡으로 세차게 그어지며 아폴론의 목을 향했다.

피할 수 없는 궤적이었다. 아폴론이 피할 수 없어 피하지 못했는지, 피하지 않은 건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으리라.

목에 기도가 닿기 직전 아폴론은 이찬에게 나지막이 조소하듯 말했다.


[지금쯤이면 《현실》에도 꽤나 재미있는 일들이 발생하겠군.]


이찬의 기도가 아폴론의 목을 쳤다.

기도에 묻은 피와 솟구치는 뜨거운 핏물이 이찬을 한껏 적셨다.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더한 충격이 있었을 뿐이었다. 머리에 피가 뒤집힌 것보다 더 큰 충격이.


[이찬!]


그를 부르며 곁으로 다가온 우사가 수고의 말을 건넸지만 이찬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급히 시스템 메시지 창을 켠 이찬이 당황했다. 메시지의 발신자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찬 도■줘. ■기 ■가 ■■.]

[발신자 명: 임■윤.]


당황이라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이해되지 않고, 적응하기 힘들었다.

중앙이 가려진 발신자 명이었지만, 그 정도의 정보라면 충분했다.


“이도오오옹!”


이찬의 당황 섞인 절규가 행성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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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대멸종 (8) 24.07.31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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