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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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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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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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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3)

DUMMY

날아드는 리의 일격을 유유히 흘려보내며 이찬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실 호칭에 대한 논쟁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그’ 보편적으로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녀’ 보편적으로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두 호칭에 제한되지 않는 생명체는 잘 없다. 어떤 생명체라 한들 암과 수의 구분은 존재하는 법이고, 그것이 어떤 생명체가 되었든 구분은 지을 수 있기 마련이다.

허나 지금 이찬과 대립하는 존재는 무어라 지칭하기 애매했다.


“호랑이?”


호랑이. 우리 말로는 범. 이매망량 중 리(魑)는 범의 형상을 한 귀신이었다.


“두억시니가 잘도 네놈들을 넷으로 쪼갰네.”


[그··· ···분을 욕보이지··· ···마··· ···라.]


어설프고 낯선 신언.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온 악귀가 지껄일 법한 우매하고 저속한 신언에 이찬은 기가 찼다.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군.”


이찬이 격을 끌어올렸다.

풍백의 바람의 격, 광개토대왕의 웅혼한 격, 헤카테에게 전수받은 어마무시한 혼돈의 격, 무디트의 걷잡을 수 없이 거센 격, 뉴턴의 지적이고 침착한 격까지.

무수한 격들이 충돌하고 타협하며 ‘이찬’이라 불리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었다.

마치 ‘이찬’이라는 백지에 하나하나 글자를 채워가는 것만 같았다. 살아 숨쉬는 글자가 이찬을 채워 나갔고, 그렇게 채워진 백지는 이찬이 저술한 수기이자 소설이 되었다.


[나를 상대하려면, 너 같은 놈들이 서른은 넘게 있어야 할 것이다.]


이찬은 야철신이 선물하고 마철이 수리한 검, ‘기도’를 손에 꾹 쥐었다.

정면을 응시해 리를 바라본 이찬이 단 한 발자국을 내딛은 순간.


휘리리릭!


나무의 뿌리 같은 것들이 이찬의 팔과 다리를 묶고 이내 전신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쿠구국··· ···.


그것은 불가항력으로 이찬의 몸에 작용했다. 어떤 격을 발현해도 이찬은 뿌리의 구속을 벗어날 수 없었다.

조소하는 소리와 함께 이찬의 앞으로 리가 다가왔다.


[방심··· ···은 금··· ···물.]


리는 이 웃음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내뱉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일소를 뱉아냈다.


[여기··· ···는 내 성지(聖地). 산군에게··· ···예를 보여라.]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차단되다시피 했고, 어렴풋이 들려오는 청각을 제외하고는 감각이 전부 마비되었다.

뿌리가 서서히 움직이며 이찬의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찬은 리에 고개를 조아리고 만 것이다.


[꼴이 좋구나, 행동자여.]


리의 성지가 지천에 깔렸기 때문일까, 점점 리에 할당된 허용 상상력이 증가하며 그의 신언이 능숙해지고 있었다. 이어 리가 앞발을 들자 날카로운 발톱이 멈출 줄 모르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울버린이냐?”


입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찬은 리의 정신을 헤집었다.


[어딜 그런 아류를··· ···!]


리의 발톱이 이찬을 그어내려는 순간.


“으아아아아!”


이찬의 어렴풋한 청각으로 거세게 꽂히는 비명. 아니, 처절한 각오가 이찬을 스쳐 이찬의 앞에 있는 이를 향했다.

날카로운 형체의 도구가 생명체의 살점을 파고드는 끔찍하고도 적응할 수 없는 소리가 이찬의 귀에 때려 박혔다.

그리고 이어 들리는 곁으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 또 이어진 함성.


“가장 약한 호랑이’시여. 부디 독실한 신도들을 굽어살피시어 미약하여도, 대단하지 않아도 좋으니 가호(加護)를 선사해 주실 것을 간청 드리옵니다.”


[같잖은 수작을.]


리(魑)의 포효가 전 숲에 울려 퍼지자 앞에서 리와 대적하려던 ‘가장 약한 호랑이’의 주민은 물론 일대의 목초와 작은 미물까지도 압도되어 주변을 벗어나기에 여념이 없었다.


“으아아악!”


꽁무니를 빼며 도망치는 이들을 지켜보며 리는 광소를 터뜨렸다.


[흐하하하! 감히 호피를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내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겠지.]


리는 광폭해져 닥치는 대로 움직이는 것들을 도륙내기 시작했다. 리의 횡포에 어느새 저 한구석에는 호피를 입은 자들로 쌓인 산이 생성되었다.

그러나 말거나 족장은 그 자리에 자신의 지팡이를 꽂아 그 뒤로 무릎을 꿇어 자신의 힘없고 나약한 성주에게 빌고, 또 빌었다.


“우리의 멸족을 막아 주시옵소서.”


그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던 주민들이 족장을 강제로 이끌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족장은 그 자리에 고정이라도 된 듯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폐위되었다고 한들 성주의 대표 주민이 주는 무게감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족장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깝군. 이런 자가 내 주민이었다면 독실한 주민이 간청하는 부탁을 외면했을 리 없는데··· ···. 네놈의 성주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념으로 가게 되면 꼭 네 성주를 원망하거라.]


리의 날카로운 발톱이 이찬을 지나쳐 족장을 해치려는 순간.


[내가 도구의 말을 들을 줄은 몰랐건만··· ···.]


리의 신언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한 차원 높고, 또 한 차원 넓다. 아득하다고도 느낄 수 있는 웅혼한 신언의 주인공은.


“서··· ···성주님.”


‘가장 약한 호랑이’.

‘폐위되기 직전의 성주’.

‘단군신화의 들러리’ 등.

긍정적인 별호는 개나 줘 버린 성주였다.


[이토록 간청하니 내가 듣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성주님··· ···.”


[잠깐 몸을 빌리겠다.]


족장의 의식이 꺼지고 얼마 가지 않아 족장의 눈에 이질적인 상상력이 스몄다. 그리고 족장의 뒤로 거대한 범의 형상이 나타나며 리를 압도했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리는 그가 드러낸 상상력에 압도된 리는 자동적으로, 또한 기계적으로 신의 말씀을 받들 듯 존대했다. 허나 적대감은 아직까지 유지한 채로.

또한 입을 연 것은 족장이 아니라 장엄하게 주저앉은 범이었다.


[까마득한 후배여. ‘가장 유명한 호랑이’에게 경배하라.]

[가··· ···가장 유명한 호랑이.]


리는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있었다. 아니, 수도 없이 들어왔다.

이 한반도에서 범이 주는 위엄이란 가히 옥황에 대적할 만한, 금수 중에서도 제일가는 금수라 칭할 수 있는 이였다.


[후손이여. 오래 버티지는 못 한다.]


이찬의 귀로 들려오는 ‘가장 약한 호랑이’의 경고. 이찬은 자신을 감던 뿌리를 내치려 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시간을 끌어 주리라 믿고 있던 것이었다.


[네놈은 어디서 튀어나온 근본 없는 놈이지?]


리가 ‘가장 약한 호랑이’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범은 그런 리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내 주민을 해한 결과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저··· ···저는 성단 이매망량의 리입니다.]


범의 고개가 갸웃했다.


[이매망량? 그 저속한 놈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당도했단 말인가. 겨우 현실의 급조된 상상력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기 위해 협약도 위반하고 귀신을 현실로 보내던 놈들이.]


범의 냉랭하고 두려운 시선이 리에게로 꽂혔다.


[그런데 말입니다··· ···.]


뜬금없이 리가 범에게 말을 걸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시나 봅니다?]

[뭐?]


쉬리리릭!


멀지 않은 곳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찬을 속박한 것과 같은 나무의 뿌리가 범에게 접근했다.


[이곳은 제 성지라는 것을, ‘가장 유명한 호랑이’께서 간과하신 모양입니다.]

[커헉!]


두 가지의 나무 뿌리가 차례로 족장의 가슴과 복부에 꽂히며 뿌리를 타고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어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던 범은 나지막이 누군가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너무 늦었구나. 살리긴 글렀어.]


콰아아앙!


리의 뒤, 즉 족장과 범의 앞쪽에서 가공할 폭발음이 들리더니 폭발음에 걸맞은 격과 상상력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 위압에 리는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그런 상황에서 족장과 연결되어 있던 ‘가장 약한 호랑이’의 격은 끊어지며 리에게 일종의 탈출구를 제공했다.

앞에서는 범이, 뒤에서는 이찬이 꺼낸 힘에 압도되어 질식할 뻔한 리에게 탈출구가 제공되자 리는 사리를 분별할 새도 없이 포위망이 뚫린 앞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찬의 입에서는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


[하하. 행동자도 별거 없구만. 날 놓치다니.]

[누가 놓쳐?]


이찬의 신언에 리는 뜀박질을 멈추었다. 단순히 저 신언이 뒤에서 들려오는 것이라면 리는 뜀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뜀을 그만둔 이유는 그 신언이 사방. 아니, 팔방 그 이상의 방향에서 들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 했다는 듯이 리는 이상하리만치 크게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슈우우욱!


리의 앞에서 인지할 틈도 없이 날아온 한 검이 그를 얇게 스치고 지나가 나무에 박혔다. 몇몇 나무를 뚫어서야 뒤에 위치한 나무에 박힌다는 것은, 저 검에 정통으로 맞았다면 가히 비명도 내지르지 못 하고 사망했음을 인지하듯 했다.


[나와··· ···라.]


자신의 성지를 벗어났기 때문일까. 혹은 애초에 그가 그럴 그릇이었던 걸까.

리의 신언은 다시 어설프고 급조한 느낌으로 돌아갔다.


[상대를 잘 보고 덤볐어야지.]


이찬이 리의 면전에 강림(降臨)했다.

이어 리 따위는 반응할 수 없는, 저 하늘의 고위급 성주는 되어야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할 수 있을 법한 거대하고 날랜 주먹이 리의 얼굴에 고정되듯 박히며 리의 대가리가 터져 나갔다.

이찬은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기도를 회수하고 다시 마을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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