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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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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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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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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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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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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14)

DUMMY

쩌어어억.


이찬이 버튼에서 손을 떼자 꽉 결합되어 떼어지지 않을 것 같던 송곳이 양쪽으로 서서히 벌어졌다.

송곳이 제위치를 찾아가며 참상이 드러났다. 이찬은 그 참혹한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또한 자신이 감당하고 짊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을 미지의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자주 올 거야.”


고개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고, 발걸음은 참상을 향해 움직였다.

걸음을 하나 내딛자 코를 찌르는 혈향이 맴돌았다. 이곳으로 오면 안된다는 것처럼 종용했다. 누가 그랬는지는, 지금 와서도 잘 모르겠다.

또 한 번 걸음을 내딛었다. 이번에는 그것에서 빠져나온 공기가 이찬의 피부를 마구 간지럽혔다. 마치 송곳에 찔린 것이 자신인 양 이찬의 전신이 떨렸다.

많은 죽음을 목도했고, 많은 시체를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죽음이란 가장 가까운 존재인 동시에 가장 먼 현상이었다.

이번엔 좁은 보폭으로 한 걸음을 움직였다. 그 앞에는 이제 피해갈 수 없는 묵인하고 무시할 수 없는 거산(巨山)이 있기 때문일 테다.

앞으로 나간 걸음에서 얕은 물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속으로 이것이 물이면 정말 좋으리라 생각했다. 이곳은 바닷가였고, 면전에 놓인 것은 커다란 바위였다.

이찬은 그것을 지나는 동안 눈을 점멸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이찬이 감내해야 할 장엄한 고통이오, 이찬이 피해갈 수 없는 거룩한 운명이었다.

이찬은 바싹 마른 자신의 입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발을 마저 움직였다.

전신이 떨려오는 위압 속에서 이찬은 짓이겨진 그릇을 마주했다. 피하지 않았다. 치우지도 않았고, 되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체에 손을 올렸다.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결코 사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리곤 높게 솟은 거산 위로 두 손과 두 발을 전부 붙였다.

이찬은 거산을 등반하듯 손과 발을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질퍽거리는 사체에서 벌써부터 악취가 풍겼다. 그는 숨을 참지 않았다.

높직한 복도의 천장은 이제 이찬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시산(屍山)이라는 고독한 섬과 혈해(血海)라는 광활한 바다가 이찬을 맞이했다.

누구도 오지 않는 무인도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다.

시산의 산마루를 정복했고, 혈해의 파구(波丘)를 점령했다. 완전한 정복군주가 되었지만, 그것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결국 정복군주는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고, 이젠 앞을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닌 위를 보고 날아야 했다.


턱!


이찬이 계단의 초입부를 밟았다. 자신이 온 복도를 돌이켜 보자 이찬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 이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었다.

피가 있든 시체가 있든, 그는 자신이 정한 목표만을 보고 달렸다. 발자국에 스민 강혈(腔血)이 자신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을 몇 초간 지켜보던 이찬은 고개를 돌려 위로, 더 위로 향했다.


“윽.”


이찬이 활짝 열린 금서관의 정문을 보고, 정확히는 그로 인한 햇빛을 보고 감탄사를 뱉었다.

이젠 정말 전장에 합류해야 했기에 속도를 높였다. 금서관의 정문을 지나치자 그야말로 시산혈해가 펼쳐졌다.

촌장은 이제 정말 《관념》으로 향한 듯 기운 없이 쓰러져 있었고,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드러눕거나 엎드리거나 앉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신체가 멀쩡하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허나 이찬은 그중에서 마지막 남은 존속의 열쇠를 발견했다.


“일어서.”


이찬이 이곳에 왔을 때 그를 경계하고 그에게 창을 들이밀었던 또래 남자아이였다.

또래는 이찬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웅크리고 떨었다. 세상과의 단절을 바라는 듯한 떨림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냐? 아니면 장례라도 치르게?”


또래가 고개를 들어 서서히 이찬을 마주했다.


“장례는 나중에 알아서 하고, 따라와.”


그가 이찬을 불신의 눈빛으로 응시했고, 이찬은 이런 기싸움에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그럼 여기 있어. 혼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밥도 못 먹고 옷도 못 갈아입고 잠도 억지로 청하면서 그렇게 네 친구들 옆에서 죽어가라고.”


그 말을 들은 또래는 웅크리던 잔디에서 벌떡 일어나 곁에 쓰러져 있던 창을 집었다.

불타오르는 투지에서 이찬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름 있냐?”


이름이 있냐는 질문에 또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름도 없이 어떻게 산 거야.”


잠시 고민하던 이찬은 또래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네 이름은 ‘호아(虎牙)’다. 바짝 따라붙어. 나는 네 장단에 맞출 시간 없으니까.”


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찬은 그를 믿지 않았다. 단지 촌장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었으니까.


-우리 일족이 멸족당할 위기에 놓인다면 단 한 명만이라도 자네가 데리고 가 주게.


촌장의 부탁을 끝내 거절할 수 없던 이찬은 알았다며 동의했고, 그 결과 마을에서 가장 어린 호아를 데리고 움직여야 했다.


“넌 범의 특성을 일부 계승하고 있겠지. 나를 놓치면 내 냄새를 맡고 쫓아와. 남쪽으로 간다.”


이찬은 가공할 속도로 호아를 제치며 남쪽을 향했고, 호아도 이에 질세라 이찬의 뒤를 쫓았다.


***


가스페르는 진중한 눈으로 전장을 훑고 있었다.

현재 이찬의 임명으로 전장의 총 사령관은 가스페르였고, 이찬의 부재로 현재 명령권자는 자신뿐이었다.

전장의 상황은 그들에게 불리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매망량>의 주민들은 일제히 물러나 타 성단과의 접촉을 성공했고, 현재 세 농업신 쪽은 고전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원을 바라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노는 전례가 불분명한 수의 공룡을 통제하고 운용하느라 지원을 요할 수 없었고, 그 근처에서는 아윤과 폐위 성주 판도라의 결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찬이 말한 주연이라는 여자는 어디로 숨은 건가 보이지 않았고, 이찬은 부재였다.

정지현과 황승환은 그들에게 접근하려는 괴물을 막아내느라 다른 일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결국 가스페르가 활을 쥐며 건물에서 뛰어내려 전장에 합류하려는 순간.

운사가 통신망을 통해 가스페르를 만류했다.


[혹시나 여기 올 생각이라면 접어 두는 게 좋을 거다.]


우사가 첨언했다.


[우린 아직 우리의 밑천을 드러낸 적이 없거든.]


풍백도 꺼드럭거렸다.


[잠자코 지켜봐라.]

[누가 할래?]

[뭘 누가 하냐. 맨날 저놈이 했는데.]


풍백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제일 센 건 맞지.]


가스페르가 자신의 빼어난 시력으로 그들 셋을 응시했다. 그들은 이미 사방으로 포위되어 <태극>의 하위 성단 <이매망량>, <올림포스>의 하위 성단, 마계에서 넘어온 마신들의 족속에 의해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다.


[잘 생각해라. 여기서 죽으면 본신도 죽는다. 패배는 곧 죽음이다.]

[언제는 안 그랬나. 저 위에 계시는 쓰레기들이나 그런 짓 하는 거야.]

[시작한다.]


풍백의 신호에 맞춰 우사는 비를 움켜쥐고 하늘로 상승했고, 운사는 구름을 타고 우사를 따라갔다.

풍백은 둘의 뒤를 쫓으며 적당한 고도에 멈춰 섰다. 그리곤 느지막이 그의 ‘성지’를 구현했다. 그것이 다른 이들의 눈에 ‘느지막이’ 보였던 이유는 공간이 다른 공간에 덧씌워지는 과정에서 시간의 압축마저 일어났기 때문이리라.


[성지화. <폭풍의 눈>]


풍백의 성지 <폭풍의 눈>.

병장기를 부딪히고, 신음과 비명, 함성이 들려오고, 혈흔이 낭자하는 소리가 들려오던 전장은 고요해졌다.

마치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쿠구궁!


그때 성지 위로 비를 동반한 먹구름이 몰려왔다.

풍백의 성지에서 발현된 우사와 운사의 격은 평소에 발현하는 그들의 격을 1.5배 이상 웃돌았다.

고요해진 전장의 틈으로 신이 하림했다.

진정한 의미의 신은, 자신이 있는 공간이 어디든 그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내 성지를 부숴라.]


세 농업신의 위압감이 한층 이상으로 상승했고, 아마 이 위압을 견딜 수 있는 이는 전 우주에도 많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가스페르는 풍백의 성지화를 보고는 곧바로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농업신 쪽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나 진배없었고, 남은 것은 아윤과 이노의 상황이었다.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아윤은 가까스로 판도라를 주시했다. 판도라의 일격에 스치며 서서히 신체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던 터라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었다.


“빨리 덤벼.”


그때, 판도라의 얼굴이 사색이 되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윤은 무슨 영문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왜 갑자기 자신을 보고 뒤로 물러나는가. 하지만 아윤은 곧 알 수 있었다.

판도라는 자신을 보고 뒤로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아윤의 너머 무언가를 보고 겁에 질린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무너뜨릴 대성단 <올림포스>의 최종병기이자 최흉의 악.


[메··· ···메두]


어떤 단어를 말하려던 판도라가 말을 즉시 멈추었다.

이제 보니 판도라는 다리와 팔부터 서서히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판도라가 정신을 차리고 그것과 대응하려 자세를 취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이미 잿빛은 판도라의 전신을 감쌌고, 이내 판도라는 완전한 돌(石)이 되고 말았다.

아윤이 무슨 영문인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안 돼!”


이노가 아윤의 고개를 몸으로 막으며 양손으로 아윤의 눈을 가렸다.


“고개. 돌리지 마.”


이노가 겁에 질린 투로 말했다. 그에 덩달아 아윤도 긴장했다. 아직까지 아윤은 이노가 겁에 질린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신체적 나이가 어렸음에도 아윤보다 월등히 많이 살았고, 아윤에 비해 지식 수준도, 격을 운용하는 힘도 두드러졌기 때문이었다.


[아··· ···.]


아윤의 바로 곁에서 작은 탄식이 들리더니 이노가 아윤의 눈에서 양손을 떼었다. 그리곤 지친 듯 아윤의 등에 업혔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그 무엇도.


“대체 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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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대멸종 (8) 24.07.31 7 0 9쪽
136 대멸종 (7) 24.07.28 10 0 10쪽
135 대멸종 (6) 24.07.26 1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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