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음란 세포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도 맘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 나 : 오케이 근데 너도 취준생?? ]
그렇지 않고서야 평일 아침인데도 나처럼 집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 302호 정현주 : 난 재취준생 ]
‘재취준생···?? 아··· 재취업 준비···’
[ 나 : 원래 무슨 일 했었는데?? ]
내 느낌상 짐작해보기로 피아노 강사나 학원 강사가 잘 어울렸다.
[ 302호 정현주 : 카페에서 일 했었는데 바이러스 때문에 잘렸어 ]
현주의 톡에 나도 모르게 커피 내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매력적인 눈빛 때문에 많은 남자 손님들을 끌어 모았을 것 같았다.
“카페도 잘 어울리겠네. 그나저나 바이러스가 진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 잡는구나···”
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를 생각하다 보니 카페인이 당겼다.
[띠링]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난 이제 막 커피 믹스를 집어 든 상태였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내 능력이었다.
손은 커피믹스를 따면서 눈은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응시했다.
휴대폰은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날아와 원하는 위치에서 멈추었다.
화면이 바로 보이게끔 세워진 상태였다.
“손 안 대고도 터치가··· 안 되겠지?!”
휴대폰의 터치 스크린이 정전식인 건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과 맞닿아 있는 공기를 살짝 응집시켜 손으로 터치하듯 화면을 건드려봤다.
“흠···”
역시는 역시였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난 그냥 휴대폰 옆면의 버튼에 집중해서 화면을 켰다.
예상대로 현주의 연락이었다.
굳이 채팅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팝업으로 뭐라고 했는지 보였다.
“오늘 마술 연습하냐고···??”
이 질문에 두 가지 답을 할 수 있었다.
‘한다’와 ‘안 한다’.
각 답변마다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을 상상해봤다.
‘한다’ 라고 대답한다면 구경하러 가도 되는지 아니면 본인에게 해보라고 할 것 같았다.
반대로 ‘안 한다’ 라고 대답하면 취준생 아니 마준생이 그렇게 연습을 안 해서야 되겠냐고 할 것 같았다.
“이거 참 고민이네···”
어떻게 답장할지 고민하는 사이 커피가 완성되고 집 안에 커피향이 퍼지고 있었다.
한 모금을 마시자 카페인이 살금살금 내 몸 속을 돌아다녔다.
전두엽이 맑아지고 전신의 신경이 깨어나면서 시도해본 적도 없는 그 어떠한 능력도 다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유, 모르겠다.”
일단 중립적인 답장을 해보기로 했다.
[ 나 : 어제 연습 좀 빡세게 해서 오늘은 어떡할지 생각 중 ]
그리고는 소파로 돌아와 보고 있던 예능을 계속 시청했다.
그것도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로 연락이 왔다.
[띠링]
살짝 귀찮은 느낌이 들었지만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톡을 확인했다.
[ 302호 정현주 : 아 그럼 좀 쉬었다가 연습할 때 얘기해주라 나 구경갈래 ]
“왜 내 스케줄을 자기가 짜고 있어··· 그리고 오긴 뭘 와···”
[ 나 : 한 번 생각해보고 ]
답장을 보내자마자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꿨다.
그리고 내 방 침대로 날려보냈다.
진동으로 바꿔도 소파나 테이블에 두면 웅웅거릴 거라, 아예 이불 위에 올려 두면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쉬어야지~”
***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보고 있던 예능이 끝나고 무료함이 찾아왔다.
난 가벼운 손짓으로 다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로 보냈다.
그리고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연락온 게 있으려나~”
진동으로 바꾼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상대방은 딱히 잘 못한 게 없는데 괜시리 서운했다.
[우우우웅]
그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찰나의 순간, 현주의 연락인 줄 알고 팝업을 확인했다.
찬영이었다.
“에이···”
팝업으로 내용이 보였지만 누구인지 알아차린 이상, 그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찬영의 톡을 바로 확인하지 않고 현주와의 채팅방에 들어가봤다.
내가 보낸 톡에 ‘1’이 보이지 않았다.
“아, 보긴 봤구나.”
이번엔 찬영의 톡을 확인했다.
[ 찬영 : 야 저녁에 너네 집에서 치킨 시켜 먹을까 하는데 너도 올래?? ]
어느 SNS에서 웃긴 이야기 같은 글에서 본 멘트였다.
“무슨 개똥 같은.”
뜬금없이 웃기긴 했지만 어떻게 받아칠 지 잠시 생각했다.
[ 나 : 글쎄 그 집 주인 오늘 저녁에 이사 간다던데 ]
어떻게든 못 오게 하려고 예상 멘트에 대한 답변을 추측했다.
[ 찬영 : 아 그래?? 내 부탁 들어준 보답으로 내가 사려고 했는데 안 되겠구만. 그럼 수고 ]
“아, 이런.”
공짜 치킨을 이렇게 놓칠 순 없었다.
[ 나 : 저녁부터 내가 그 집 주인임. 와도 됨. ]
[ 찬영 : 오케이 ]
[ 나 : 근데 여친이랑 오는 거?? ]
[ 찬영 : 아니 여친은 약속 있음 ]
마음 한 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번처럼 구석구석 청소할 필요도 없었고 옷도 대충 입고 있어도 되기 때문이었다.
[ 나 : 아아 연애사업은 잘 돼가냐?? ]
아마도 남의 연애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 찬영 : 완전 잘 지내고 있지. 너야말로 연애를 좀 해야 되는데 ]
생전 내 연애 걱정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 없던 녀석이 그러니까 낯설었다.
[ 나 : 난 왜?? ]
[ 찬영 : 혈기왕성한 20대가 이 좋은 걸 못 하고 있는 걸 보니까 착잡해서 ]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속마음은 날 놀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 나 : 남이사 ]
[ 찬영 : 암튼 저녁에 감. 뭐 시킬 지 생각해놓고. ]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결정됐다.
이제 점심을 정해야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러 가려고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전화가 왔다.
[우우우웅]
아랫집이었다.
‘갑자기 웬 전화지···??’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받긴 받아야 하는데 받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 바람에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다가 휴대폰이 더 이상 진동하지 않았다.
‘······큰일이다···’
당황스러움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조금 기다리면 왜 전화했었는지 톡을 보내올까 싶어서 기다려봤다.
1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도 휴대폰은 조용했다.
비로소 내 연애 세포를 적극적으로 자극할 때가 됐다고 느껴졌다.
왜 전화했냐는 문자보다 그냥 사소한 핑계를 대면서 직접 전화를 걸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부재중전화’로 떠있는 연락처를 눌렀다.
이제 통화 버튼만 터치하면 된다.
“후··· 차분하게··· 친구한테 전화 건다 생각하고···”
손 끝이 화면에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떨려왔다.
그냥 통화 한 번 하는 건데 이렇게 긴장해서 될 일인가 싶었다.
[뚜르르르]
따로 컬러링을 설정해두지 않았는지 기본 신호음이 들렸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점점 내 마음은 진정되고 있었다.
너무 떨렸던 나머지, 차라리 상대방도 전화를 못 받아서 그냥 문자로 대화를 주고 받았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어, 여보세요.
내 작은 소망이 물거품이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전화하셨길래···”
- 다시 존댓말 모드가 됐네요~?
“아!!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아, 아니, 미안···”
전화 한 통화로 내 인생 최고로 민망한 순간을 갱신했다.
- 미안해할 것까지야. 혹시 점심 뭐 먹을 거야??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녹아 있었다.
더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아, 어···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 그러면 떡볶이 먹고 갈래??
‘떡볶이···?? 먹고 가라고···??’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정도로 훅 들어올 줄은 몰랐다.
‘요즘은 ‘라면 먹고 갈래’라는 말 대신 떡볶이를 대입해서 쓰나···??’
- 여보세요??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던 순간 현주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 네네. 아니, 어··· 갑자기 웬 떡볶이···”
태연한 척, 순진한 척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솔직히 누가 듣더라도 수줍어하는 목소리임을 알았을 것이다.
- 어?? 아침에 못 봤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뭘···??”
- 아침에 산책하고 오는 길에 봤을 텐데?? 요 앞에 떡볶이 집 생긴 거.
긴장하고 있던 내 어깨에 힘이 풀렸다.
처음부터 말을 ‘떡볶이 먹고 갈래’가 아니라 ‘먹으러 갈래’라고 했으면 이 정도로 긴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아~ 봤지. 그 집 매운 걸로 유명한 거 같던데.”
- 어어, 맞어. 생각 있으면 같이 먹고 올까 싶어서.
역시 추진력이 좋은 여자였다.
떡볶이 생각이 딱히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 먹기 싫은 건 아니었다.
상대방이 아랫집이니까.
“어··· 그럴까···?? 일단 좀 씻어야 해서···”
씻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지만 솔직히 내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더 절실했다.
- 나도 씻어야 돼. 아침에 베란다에서 봤지?? 이 상태로 나갔다가 누가 나한테 동전 던져줄 지도. 아무튼 한 시간 정도 뒤에 내 집으로 와.
“지··· 집으로···??”
다시 한 번 심장박동이 난리쳤다.
- 벨 누르라고 벨. 그러면 나갈 테니까. 그리고 지갑은 갖고 나오지 말고. 내가 살 테니까.
“아, 아~ 알겠어.”
전화를 끊고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졌다.
세상 이런 똥멍청이 같은 전화를 한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다.
“하··· 연애 세포 깨우려다 음란 세포 깨울 뻔했네.”
그래도 오랜만에 하는 제대로 된 외출이란 생각에 기분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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