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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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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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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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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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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화

DUMMY

“전부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좀 전의 하품은 야담의 것이었다. 이어지는 심문은 초영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최대한 야담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태강의 수작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게 우선이 아닌가? 쓸데없이 초영을 따라 하려면 주위를 둘러보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군.”

“때와 장소라니?”


그제야 태강이 자신들이 마주 앉은 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시야를 더 널리 확보하기 시작했다. 전시실 안에는 야상곡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이와 어울리지 않게 꽤 많은 사람이 시곗바늘처럼 규칙적으로 원을 그리면서 이동하는 터라 두 사람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아예 전시 유리창에 들러붙거나 그 창 안에 들어가 유물들 옆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하필 한 학교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온 것이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하면서 무턱대고 이들을 내쫓을 수는 없는 도리인지라 입만 뻥긋거리게 된 태강의 표정은 아이들이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지나칠 때마다 더욱 일그러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유유자적 걷는 야담의 뒤에 서둘러 붙으며 작게 속삭이는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아직 녹수에 대해서 다 이야기해준 게 아니잖아! 설마 이미 다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거 아니야?”

“그랬던가?”

“응. 게다가 오늘은 이렇게 한가하게 여기에 들러서 구닥다리 골동품들이나 보는지 그 이유도 알려주지도 않았어.”

“넌 참 날 끈질기게 쫓아다니는군.”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벽기둥 앞에서 이들의 걸음이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기둥 앞에는 한때 왕의 조복이었던 붉은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통천관(通天冠)을 쓴 마네킹이 이들을 괴상야릇한 인공의 무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꼭 그렇지는 않지.”

“몰라. 심연도에만 있으려니 너무 따분하고 기분이 별로고, 막 그렇거든. 그래서 이유가 뭔데? 적어도 오늘 여기 온 이유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끈질기군.”

“아냐. 끈질긴 건 너야, 야담. 여기 오늘 길에서부터 계속 물어봤는데 한사코 대답하지도 않더라고.”


부정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야담이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이에 태강이 마네킹이 들어간 유리관에 팔을 들어 올리더니 그쪽으로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었다.


“별 이유는 없단 말을 들으면 네가 역정을 내고 말 텐데 말이지.”

“잘 아네!”


두 사람이 비켜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이들을 피해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별 이유가 없다는 게 안타깝군.”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이 아니야. 우리에게도 있는 과거라는 걸 잠시 추억하고 싶었을 뿐.”

“과거? 갑자기 그건 왜? 게다가 정치에는 개입하지도 않았던 네가 왜 하필?”

“민중의 삶을 반영한 박물관은 수도에 없으니 그렇지. 이게 최선이었어. 우리는 당분간 이 수도를 떠날 수 없다는 걸 잊은 모양이군.”

“그래, 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야지.”


태강의 당당한 태도에 선뜻 황당해진 야담이 곧 제 기억을 헤집어 놓은 결과 이 귀찮은 친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렇군.”이라는 소극적인 답을 내놓고는 뒤돌아버렸다.


“단지 백면에 관한 기억을 명확히 하고 싶었을 뿐이야.”


때마침 전시실을 다 둘러보았는지 입구 쪽에 남은 두어 명을 제외하면 학생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덕분에 두 사람은 아까보다 느긋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거라면 난연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여자는 난연에 살았었잖아.”

“넌 남의 흠에 대해서만 잘 기억하는 모양이지.”


야담이 뒤를 향해 찌릿찌릿한 눈길을 보냈다. 그 따가운 것에 맞고는 정신이 들었는지 태강이 깊이 탄식했다. 수도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게 된 그는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난 그 여자에 관해서는 솔직히 말해서 관심이 없어. 관심이 있다고 하면 그건 당연히 백면이겠지.”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냉정할 것도 없지. 그 여자는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에 지나지 않아. 죄를 사하려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들쑤셔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그렇긴 하네.”


머쓱해진 나머지 비스듬하게 꺾은 고개를 그대로 위아래로 움직인 태강이 이윽고 헛기침을 내놓았다. 그러다 여러 상념 중 하나가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거야?”

“누구?”


어느덧 입구 근처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십이장복이 긴 나무 봉에 걸린 모습을 흘깃 바라보더니 야담이 다시금 걸음을 멈추었다.


“그 할아범 말이야. 정안수를 괴롭혔던 할아범.”

“그렇게까지 괴롭혔다고 표현할 일인 건가?”

“괴롭힌 게 아니면 뭐야? 사사건건 간섭하긴 했잖아.”

“그자가 했던 짓들에 비하면 약과기는 해도 그렇다고는 해야겠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한쪽이 조금 억울해할 테니.”


역시나 유리창에 팔을 올린 채 기대어버린 태강이 이번에는 다리까지 꼬아 서며 야담은 범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보다, 그 일은?”

“그 일이라면 잘 끝났다고 말할 수 있겠군.”

“그런데 그 남자는 안 찾아갈 거야? 상습적으로 글을 빼앗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그 남자 말이야.”

“태강.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뭘 말이야?”


덤덤하게 눈을 딴 데로 돌린 야담은 일부러 손을 뻗어 유리에 달라붙은 태강의 손을 떼어놓고 난 다음에야 대답했다.


“당분간은 수도를 떠날 수 없어.”

“뭐야? 그럼 그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 벌써 알아냈다는 거야? 절대, 절대 죄의식조차 없어 보이던데. 요즘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무슨 그림 타령으로 그 인간 마음이 지배당했더라고. 역시 인간들한텐 명예가 좋기는 한가 봐. 추잡한 과거 같은 건 다 잊게 해주잖아.”

“어디 명예만이 그렇겠나. 그나저나 어렵지는 않았어. 권기현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니, 주소쯤이야 권기현을 잠깐 추궁하기만 하면 그만일 테니.”

“어디에 사는데?”

“······난연.”


야담이 순순히 자신의 자세를 교정하도록 둔 태강이 상당히 얼빠진 얼굴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는 순간이다.


“뭐? 어떻게 난연일 수가 있어!”

“쉿. 조용히 해라.”


곧게 편 검지손가락으로 제 입술 정중앙을 누르며 야담이 급히 사방을 두루 살폈다. 다행히 전시실 안에는 아까 보았던 그 마네킹과 자신들 두 명을 제외하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왜 하필 난연이야?”

“그건 나도 묻고 싶은 질문이로군.”

“믿을 수 없어.”

“우리에겐 그럴 권한이 없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왜? 믿든 말든 그건 내 자유야.”

“하지만 우리 역시 결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한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야. 아무튼 한 가지 너의 의견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태강의 두 눈이 짐스럽게 반짝거렸다. 이에 부과되는 책임감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그 얼굴을 외면하려고 들었지만, 마땅히 딴 곳을 볼 수도 없는 순간인지라 야담은 다만 불쾌감이 드러나도록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을 잇는다.


“초영은 언제 돌아오지?”

“초영? 나야 모르지.”

“되도록 난연에서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곧 돌아오지 않을까? 거기에 계속 눌러앉아 지낼 인물은 아니잖아.”


초조해졌는지 야담이 주먹을 쥔 손으로 유리창을 노크하듯이 두드렸다. 이는 곧 일종의 신호 같은 것으로 태강의 입에서 새로운 제안이 나오게끔 했다.


“아니면 내가 갈까?”

“뭐?”


벌써 들뜬 얼굴의 태강이 손뼉을 마주치며 답한다.


“내가 다녀올게!”

“난연을 말이지?”

“응. 어차피 여기엔 너만 있어도 되는 거 아니었어? 그 할아범도 나보다는 널 더 두려워하기도 하고, 너도 나한테 전부 털어놓지도 않고.”

“너한테만 그런 건 아니다.”

“알지. 아무튼 내가 가도 상관없는 거 아니야? 내가 갈게 그럼!”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백면의 새로운 내생을 언제 어느 때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태강이 반드시 이곳에 머물러야 할지 그러지 않아도 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게 좋겠군.”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이라고?”


태강이 눈을 매우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것이 상당히 많은 듯한 낯빛이다. 본디 저답지 않게 조금은 영리해 보이기도 한다.


“녹수가 왜 그렇게 다쳤던 건지 말이야. 그거 알려 줘. 그리고 가능하다면 왜 그렇게 녹수를 만나고도 그 애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건지도.”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태강이 그사이에 기억력이 떨어진 대신에 추리력일 키워놓은 것 같다고 야담은 생각했다. 체념한 듯한 그의 눈썹의 모양이 곧 반듯해졌다.


“어차피 알아야 하는 거라며! 야담, 난 너를 돕기 위해서 계속해서 널 쫓아다닌 거야. 매번 이런 말을 해온 것 같은데 이제는 믿고 좀 맡겨도 되지 않아? 가급적이면 그게 비밀일지라도 말이야.”

“널 진작에 떼어놨어야 하는 건데.”

“그래 봤자 내가 더 빨리 난연에 가는 거밖에 더 돼?”


야담이 자신의 조력자를 향해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알려주지. 하지만 명심할 것이 하나 있어.”

“응? 그렇게 어마어마한 비밀이었던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책임의 비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어디 한번 제대로 들어보자는 심보로 태강이 팔짱을 끼었다. 이번에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는 바람에 특별히 유리창에 기대지는 않았다.


“책임의 비중? 설마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잘잘못을 따지려는 거야?”

“아니, 네가 한 말에 대해서 명확히 짚어주려는 것이야. 내가 녹수를 만나고도 그냥 지나친 데에는 나의 책임이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곧 야담의 황당한 소리에 놀라 다리를 휘청인 탓에 도로 유리창에 제 몸을 맡기고 말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얼굴의 한쪽 측면을 바짝 누른 태강이 처절히 눌린 볼처럼 약간 뭉개진 발음으로 말한다.


“책임이 없다니?”

“더 직설적으로 말해줘야 하나?”


우선은 야담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태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유리면에 달라붙은 제 처지를 깨닫고는 오므린 입술을 양옆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거절의 의사를 나타내고 말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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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205화 20.12.26 29 1 9쪽
205 204화 20.12.25 31 1 9쪽
204 203화 20.12.24 28 1 9쪽
203 202화 20.12.23 30 1 9쪽
202 201화 20.12.22 28 1 9쪽
201 200화 20.12.21 34 1 9쪽
200 199화 20.12.20 31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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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197화 20.12.18 35 1 9쪽
197 196화 20.12.17 31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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