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복도의 창문이 거의 열려 있는 탓에 바람이 따귀를 훑고 지나갔다. 딱히 시원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후덥지근하지도 않은 싱거운 바람이었다. 그래서 볼을 매만져본 건 아니다. 분위기가 어째선지 시큼해진 터라 그 쓴맛에 얼굴을 구기다가 저도 몰래 나온 행동이었다. 태강은 그대로 야담의 뒤를 졸졸 쫓았다. 권기현의 방을 나오면서부터는 부쩍 침묵이 버거워지는 탓에 아주 조심히 말을 붙여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계획하는 거야?”
돌아오는 답이 없자 그는 제 발을 저리며 뒷말을 급하게 이었다.
“어차피 오늘 볼일은 끝난 거니까 지금은 물어봐도 되지?”
나발을 분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가슴이 뜨끔했는지 모르겠다. 야담이 저렇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일 때에는 보는 이조차 죄를 짓는 듯한 거북스러운 느낌이 든다. 잠시 멈추어서 태강은 승강기 근처에 머물렀다. 오를 때처럼 같은 방식으로 내려갈 줄 알던 것이다. 그런데 야담은 거기를 지나 더 뒤쪽으로 보이는 계단으로 끊임없이 다가갔다.
“야담!”
어쩔 수 없이 그 이름을 부르며 태강이 쪼르르 다가왔다. 그런데도 야담은 뚜벅뚜벅 제 걸음에만 집중할 뿐이다. 막힘없이 층계를 내려오더니 태강이 포기하고 자신 역시 아래로 내려가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할 무렵에 야담이 어느 계단참에서 갑자기 멈추고 말았다.
“태강.”
그러다가 태강은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야담을 앞지르게 되었는데, 뒤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기도 전에 그가 앞에 보이던 등짝이 없는 관계로 급히 브레이크를 걸어 간신히 우뚝 선 후였다. 태강은 본연의 천진난만한 무표정을 보였고, “응?”이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뒤돌아서 야담을 올려보았다.
“너는 정녕 모든 인간의 기적을 네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군.”
“그런 건 갑자기 왜?”
이내 팔짱을 낀 태강의 목소리는 어떤 뚜렷한 저의 없이 그저 순수한 의문에 의해 약간 고조된 상태였다.
“나는 저 자의 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 이번 일 말이야? 그야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아니, 오래전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늦장을 부리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터덜터덜 걸음을 움직여 내려온 야담이 태강보다 두 계단 더 낮은 곳에서 멈추었고, 이번에는 자신이 태강을 뒤돌아보았다.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책하는 말투라기에는 지나치게 덤덤했지만, 그러는 편에서 그다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체와 객체의 언급은 일절 없었으나 눈치껏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앞전의 상황으로 파악해낸 태강이 넌지시 말을 던진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죄여서 그런 거 아닐까? 예전이라면······ 그래, 저 사람의 나이대를 생각해보면 되지. 분명히 지금보다 어릴 때, 최소한 젊었을 때 무슨 죄를 지었을 거 아니야? 그렇다면 그때의 일은 모두 지금은 잘 잊기도 했을 테고. 인간이란 게 원래 다 그렇잖아. 좀처럼 기억하는 법을 몰라. 그래놓고는 자신이 모든 걸 기억하며 틀림없이 올바르게 사는 줄 알잖아들. 다들 그래!”
특별히 누구를 위로하려고 좋게 에두른 표현이 아니었는데도, 태강은 막상 말을 하고 보니 야담의 실수를 넋두리의 형식으로 두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에 큰 불만을 느낀 건 아니지만, 오히려 야담 쪽에서 흡족하지 못한 표정을 드러내니 난감한 상황은 태강을 불리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은 뜬금없게도 명백히 야담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라니? 갑자기 우리는 왜 나와?”
“그렇다면 우리는 정녕코 모든 인간의 마음을 듣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묻는 거다. 그래서 아까 너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고. 태강, 너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매 순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다고 우리의 운명을 걸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그 대답이 궁금하단 말이었단 것이지.”
“그러니까······ 그야······ 듣고 있기야 하지. 항상 들리잖아.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우리가 없을 때도 인간들은 항상 안에서 저마다 떠들기 마련이니까.”
“그 속내를 듣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되는 문제에는 어떻게 대처하지?”
“당연히 내가 나서지!”
월컥 터진 성에 스스로 질겁해버린 태강이 두 눈을 크게 떴다가 곧바로 아주 가늘게 뜨며 야담을 향해 수상하다는 시선을 꽂았다. 저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을 물었다는 뜻이다.
“뭘 두고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그래서인지 이번에 야담은 다소 곤란한 것을 물었다.
“뭘 두고? 글쎄, 으음. 나 자신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때때로 너희들이 나한테 너무 기분대로 일을 일으킨다고는 해도 그거야말로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단 증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너 자신을 걸 수 있다는 말이겠군.”
“뭘 또 그렇게까지······ 하지만 그래야 한다면 그럴 수 있어. 저번에는 도진이랑 백나나를 도와주기도 했다고!”
“그렇군.”
태강의 지난 성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 야담은 건성으로 답하며 이내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도중에 멈추었을 때 자신들이 이미 1층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주변의 풍경을 대충 흘겨본 태강이 깨달은 대목이었다.
“그런데 그런 건 왜? 그렇게 너무 세심하게 신경쓰지 마. 어차피 야담이 놓친 게 지난날 저 사람의 죄라고 해도 그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죄라는 것은 유일하게 인간이 좀처럼 변덕을 부릴 수 없는 부분이라고 태강은 생각했다. 자의적이기도 하고 타의적이기도 한 그것은 이런저런 이야기와 소문을 몰고 다니지만, 실제로 그 죄라는 것은 나무 기둥 하나에 묶인 허수아비 같은 것이어서 언제든 사람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실제의 사람처럼 그 자리를 제 의지로 떠날 수는 없다고.
“그래. 그건 다행이군.”
자조적인 야담의 웃음소리에 태강은 다시 한번, 신맛이 나는 분위기를 맛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가볍게 상황을 모면해보고자 야담의 어깨에 제 오른팔을 올리며 짓궂기는 해도 달가운 미소를 선보였다.
“그래! 다행이라니까? 그런데 도대체 무슨 죄길래 그래? 이번 일이랑은 어차피 관계도 없을 거 아니야?”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 애초에 내가 저 자의 죄를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테니까.”
“뭐?”
야담이 그의 팔을 걷어내는 바람에 엉성한 차렷 자세를 하고 만 태강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뭔데?”
야담은 몇 걸음만 더 나가 한쪽으로 꺾으면 보이는 복도는 쳐다도 보기 싫다는 듯이 재빨리 몸을 돌리며 자신이 방금 걸어서 내려온 계단의 행렬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짧은 탄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남의 글을 뺏었더군.”
“남의 글을 뺏었다니? 무슨 글을? 왜? 누구 글인데?”
꼬리를 무는 태강의 질문 행세에 야담이 휘수(揮手)하며 잠시 대화를 중단했다. 그가 말을 아끼는 동안에 그의 미간은 은밀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야.”
그 말에 더욱 놀란 태강이 역시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그럼 상습범이란 소리야? 무슨 글을 훔쳤길래 그래? 일기 정도야 훔쳐서 쓰는 거라면 그건 굳이 죄도 아닐 텐데 말이야. 어?”
어서 진실을 알려달라는 투로 태강이 재촉하니, 야담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태강을 마주했다. 찌푸린 눈살에 불안하고 불쾌한 건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러고도 한참이나 말을 아껴야 했다.
“수없이 많은 글을 훔쳤어.”
“수없이 많은 글이라고? 그럼 정말로 상습범이잖아!”
“그래. 더군다나 한 사람의 글만을 말이야.”
“뭐? 그런데 그걸 야담 네가 여태까지 몰랐다는 게 말이 돼? 그 정도로 억울하고, 그 정도로 죄를 지었으면 굳이 인간이 특별히 마음을 쓰지 않아도 알 텐데!”
쏟아지는 태강의 흥분에 기이하게도 도리어 침착해지게 된 야담이 낮은 어조로 대답한다.
“태강, 바로 그게 이상하단 말이다. 꾸준히 글을 빼앗기고도 모르는 체를 하는 그 인간의 마음이 이상하다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는 수없이 목격해온 것이 나의 삶이었을 텐데······ 빼앗기고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은 그 인간은 처음이라고.”
계속되는 번뇌를 솔직하게 말해버리자 그는 급기야 이마를 짚었고, 어떻게든 그것을 끊어내려고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간신히 감았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