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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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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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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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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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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199화

DUMMY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니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나는 무엇을 했냐는 것이지. 그런데 시간은 원래 이토록 타자(他者)적인 것이었나? 그러니까, 시간은 나와 별개로 흐르는 것이고 그렇다면 내 인생은 무엇보다도 독립적인 주체로서, 나는 삶의 주체가 되어, 그러니까 나는 이 시야의 주인이 되어······ 점점 세상을, 그러니까 사계절을,


“아아악!”


낮은 비명을 신경질적으로 내어 보낸 나나가 바닥에 주저앉더니 이내 드러눕고 말았다. 고뇌하는 그동안에는 온기가 닿았을 리 없는 방바닥은 가장 열이 오른 목덜미부터 하여서 나나의 등을 서늘하게 식혀주었다. 곧 기분이 한결 풀리기는 했지만, 워낙 변덕스러운 그것에 전부를 걸 가치는 없었으므로 나나는 또다시 울적해지고 말았다.


‘되는 게 없네, 진짜.’


나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는 모양새로 귓등을 앞으로 팽팽하게 당겼다. 처음부터 조용했던 공간에 그런 수작을 걸어봤자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니면 두 개밖에 없는 손을 갖다가 두 개밖에 없는 귀를 막아버리는 데에 썼다는 데에서 시간을 낭비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나나는 그림을 그린다는 명목으로 이젤을 구해다가 방에 들였고 다음으로는 철제 스툴을 도진의 도움으로 얻어 가져온 후 여태까지 그 위에 앉아 있었지만, 결국에 자신의 손에는 무엇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숨을 내쉬는 도중에 몸을 일으킨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 캔버스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캔버스다. 애초에 이젤과 스툴을 제외하고는 다른 도구를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왜냐고? 모른다. 실로 오랜만에 빈 캔버스를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시나 이 여백을 즐기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은 경험이란 것이다.


“나나 씨.”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 신원을 궁금해할 필요도 없이 도진의 것이다.


“왜?”


로뎅의 청동조상처럼 스툴에 앉은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나나가 대답했다. 보이지는 않아도 자신의 답을 잘 듣기 위해 방문에 가까이 기대어 섰을 도진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지금 같이 나갈 수 있어요?”

“어?”


도진의 한 말의 뜻을 잠시 골똘히 생각해본 나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을 때의 소리를 내더니 이내 또 “왜?”라고 물었다. 대화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이틀 전에 말했잖아요.”


방문을 활짝 열고 마주한 도진의 모습을 예상대로였다. 그는 문지방에 엄지발가락이 닿을 만큼 바짝 다가서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나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뭘 말인데?”


일부러 자신을 곯리려고 하거나 혹은 이제 와서 약속에서 홀로 빠지려는 속셈으로 보이는 반응 같지는 않다. 전혀 영문을 모른다는 듯이 문틀에 기대어 짓는 무구하게 어리둥절한 나나의 표정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교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전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설마 기억 안 나는 거예요?”

“······그랬었어?”


그림에 그리고 ‘사계절’에 시달려 칩거하는 동안에 방중에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잠들고 그러다가 때가 되면 깨어나는 생활의 반복이었던 지난 일주일이었다. 아니, 일주일이 확실한가? 머릿속이 어지럽긴 한데 그렇다고 속까지 울렁거리지는 않는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하다.


“나나 씨에게 괜한 일을 권한 것 같군요.”


도진은 자책 아닌 자책을 하면서 나나를 흘겨보았다.


“그렇진 않아.”


애초부터 도진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굳이 남의 탓을 하자면, 그래, 그 남자가 좋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갖은 이유를 대며 그림을 접으려고 들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가 싫어서 이렇게 머리가 얼떨떨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갈 수 있겠어요?”

“어?”


도진의 말을 듣고도 깜빡 잊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되묻고 말아버렸다. 그가 한 말을 금방 까먹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진이 했던 말을 반복하기 전에 나나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괜찮아, 이래 보여도 완전 멀쩡해. 언제 가는 건데?”


금방 준비를 마치겠다는 뜻으로 나나가 뒤로 물러서자 도진은 자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염려스럽게 쳐다본다.


“지금요.” 나나가 무리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좀처럼 떨칠 수가 없는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돼요. 나나 씨가 원한다면요.”


나나는 갑자기 굴러온 호박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진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잠시 멈추었는데, 깊게 고민할 겨를은 그다지 없던 탓에 아무렇게나 답해버리고 말았다.


“그으럼, 괜찮다니까? 조금만 기다려. 정리할 게 좀 있어서 말이야.”


무어라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잽싸게 방문을 닫아버린 나나는 우선 이젤부터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도진에게 들킬세라 살금살금 걸어 그쪽으로 이동했다.

백지다. 백지는 하얀 대신에 투명하지는 않아서 무엇도 비추는 법이 없다. 구태여 뭔가를 그 안에 집어넣고 싶거든 자신이 직접 나서야만 한다. 캔버스 표면을 무심코 쓸어 본 나나는 재차 그 화가를 떠올렸다. 왜냐하면 이 캔버스는 자신에게 오기 전에 이미 젯소칠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실에 있었던 만큼, 처음부터 그는 자신이 이 캔버스를 사용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마 물감이 스며들 때면 더욱 이 화가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젯소칠은 그의 작업이었으니까. 흰빛의 캔버스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나나는 어느 순간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를 생각하거나 그가 떠넘긴 과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적어도 오늘은 이 앞에 계속 머무를 생각이 없으니까.


***


“아무래도 백면은 날 싫어하는 것 같아.”


이미 죽은 이를 두고 서로 간의 감정을 추리하는 일은 언제라도 뜬금없기만 하다. 게다가 저건 얼핏 듣기만 해도 태강의 주관에 지나지 않의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따라서 주화는 태강을 흘깃 쳐다만 볼 뿐, 구태여 그의 혼잣말에 대꾸하지는 않았다.

양실을 떠나지 않고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적적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은 최근 그의 하루 일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어쩐지 마음이 쓸쓸해져서 꺼낸 말이었다.


“주화. 왜 아무 말도 없어?”

“혼잣말 아니었어?”


그건 그랬다. 굳이 그녀와 대화를 해볼 참으로 해본 소리는 아니었으니, 억지로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도 대답해주면 좋지 않을까?”

“네가 원한다면 말해줄 수는 있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그러고 싶진 않아.”


마침 식사를 마친 그녀는 빈 접시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떠나는 대로 그냥 두려다가 또 이곳에 혼자 남을 것을 생각하니 심심해진 태강은 괜히 그녀에게 말을 붙인다.


“주화. 너는 안 심심해?”

“전혀. 심심할 틈이 없는걸.”


그것도 그랬다. 그녀는 부지런히 천일나무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었으니.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심연도에 남아서 뭘 하는 거지?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별로 멋있는 표현이 아니니까.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 주화가 떠나버렸다.


“주화! 잠깐만! 잠깐만!”


서둘러 불러보았으나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아예 시야 밖으로 벗어나 버렸다. 그것에 아쉬운 태강이 곧바로 한숨을 쉬니 주화가 불쑥 안쪽으로 제 얼굴만을 내밀었다.


“그렇게 지루하면 밖으로 나가보는 게 어때?”

“응? 밖에? 속세 말이야?”

“그래. 어쩌면 여기가 아니라 거기에 네가 할 일이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나름의 일리가 있는 말 같기도 하다. 아니면 단지 제 마음이 그쪽으로 끌리는 것일지도. 혼잣말을 늘어놓는 일보다는 아무튼 할 일이 많기는 하지 않을까. 태강은 아직 자신의 식사는 끝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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