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181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0.12.10 23:59
조회
46
추천
0
글자
9쪽

189화

DUMMY

“말도 안 됩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또다시 벌어지자 안수는 잠시 목을 축인다는 이유로 주전자를 내려놓고 그 옆의 컵을 집어 물을 벌컥벌컥 삼켰다.


“그런데 꼭 교수님한테 전하라고 했다고 해요.”

“어째서?”


나나가 대답을 하기는 했으나 안수의 질문은 꼭 그녀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불특정 다수를 염두에 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도진에게서 정답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운명에게 말을 거는 중이다. 가야 할 방향을 모르게 되었더니 이제는 걷고 있는 길의 방향조차 모르게 되어버린, 무능력해진 운명에게로 말이다. 아니면 무능력한 것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그리고 어느 쪽이건 이롭지는 않다.


“감정을 받아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도진의 말에 안수는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야 그렇지요. 하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장난이란 말인지, 이해가 되지도 않고 아예 이해 불가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도대체 12성인이란 이런 식이라면 왜 존재하는 것인지 이제는 진지하게 고찰해 봐야 할 때입니다.”


안수가 이토록 격분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나나와 도진은 서로의 행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두 번째 시가 펼쳐진 각 두 권의 시집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시의 내용은 분명히 같으나 시의 제목은 더 분명하게 다르다. 이것을 두고 같은 시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어느 책이 진본인지 그리고 어느 시가 원작인지는 죽은 이만이 알 것이다.


“그래도······ 오히려 더 확실해진 것 같은데 말이지요.”

“더 확실해졌다고요?”


나나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제목이 없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후에 제목을 만들었다는 가설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그 슬픔의 성인이 정말로 내게 이 두 번째 초본을 전한 것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그 가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걸 의도한 게 아닐까요?”


반대로 도진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째서 직접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이런 식으로 가짜의 진본을 만들어서 보낸답니까? 아직 어느 쪽이 진본인지는 모른다만, 나나 양의 필적을 따라한 것이라면 아무래도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지요.”


이번에는 누구도 안수의 질문에 토를 달지 않았다. 누구도 섣불리 의견을 내놓을 수 없는 문제다.


“우선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더 고민해봐야겠다고 결심한 안수가 대화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책을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고서는 무어라 확실한 것을 말할 수도 없는 처지니까요. 두 사람은 우선 돌아가도 좋아요. 나 역시 이번 연구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으니 낭비할 시간이 없기도 합니다.”


나나와 도진이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두 권의 책을 동시에 덮고 머리를 싸매는 안수를 향한 나나의 목소리에 모두 자신의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연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답하려고 한다면 답할 수는 있지만, 아직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것은 여전하기에 안수는 잠깐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나나가 자신은 재촉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알리기 위해 무고함을 주장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권위 높으신 분이 시인을 밝히려고 하잖아요. 그걸 어떻게 해결하실 건지 사실 조금도 짐작이 안 가거든요. 왜, 논문은 사실을 밝히는 글이기도 하잖아요.”

“나나 양. 논문은 사실을 밝히는 글이 아닙니다.”

“그런가요?”

“논문은 특정한 무언가를 두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글이지요. 그러니 꼭 사실만을 적을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학문과 논문은 다른 거네요.”

“다르지요. 그러니 반드시 사실을 쫓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사실을 쫓지 않고,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면서 어떻게 시인을 찾으실 생각이신데요?”


나나가 묻는 대로 족족 답하던 안수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나나와 도진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때에 안수가 물경스럽게 책상 밑으로 사라졌다. 바닥 위에 있는 낮은 서랍에서 책 한 권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저번에 이야기하였었지요?”


주어를 밝히지 않으며 안수는 홍우현의 시집 『파경(破鏡)』을 내밀어 보였다.


“나는 이 시집을 끌어들일 예정입니다. 널리 이름을 알린 시인도 아니어서 오히려 파장은 더 커지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목을 딴 데로 돌리면 그만입니다. 내 글을 읽고 저주받은 성인 백면을 떠올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

“하지만 그렇게 하신다고 한들 논문이 통과될 수 있을까요? 교수님께서 더 불리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도진의 물음에 안수는 굵직한 기침 소리를 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순순히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수치스러운 심정을 들킨 것처럼 안수의 낯빛이 급격히 핼쑥해졌다.


“원치 않은 것을 강요받았으니, 상대가 원치 않던 것을 준다고 한들 그게 그거 아니겠는지요? 하여튼 달리 좋은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홍우현이라는 시인은 그저 이름을 올리는 데 지나지 않을 겁니다. 『경국』의 개별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작품들은 있어도, 『경국』 그 자체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시집은 내가 아는 한 이 책이 유일할 겁니다. 두 사람이 가져오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한 거였지만······. 그러니 많이 언급된다고 해도 고작 두 번 정도일 겁니다. 『경국』의 문학사적 의의를 위해서 오직 서론과 결론에서만 말이지요.”


안수가 말을 마치자마자 나나가 홍우현의 시집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주시하며 안수에게 논문과 관련된 또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들키게 될 수도 있잖아요. 오늘도 와서 저희에 대해서 캐묻던 사람인데 이렇게 대놓고 시집을 논문에 올리면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나나 양. 나는 지금도 충분히 곤란합니다. 그 이상이기도 하지요. 알기를 원하지 않던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버리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다는 말도 과장이 아닐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두 감수하고 그래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신 거예요?”

“그렇다고 해야겠지요. 창작에는 능하지 않아서 걱정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인물을 어설프게나마 만들어야 하니 말입니다.”


나나는 곧 책을 안수의 책상 위로 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수의 결정이 이렇게까지 확고해지기까지 그도 꽤 심란하였을 것이다. 세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을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이 월계의 달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영원히 보름달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심정을 떠올리면 되는 일이다. 모든 게 가만히 있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으니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는 대뜸 안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쉽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만들어진 것을 보는 것보다는 덜 괴로워서요. 적어도 저한텐 그랬어요. 교수님이랑 저는 결국에 같은 영혼으로 만들어진 목숨이라고 하니까, 아마 교수님도 만드는 걸 더 쉽게 생각하시게 될 거예요. 그게 아니라고 해도 제가 응원할게요.”


여름에 이른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갈수록 푸석해지기만 제 얼굴을 쓸던 안수가 손을 떼며 나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오늘 중에 보인 가장 진지한 표정이다.


“나나 양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만들어진 것을 보는 게 괴롭다고 말이지요.”

“괴로운 거예요. 그렇게 똑같이 만들 수 있을지 전전긍긍해야 하기도 하고, 전혀 제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직접 만드는 건 다르거든요. 엉성하더라도 결국에 만족하게 되고 말죠.”

“그렇다면 나도 언젠가는 내 논문에 만족할 날이 올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나나의 갸웃거리는 고갯짓에 안수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눈동자를 도진에게로 두었다가 다시금 나나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제까지 해본 적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안수는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7 216화 21.01.06 31 1 11쪽
216 215화 21.01.05 27 1 9쪽
215 214화 21.01.04 30 1 10쪽
214 213화 21.01.03 27 1 10쪽
213 212화 21.01.02 30 1 9쪽
212 211화 21.01.01 33 1 10쪽
211 210화 20.12.31 29 1 9쪽
210 209화 20.12.30 31 1 9쪽
209 208화 20.12.29 32 1 9쪽
208 207화 20.12.28 29 1 9쪽
207 206화 20.12.27 35 1 9쪽
206 205화 20.12.26 30 1 9쪽
205 204화 20.12.25 31 1 9쪽
204 203화 20.12.24 28 1 9쪽
203 202화 20.12.23 31 1 9쪽
202 201화 20.12.22 30 1 9쪽
201 200화 20.12.21 34 1 9쪽
200 199화 20.12.20 32 1 9쪽
199 198화 20.12.19 31 1 9쪽
198 197화 20.12.18 35 1 9쪽
197 196화 20.12.17 31 1 9쪽
196 195화 20.12.16 29 1 10쪽
195 194화 20.12.15 32 1 9쪽
194 193화 20.12.14 30 1 10쪽
193 192화 20.12.13 30 0 9쪽
192 191화 20.12.12 27 0 10쪽
191 190화 20.12.11 29 0 9쪽
» 189화 20.12.10 47 0 9쪽
189 188화 20.12.09 27 0 9쪽
188 187화 20.12.08 28 0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