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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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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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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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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DUMMY

주화가 천일나무로부터 자신도 근거를 알 수 없는 결론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이레 뒤의 밤이었다. 이제는 하늘을 맞대고 있기 두려운 것인지 나무가 자꾸만 굽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전히 기분 탓이라면, 그것은 아무래도 계절을 핑계로 습관적으로 그늘 안으로 숨어버리는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무의 동태를 살핀다면 바람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 전부라지만, 그것마저도 쉽게 올려다볼 수 없는 감정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아무렴,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서 이제는 하나조차 없게 되어버릴지도 몰라 존재의 위협을 받는 이 나무만큼이나 하늘이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역시 사람의 몸을 가진지라 저를 버겁게 하는 시간 앞에서 초연하게 굴 수가 없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그늘로 숨어버리고 말지.

비겁하다고 해야겠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는 않을 것 같다. 모두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나무를 돌보고 있다고 믿으니 자신조차도 그렇게 믿어버렸으니까. 믿음의 시작은 이토록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보다. 주화는 더디고 주저하는 걸음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그늘 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자박거리는 소리가 한없이 가벼운 그림자처럼 뒤를 쫓아온다. 길이 보이는 앞쪽에 다시 서서야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을 가지런히 모았다.

이제는 가까이 다가서지 않아도 나무가 썩어버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문득 지난번의 죽음을 맞이한 적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렸다. 잘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따라오던 발자국 소리 정도로 죽음을 별다를 것 없이 익숙하게 여겼던 것 같다. 나무의 지난번 죽음도 그랬으리라. 하지만 발소리를 줄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이번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치가 못하다.

한 걸음 앞으로 떼려다가 말고 주화는 도로 정자세를 유지했다. 그러고는 가지런히 발을 한 번 쳐다본 후 바람결에 맞추어 살랑거리는 나뭇가지들을 마주친다. 스치는 생명들을 저렇게까지 붙들고 있는 나무의 까닭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난데없이 재채기를 한 안수는 안타까울 만큼 충혈된 두 눈을 훈장쯤으로 여기는 모양인지 어떻게든 감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치켜떴다. 밤이 찾아온 것을 인지하면서도 단번에 납득하지 못하는지라 그는 억지로라도 눈을 뜨기 위해 애쓴 것이다.

뚜렷하게 초점을 두는 곳 없이 이마에 주름이 잡히게나 눈을 뜨려고 노력하니 오히려 머리가 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졸음을 쫓기 위해 기지개를 폈다.


“안 되겠군.”


지껄인 말은 속풀이를 위해서였다. 그래도 좀처럼 개운해지지 않는 기분에 그는 앞에 있는 책을 모조리 덮어버렸다. 잠시 휴식을 쉬할 생각으로 말이다. 백면이 쓴 시집의 초본이라고 제 앞에 등장한 두 권의 책이 정가운데에 놓여 있고 이를 중심으로 관련 서적들이 각각 한자리씩 차지하며 책상을 빼곡이 채웠다.

안수는 아직도 자신이 새로 받아들인 사실이 생소하면서도 신기한 것인지 덮은 두 권의 책 위로 그의 시선이 닿았다. 더 나중에 받고 더 크기가 작은 초본으로 팔을 뻗어 그것을 신중하게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의 제목이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왜 시집은 두 권이 되어야만 했는가. 이제는 질문은 그만하고 대답을 하도록 하자. 머리를 식히려다가 그만 더욱 노곤해지는 생각을 한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책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때 밖에서 문고리를 돌리는 마찰음 같은 것이 들려온다. 안수가 질겁하며 두 시집을 제일 먼저 들어 책상 밑으로 숨기니, 문이 활까닥 열리는 장면 다음으로 달목이 들어왔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깍듯한 고개인사로 다가온 그는 안수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두고 상황을 판단한 후 다음 말을 꺼낸다.


“책은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그것을 빼앗으려고 온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 그렇다만 누가 들어오는지 알 수 있어야 말이지요. 보통의 인간은 그런 감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방문인지요?”


질문을 하지 않기로 해놓고 다시금 하고야 마는 그것에 안수는 일말의 허탈감을 느끼면서도 호기심 하나로 꿋꿋하게 달목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갑작스러운 게 있을 겁니다.”

“소식이 있군요.”

“예.”


잠시간 정적이 원을 그리며 안수의 정신을 빙글빙글 어지럽게 만들어놓았다.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퍼뜩 눈에 힘을 준 그가 달목을 비껴간 지점 어딘가를 간절하게 응시했다. 뒤이어 따르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안수는 재차 시선을 부여잡아 달목에게로 고정시켰다.


“소식이라기보다는 부탁을 전한다는 쪽이 더욱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그답지 않게 말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 안수의 불안을 자극했다. 그러자 달목은 수락하기 난감한 청은 전혀 아니라는 듯이 두 손바닥을 보이며 열심히 휘저었다.


“교수님께서는 「달」이라고 하는 작품의 제목이 원래 없었음을 밝히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과연 마음을 들킨다는 것은 사소하거나 드러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라 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군요. 물론 그렇습니다. 시인이야 어떻게든 힘이 닿는 곳까지 구석구석 만들어볼 의지가 있지만은, 시는 그대로 둘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지요?”


왜 그런 것을 불쑥 묻냐는 뜻이다.


“꼭 그것을 밝혀야만 하는 이유는 없으시지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안수는 달목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을 무렵, 묻는 것보다 답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체감했다.


“제 마음을 아신다면 왜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그래서 역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막연하게 그렇게 느끼실 뿐이기에 짚어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이 필요한 것이지요. 게다가 거짓을 고하는 데에 있어 약간의 사실을 첨가한다는 것만큼 그럴싸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막상 일을 꾸미는 것처럼 인물을 만드려고 하니 오히려 이 편이 더욱 쉽기도 하더군요.”

“타당하신 말씀입니다.”


달목은 그가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안수가 그러했던 손짓으로다가 두 번째 초본을 꺼내 안수 앞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으니 여쭈었던 겁니다.”

“그분이라고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달목은 일부러 답변을 내놓지 않기 위해 안수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책을 펼쳐보고서는 나나의 필적이라고 하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며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백나나 양과 내일 다시 마주치고 말 겁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말입니까? 누군지 왜 말씀을 하지 않으시지요?”


달목은 제목이 생겨버린 시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들려오는 안수의 열이 오르는 반응에 홀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설마,”


안수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자 도리어 그의 얼굴은 어두침침한 빛으로 뒤덮였다.


“설마 권 교수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안 마주치게 하시면 그만인 일 아닙니까? 그리고 왜 나나 양의 이름이 갑작스럽게 언급되는지 이유가 몹시 궁금하군요.”

“그쪽이 불안을 느끼고, 또한 다짐을 그렇게 확고히 하고 있는 이상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본인의 무능력을 자백하시려는 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다만, 그저 다만······.”


달목은 뜸을 들이면서도 무엇이든 감출 수 없는 본성 탓에 어쨌든 하려던 말을 어렵사리 마치고 만다.


“그쪽의 증오에 비해 교수님께서 가지신 신념의 무게가 너무 가볍다는 것을 전해드리려는 겁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나마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려던 말과 함께 책을 안수의 시선이 내려앉는 곳에 돌려놓았다. 모든 감정의 무게가 이 연구실 안의 적막보다 무거울 리가 없을 만큼 안수의 침묵은 길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원래라면 중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백면 때문이로군요.”

“그렇다고밖에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차마 그것이 무언지 궁금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안수가 먼저 제 뇌리를 헤집어 놓은 이름을 불렀다.


“백면이라는 그 허무의 성인이 왜 없는 제목을 구태여 제목이 있는 것으로다가 탈바꿈을 하였는지.”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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