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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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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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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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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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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09화

DUMMY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명훈이 다급하게 물었다. 신랄한 눈길로 모든 장면을 지켜본 그는 궁금한 것투성이다. 그런 그를 나무라지 않으려는 듯한 처연한 미소를 보이며 안수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긴장이 풀리게 되니 잇따라 무력해진 얼굴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무 생각도 없어.”

“아무 생각이 없다니? 진작에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만,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한다기에는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겠지? 더군다나 자네가 말이야!”

“호통은 치지 마세.”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는 탓인지 안수는 저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 또 가볍고 짧은 한숨을 뱉으며 말을 잇는다.


“미안하네.”

“아니야, 아니야. 그야 속골이 아픈 게 당연하지, 당연하고말고. 어차피 내게서도 이미 전에 한소리를 들었지 않았나?”

“그랬지. 무모한 짓이라면서······.”


완성한 논문을 옆 연구실로 은밀히 가져가 명훈에게 보였던 날을 회상하는 안수의 눈빛이 해묵은 체념 같은 것으로 일렁인다. 그때 열의에 차 주장을 펼치던 입심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안수는 쓸데없는 기 싸움으로 지친 상태가 되어버렸다.


“무모한 짓이지. 아무리 그럴듯한 논문이라고 해도 말이야, 즉 문장이 수려하고 주장이 훌륭해 보여도 결국에 그 주장은 궤설이니 억설이니 그런 취급이나 받을 거라고.”


명훈은 자신의 거침없는 표현력에 놀라 그만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이번에도 사과하는 쪽은 안수였다.


“나한텐 사과할 필요가 없어. 물론 나야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잖나? 그런 생각도 말이지!”

“그렇다면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 고맙네.”

“정녕 열 번째 작품 때문이라는 게 사실이겠지?”


명훈의 질문에 안수는 마치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한 동시에 끝난 관계인 것처럼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싱긋이 웃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논문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떡하니 그 작품을 모든 목차에서 언급하고 있잖나. 사실이지, 다만 그게 진실이라고 할 자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없지만.”

“아니, 사실이니 진실이니 그런 걸 따지고 묻자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네. 실은 이게 궁금해서 자네를 보러 왔던 것인데······ 눈치가 보여서 바로 말을 할 수가 없더군.”

“그래서 그렇게 빙빙 돌려가며 딱히 감흥도 없는 이야기만 주고받았던 것이군.”

“어차피 그래도 문제가 없는 게 우리 사이지.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그냥 넘기고 싶지는 않아. 작품의 어조 때문이라면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게다가 자네는 작품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성향을 꺼리는 편이 아니었던가 싶은 거지.”


명훈의 온갖 염려는 끊기지 않고 더욱 이어졌다. 게다가 묵묵히 듣고만 있는 안수의 침묵이 가세가 되어 그를 부추기고 말았다.


“화자와 작자는 언제나 일치하지도 않고, 실은 일치하지 않아야만 하며 일치할 수도 없다고 그토록 극단의 편에 서서 자신의 주장을 전혀 굽히지 않기도 했던 날들도 있었지. 젊은 날의 과오는 쉽게 잊는 법이라고 하다만, 이것 정도야 과오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 그러니 내가 자네의 허물을 나무라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게.”

“알고 있네.”

“그런데 이번에는 왜 그런 결정을 했나? 역시 자료가 부족해서였나? 그것도 아니라면 시간이? 어느 쪽이라고 나는 마땅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해도 고작 초본 하나에······ 문헌학의 도움을 얻어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더군다나 학기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저런 사무까지 더해져서 시간도 늘 부족했을 테니.”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제 벗을 대변해주는 명훈의 적극적인 태도에 안수는 과감(過感)할 따름이라 연신 미소를 잃지 않고서 명훈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 이야기가 전적으로 제 사정을 모두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어렵사리 밝혀야만 했다.


“그래, 그 말도 틀리지는 않지. 내겐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 보다 더, 시간이 없었다고 해야 오히려 적당하겠군. 아마 나 혼자였다면 도무지 첫 문장도 완성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일세.”

“무슨 소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이 구석방 같은 곳에 틀어박혀 책만 쳐다보고 있었으면서. 나한테까지는 겸손을 차릴 필요는 없어.”

“겸손이 아니야. 사실이네.”


아마 자네한테는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을 테지만······. 애꿎은 뒷말을 삼키며 안수는 명훈의 뒤로 자리한 허공을 쳐다보았다. 탁자 위로 올려놓은 그의 손마디가 꿈틀거리며 서서히 주먹을 쥐는 모양으로 바뀌어 간다.


“생각해본 적 있나?”


안수가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뭘 말인가?”


명훈이 안수를 바라보며 미심쩍이 되물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경국』이 『경국』이 아니라면?”

“무슨! 『경국』은 『경국』으로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많이 지친 모양이기는 한 듯하네.”

“그래, 지치기도 했지. 그런데 나는 방금 이상한 질문을 한 게 아니라네. 명훈이 자네는 『경국』이 정말로 ‘자아’를 돌아보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야 첫 작품부터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이니 그럴 확률이 높지. 자네가 말한 대로 끝내는 미상으로 남은 그 시인만이 알겠지만 말이야. 이제는 우리 후손들의 것이 되었으니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겠군.”

“만약에 ‘자아’가 아니라면?”

“뭐라고?”


안수가 꺼낸 질문을 알아듣고도 제 귀를 믿을 수가 없어 명훈이 반문했다. 어느새 헤벌어진 입을 하고 살짝 흐리멍덩해진 두 눈동자를 한 안수의 얼굴에는 임의로운 환희 같은 것이 차오른다. 명훈은 여전히 알 수 없어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말 그대로야. ‘자아’가 아니라 ‘타인’을 두고 거울을 바라본 것이었고, 그 주제도 이와 일맥상통한다면 어떨 것 같나?”

“이게 자네 논문과 무슨 상관이지?”

“상관이 있다네.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이 시집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일지도 모르지. 미리 말해두겠네만, 나는 실성하지 않았다네.”

“그렇게 믿고 싶군.”


갑자기 안수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명훈이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문을 열었다. 잠자코 들어보니 「칠석」이라는 시를 말쑥하게 읊조리는 것이다.



저를 위로하지 마셔요

칠석이 돌아와도 울지는 마셔요

병으로도 늘 슬퍼하지 마셔야 해요


허전한 시름이시어 입가에 꽃씨가 들도록

여윈 얼굴로 사람을 맞이하지 마셔요


아름으로 멀어진 것을 어찌하겠어요

아, 이제는 괴어 그만하시어요

그리고 더는 돌아오지를 마셔요



암송을 마치자마자 안수가 두 눈을 번쩍 뜨며 올빼미 같은 시선으로 명훈을 쳐다봤다. 집요하게 자신을 쫓는 시선에 어리둥절해진 명훈이 슬그머니 입을 연다.


“잘 들었네.”

“그런 평가를 기대하고 시를 읊은 게 아니라네. 이 시, 어떻게 들리나?”

“······내가 어김없이 알고 지내오던 「칠석」으로 들리네만.”

“그럼 안 되지!”


안타까운 듯이 안수가 탁자를 가볍게 내리쳤다.


“나는 이 시가 진정으로 이 시집의 주제시라고 본다고.”

“그래······ 그건 누구나 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그렇다고 치지. 그리고 이 시를 근거로 자네가 시인을 여성으로 추정하는 것도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이 대화가 자네의 논문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대충이라도 알 수 없어서 이렇게 다시 자네에게 묻는 거라네. 도대체 뭔가?”


안수는 망설이라다가 혼잣말을 하듯이 또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가히 맥락을 상실한 독백 같은 그 대사에 명훈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라네.”

“사랑이라고? 어처구니가 없군.”

“그렇게 들리지 않나?”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를 그렇게 읽지 않을 거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추어진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로 인해 도모하게 되는 성장의식을 찾아내겠지.”


명훈이 씁쓸하고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안수를 살짝 외면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어불성설을 늘어놓을 줄 미처 몰랐던 탓이다. 하지만 시집이 실은 백면의 것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는 안수는 개의치 않는, 아니 오히려 더 당당해진 얼굴로 명훈을 마주했다.


“그거야 그렇게 학습되었고, 그것이 학습이라고 여기니 그렇겠지. 모두 우리의 탓이야. 그러는 편이 타당하다고 떠들어댄 건 모두 우리 같은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러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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