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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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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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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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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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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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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05화

DUMMY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서 난연 역시 그 예외에 들지는 않았다. 월촌에 이른 이후 줄곧 권태감에 사로잡힌 초영은 계절을 탓하려다가도 그 핑계가 타당할 정도로 자신이 열심히 나서서 다니지는 않은 사실이 너무도 자명한 탓에 그만 입김을 푸푸대고 말았다. 어쩌면 금이 간 자존심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분명히 그렇겠지만, 너무 잘 알고 있는 마당에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은 사실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실심한 모양으로 바깥 벤치에서 앉아 있으니 애써 외면하고 꽃을 다듬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해도 자동으로 눈길이 저쪽을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쉬폰 커튼으로 부드럽고 나긋하게 몇 겹 감싼 것처럼 내성적인 분홍빛을 내는 리시안셔스 한 송이를 내려놓고 여명은 계산대 뒤편에 놓인 자그마한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그는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로 문이 열린 틈에 얼굴만을 빼꼼 내민 후 초영의 안부를 물었다. 인기척에 초영이 몸을 살짝 비틀었는데, 여전히 한숨을 쉬고 있던 것인지 부채를 훌훌 부치고 있는 그녀의 주변 공기가 퍽 무겁게 느껴진다.


“아뇨.”


시무룩한 표정으로 툭 던진 단답에도 여명은 민망해하지 않고 그녀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리를 꼬고 앉은 초영은 여명이 자신의 옆에 앉자마자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어 자세를 고쳤을 뿐,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지는 않았다.


“뭔가 제가 괜히 죄송하네요.”


자신의 뒷덜미와 뒤통수를 어정쩡하게 오가며 매만지는 그의 손길은 적당한 때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적절히 민망해지고야 마는 그의 속내를 드러내는 행동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탓할 쪽을 찾는다면 당신의 아주 먼 조상들일 테고, 백면이 그런 선택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굳이 당신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군요.”


아뿔싸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초영은 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을 되새겼다. 그제야 그녀는 흘깃거리며 여명의 눈치를 살폈다. 딱히 상처를 받은 얼굴은 아니다. 오히려 조금 전에 다가왔을 때보다도 더 안정된 표정인 것 같기도 하다.


“기분 나빴던 건 아니죠?”

“뭐 때문에요?”

“내가 방금 한 말 때문에죠, 당연히.”

“기분 나쁠 게 뭐가 있나요? 사실이니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죠.”


만에 하나 냉소적으로 들리지도 않게끔 미지근한 태도를 유지하며 여명이 답했다. 속일 생각도 없이 그건 그의 진심이었다. 덤덤하게 길가를 응시하는 눈빛은 계절이 뿜어내는 열기만을 적당히 받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부채가 잘 듣지 않는 건가요?”


무심코 여명의 옆모습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더니, 그는 그 시선을 느끼고서 초영을 마주 보며 손으로 부채를 가리켰다. 느릿한 부채질을 하고 있던 초영은 그 말에 팔을 쭉 뻗어 부채를 앞으로 내보인다.


“듣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둘 다 해당하는 건지 너무 오래 고민했더니 모르겠네요. 차라리 고장 났다고 하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성물도 고장이 나는 건가요?”

“실제로 망가진 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단 말이니까. 과거가 보이기는 보이는데,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하는 이야기예요.”


여명은 입술을 꾹 다물고 심각해진 얼굴을 하였다. 제 딴에 이런 궁금증을 가져도 되는지 찰나에 망설인 것이다.


“저희 집안에 옛 기록이라도 제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하게도 제대로 보전된 게 마땅히 없네요.”


우선 사과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초영은 팔짱을 끼려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말고 도중에 한쪽 팔을 완전히 포개지 않고서 바로 턱을 괸 상태로 그 팔꿈치를 반대 손등에 얹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있었다고 해도 별 소용은 없었을 테니까. 그쪽이 나한테 줬던 책 한 권만으로도 충분해요. 그거라도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요.”

“소용이 없었을 거라니, 어째선가요?”

“성인(聖人)이 인간에게 의존하는 거 봤어요?”


초영의 삐딱한 말투에 흠칫 놀란 여명은 고개를 조심스럽게 저었다.


“마찬가지예요. 인간의 기록이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라고 해도 그걸 그대로 믿는다는 건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오히려 태강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더 진실에 가까울 텐데 뭐 하러 인간의 헛소리를 다 들어주고 있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책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아니었나요?”

“백면의 책이니까 그렇지, 그 애의 이런 황당한 개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심연도에 있었을 거라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내가 한여름에 부채질이나 하고 있지도 않았을 거야······ 정말 이게 무슨 짓인지!”


결국에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초영이 꼬고 있던 다리 하나를 내밀어 허공을 툭 차고 말았다. 월촌 구석에 박혀 지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했던 갖은 시도로 빚어낸 실패의 기억이 연속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쩜 흑석은 뭘 만들 거면 제대로 만들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시원찮은 부채를 만드는 바람에 내 손목만 아프게 한다니까! 성가셔도 정말······. 그렇게 열녀비 근처에서 구석구석 부채나 흔들고 다녔는데 어쩜 단 한 번도 안 보일 수가 있는 건지, 정말 짜증나지 않아요?”


뚜렷한 대상도 없이 적의를 품고 있는 그녀의 말투는 그녀가 원하는 만큼 사납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 바람을 맞고 오로지 심사가 뒤틀린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에 분해진 초영은 내내 찜부럭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골목 하나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데, 어느 시기인지 따로 정할 수도 없이 그저 바람만 일으키면 아무거나 보여주는 부채가 전부라니! 물론, 그 문제의 열녀가 밤길에 몇 번 몰래 근처를 나돌아다니는 장면을 보기는 했다지만 누굴 만나는 걸 보여준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백면을 발견하지는 못했잖아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상황이나 다름없죠.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네?”


여명은 갑자기 부릅뜬 눈으로 시선을 맞추어오는 초영의 행동에 놀라 반문하고 말았다.


“지금까지는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거든요.”

“귀찮다니요? 꽤 적극적으로 돌아다니시기도 했잖아요.”

“뭐······ 말은 고마운데, 실은 그게 아니에요.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거든요.”


긴 머리가 조금은 거추장스러운지 한 손으로 대충 질끈 쥐어 들어 올린 다음에 그 밑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손을 뒤로 꺾어 부채를 흔드는 초영이 난데없이 태연할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까닭을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여명의 표정이 점점 근심스러워진다.


“내가 사람의 기억을 읽는다는 건 잊지 않고 있죠?”

“그럼요.”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까지 대답했다. 여명을 등지는 쪽에서 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에 초영의 부채질은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텁텁한 마음은 전혀 가시지 않고서 그의 의문에 더욱 열을 올렸다.


“왜 그렇다고 생각해요?”

“네? 갑자기요?”

“이런 건 원래 예고하고 묻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여명은 말을 처음 배울 때처럼 매우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랑은······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 아닐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예기치 못한 난항을 겪는 것인 양 그는 여전히 긴장한 투로 느리게 말을 버벅거린다.


“소중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 뭔지도 알겠네요!”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초영은 특유의 깔끔하고 화사한 미소를 보이며 부채를 단번에 접었다. 그러고는 대뜸 여명의 앞으로 그것을 들이밀며 말했다.


“이건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여기에 잠시 맡길게요.”

“맡긴다고요?”


그 뒤로 더 물어야 할 질문이 남았으나 갑작스레 받아든 부채를 살피느라 여명은 중간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사이에 초영은 자신이 하고자 하려는 말만을 하고자 그 기회를 가로챘다.


“가져가도 오히려 짐만 될 뿐이에요.”

“어디를 가시려고요?”

“어디긴요? 바로 당신 집이죠.”


황당한 소식에 놀라 덩달아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만 여명이다.


“저희 집에 가신다고요?”

“당연히 집을 뒤져야 하니까 그렇지, 내가 뭐 때문에 굳이 거기까지 들어가겠어요?”


초영은 아까 대화하는 중에 대충 늘어뜨린 머리를 몇 번 매만지더니 도도한 걸음으로 금세 자신의 뒷모습을 여명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초영의 태도가 워낙에 당당한 바람에 무엇이 이상하고 잘못된 줄 단번에 모르고 그는 한참이나 지금 일어난 일을 곱씹었다.

그래도 서서히 점이 되어가는 초영의 존재와는 달리 이곳에 그녀가 두고 간 흔적은 아직도 도도하고 고결한 탓에 여명은 그녀의 작아지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아야 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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