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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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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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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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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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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01화

DUMMY

“이런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하려니 솔직히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엄숙한 안수의 얼굴은 봄에 개화할 것을 생각하여 겨울의 추위를 앞두고 가을에 수선화를 심는 자의 흙을 만지는 손동작만큼 정중하고 사려가 깊기까지 하다. 말을 얼른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누구 하나 마음을 졸이지 않은 것은 땅을 두드리는 그의 손길이 워낙에 신중한 탓이다.

나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기 싫어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기도 하고 아예 눈을 부릅뜨기도 하였는데, 그건 갑자기 맞이한 정숙(靜肅)에 이제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그렇다. 하품이 나오려는 순간에는 얼굴의 하관을 두 손으로 감싸며 일부러 콧등을 문지르는 척까지 해가며 나나는 나름대로 안간힘을 쓴다.


“왜냐하면 나는 처음에는 두 사람을 믿지 않았으니까 말이지요. 나는 아닐 거라며 자부했지만, 그런대로 학자로서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살아온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다. 백면의 유품으로 받은 반지는 임기응변으로 넘겼던 상황에서 한 거짓말대로 아내에게 주었으나, 자신이 거짓말을 한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는 자신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유일할 성인, 백면의 일부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체감할 수 없었다. 시집에 매달려야 했던 일도 그 시집이 백면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 시집에 집착해서였다. 나나와 도진에게서 건네받은 무명의 시인을 논문에 언급하기로 한 것 역시 그 시인을 언급할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느날 문득 거울을 과감하게 깨부순 시인에 대해 돌아볼 가치가 있다는 소견에 이르러서였다.

이토록 순서는 마구 뒤섞여 엉망이다. 안수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거짓말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였으며, 집념이 이끄는 데로 이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물살이 계속 부치지듯이 달려드는 본능에 그 힘을 이기려고 들지도 않았다.


“아니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이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요?”


심도를 가늠하기까지에도 꽤 시간이 소요되는 질문에 도진은 고개를 살짝 비틀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나나는 꾸벅꾸벅 자꾸만 몸을 앞으로 숙이려고 들었는데, 잠들지 않으려고 정신을 부여잡는 바람에 제 몸을 가눌 수 있는 힘을 남겨두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졸지 않고 대답해야만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잠결에 들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어떻게든 졸음과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티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가가 아닌 콧등 부근을 문질렀지만, 이미 눈빛에서 감출 수가 없는 것이 그녀의 몸상태였다.


“나나 양의 말이 맞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단 말이지요. 아니, 정확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고······ 그 먼저 내린 결론을 토대로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지요.”


서론이 있은 후에 본론, 그다음으로 결론이 있다. 그런데 거짓말이 먼저 있고 다음에 거짓말이 진실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면 결론이 있은 후에 서론과 본론이 존재하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일이란 순서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완성하셨단 말씀인가요?”


기분을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들뜬 어조까지는 숨길 수 없던 도진이 물었다.


“백면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암묵적으로 모두가 기대하고, 또 예상하고 있던 바지만 막상 사실이 된 소식에 자신이 왜 그리도 안심하는 것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도진은 안수의 대답이 돌아오자마자 마은 한 켠에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던 근심을 작고 가벼운 한숨에 실어 내보냈다.


“아무래도 이걸 나나 양과 도진 군에게 제일 먼저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리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고맙단 인사를 직접 하기 멋쩍어진 그는 약간의 민망함에 눈길을 잠시 딴 데로 돌렸다. 자신이 백면을 대표해서 존재를 숨겨줘서 고맙단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더군다나 평범한 인간이 불과한 나도진이 이런 일에까지 마음을 쓴 티를 내는 건 아무래도 자신만 우스워지는 꼴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도진 군, 아무래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물어보는 게 예의라서 묻겠습니다. 우리가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때 그럼 내가 도진 군에게서 빼앗았던 책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묻고 싶군요.”

“그것이라면,”


책의 제목을 떠올리기 위해 도진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것이라면 교수님, 『허무에 대하여』가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역시, 기억하고 있군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때 저는 그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교수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하여서 그저 넘겨드리기만 하였을 뿐이에요. 그러니 만약 책의 내용에 대해서 물으신다면 저는 아마 답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뒤로 그 책만은 다시 읽지 않았던 이유를 무어라 꼽을 수는 없겠다. 당시에는 백면이 자신의 밤을 떠나 나나의 밤으로 가버렸다는 사실에 퍽 상심하기도 했었으니, 어떻게 해서든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신의 무지(無智)를 실토하였더니 한결 편해진 마음에 도진은 안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괜찮아요. 아니, 그렇게 상관은 없을 겁니다.”


안수는 도진의 고백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처럼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다만 나는 그 책의 주제를 짚으면서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 『경국』의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그럽니다. 일종의 서문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책의 주제라면 분명히 허무에 관한 것이겠군요.”

“도진 군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맞을 겁니다.”

“제게 너무 모호한 선택지를 주신 것 같은데요.”


앞에 놓인 녹차는 진작에 식어 있었다. 그래도 목이 타는 바람에 아쉬운 대로 한 모금 들이킨 안수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애초에는 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기 위해 여러 철학 서적을 뒤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도진 군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랬지요.”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순전히 가벼운 결심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거나 시작은 그러했으니 이제 와서 불필요한 이야기라고 한들 이렇게 도진 군의 흥미를 끄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그 『허무에 대하여』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저명한 철학자에 의해서 집필된 책인데, 그래서인지 허무감에 대한 통찰력은 지금의 어느 누구라도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가히 대단합니다. 실제로 읽어보니 그렇더군요. 또한 어느 소설가는 이 책을 두고······ 정몽(正夢)이라고까지 표현하였지요.”


이야기를 듣다 말고 도진이 손짓으로 대화를 잠깐 멈추는 낌새를 보였다.


“정몽이라는 게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사실과 일치하는 꿈이라고 하여서 이 ‘허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이 단순히 개인의 신조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수없이 외면하려고 들었던 진실을 속되게 파헤쳤다고 하여서 이같이 부른 겁니다. 그 표현이라는 게 참으로 문학적이기는 해도 이 역시 거짓된 것은 없어 보일 정도로 나 역시 깊은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책의 주제가 도대체 뭐였길래 그런 건지 궁금하네요.”

“아마 도진 군도 처음에는 혼란스럽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좋아하게 될 겁니다.”


안수는 자신의 이야기가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리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도진을 마주했다. 둘의 대화가 서로의 내면을 파고들수록 도진의 옆에서 나나의 몸은 서서히 기울어져 잠에 빠지게 되었지만, 아직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대화를 먼저 멈출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도진 군은 허무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우선 떠오르는 걸 말씀드리자면 백면이 주관하였던 인간의 감정이라고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없는지요?”

“허무는······ 말 그대로 허무한 것 아닌가요? 최선을 다하여 말씀드리려고 해도 이게 저의 최선입니다.”

“그 책은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반대라면, 허무는 허무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에 안수는 시야를 약간 비틀어 도진을 바라본다.


“그래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허무는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지금 막 바뀐 도진 군의 표정을 보아하니 비록 정몽은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정설이 될 수는 없는 이설을 들은 듯한 얼굴이군요. 무리가 아니지요. 하지만 나는 비록 내가 시집에 대해서 거짓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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