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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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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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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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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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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DUMMY

감은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나나는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기가 막힌 심정으로 떠올렸다. 태강은 책을 받은 후에 바로 서점 밖으로 빠져나왔다. 얼이 빠진 모양새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이 씨를 뒤에 두고 나온 이들은 책을 살피며 걷다가 부교 위에 도달하고 말았다.

초본은 원래 한 권이어야만 하는 게 아닌지 그녀는 ‘초본’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의심해야 했다. 얼마나 힘을 준 것인지 눈알이 뻑뻑하게 느껴질 정도다. 눈을 몇 번이나 더 문지른 후에야 나나는 시야가 트인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번쩍 든 것은 아니다.


“이건 제 글씨체잖아요.”


도진과 자신의 가운데에 선 태강 옆으로 바짝 붙어 책장이 넘어가는 것을 구경하던 그녀는 심상치 못한 기운을 느끼고서 잠시 치고 들어온 것이었다.


“네 글씨체라고? 그걸 어떻게 알아?”

“당연히 제가 그 본인이니까 알죠.”


태강의 멍청한 질문에 나나가 매정하게 답했다.


“게다가 붓글씨도 아니군요.”


옆에서 책장의 구석구석을 주시하고 있던 도진이 거들었다. 이들의 의견대로 모든 작품은 먹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잉크를 사용한 흔적을 보인다. 거기다가 나나는 아주 익숙한 자신의 필적을 발견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히 초본이 아니라 만들어진 초본임은 너무나도 자명해졌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황호가 가져온 게 틀림없어!”


갑자기 책장을 덮으며 태강이 외쳤다.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었기 때문에 마치 호통을 친 것처럼 주변이 울렸다.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둘려보았다. 다행히 오가는 사람이 있기는 하여도 대화를 엿들을만한 거리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내가 대신 전한다니까?”


몇 가지 추리를 더하고서 이야기가 끝난 대로 태강은 자신이 안수에게 초본이라고 주장되어지는 책 한 권을 전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책을 앗아간 나나에게 그것을 달라는 의미로 빈 손바닥을 내민다.


“너희는 지금 가면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왜 굳이 그걸 고집하는 거야?”

“그대로 심연도에 가져가려는 게 아니고요?”


들고 있는 시집을 뒤로 숨기며 나나가 캐물었다.


“아니라니까! 돌아갈 건 맞지만, 내가 언제 그런 수작을 부리는 거 봤어?”

“아주 가까이서 잘 봤죠.”


차마 그 이름을 언급할 수는 없으나 태강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감정에 휘둘리는 성인(聖人)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나는 순순히 물건을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일이 꼬일지도 모르는데 왜 그래?”

“그럴 거 같으면 간절히 바랄게요.”

“뭐를?”

“기적 말이에요. 일이 꼬이지 않도록 하는 기적.”


말문이 막히고 만 태강은 내민 손바닥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뜸을 들였다. 그녀의 말도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행동일 수도 있다. 자신이 아닌 존재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가 온전하기를 바라는 평범한 인간의 심리가 다 그러니 말이다.


***


강의에 나가기 위해 안수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에 맞추어 도진이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그 뒤로는 나나가 시집을 품에 안고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서 있다. “들어오세요.”라는 말이 들리는 대신에 이번에는 직접 문이 열리고 말았다. 언제든 문을 열려고 문을 향해 기대고 있던 두 사람은 놀라고 말아서 뒤로 넘어질 뻔한다.


“두 사람······ 일단 들어오도록 해요.”


까무라치게 놀란 안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시계가 째깍거릴 새라 빠르게 나나와 도진을 안으로 들였다.


“왜 다시 온 겁니까? 그러다가 권 교수님을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큰일입니다.”

“이야기가 잘 안 되었던 건가요?”


도진의 물음에 안수는 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닙니다. 두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결론으로 잘 이르렀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계속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수업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당장 두 사람의 돌아온 목적이 궁금하더라도 몇 시간은 미루어야 하겠군요.”


좋지 않은 때에 찾아온 것을 깨닫고 도진이 송구스러운 눈빛으로 난처하게 눈을 사방으로 굴렸다.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 몰라 그의 시선이 방황을 하니 안수가 나서서 그를 달랜다.


“괜찮아요. 괜찮다면 도진 군과 나나 양은 여기서 기다려도 됩니다. 단,” 안수가 검지 하나를 세우며 주의를 준다. “사람이 있다는 듯이 기척을 너무 자주 내서는 안 됩니다. 이곳은 연구실밖에 없어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기도 하니 말이지요.”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니 안수는 천천히 뒤돌아서서 나갔다. 주인이 없는 곳에 있으니 드는 오묘한 감정도 잠시, 나나는 책상으로 가 원래 받았던 초본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폈다.


“나나 씨!”


정말로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그녀가 온갖 서랍을 뒤지기 시작하자, 도진이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만류한다.


“기다릴 시간이 어디에 있어?”

“하지만 그렇게 다급하게 굴 필요도 없어요. 그렇게 하면 교수님께서 오히려 더 수상하게 여기실 거예요.”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나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일어났다. 도진의 말이 맞았다. 현재 모두의 처지가 쫓기고 있는 것으로 느긋한 태도를 고집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장에 서둘러서 되는 일도 없으니 일을 더 어지럽고 산만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 복도는 조용해서 방음과 별개로 소리나 기색을 잘 들킨다고 하니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먼저다.


“알았어.”


나나가 짧은 대답으로 응하며 이제야 몸을 움직이는 속도를 늦추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지금까지 도진의 종종 책을 뜯어먹던 습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나도진, 찾았어. 여기에 있어!”


책상의 가장 맨 밑에 있는 서랍을 연 나나가 시집 두 권을 꺼내며 외쳤다. 도진이 달려와 그녀 옆으로 쭈그려 앉았다. 자신들이 도서관에서 훔쳐 안수에게 건넸던 시집을 감회가 새롭게 바라보던 이들은 이내 그것은 서랍에 다시 넣어두고 초본만을 꺼내 들고 일어선다.


“첫 장부터 세밀하게 비교하는 게 좋겠어요.”

“응.”


안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선 그의 책상 위에 있던 교재를 옆으로 밀어버리고는 도진이 초본 두 권을 나란히 두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표지를 넘기며 첫 시부터 매의 눈으로 읽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건 나나도 마찬가지였다.


“도구를 다른 걸 써서 그런지 몰라도 필체가 같다고 할 수는 없겠네요.”

“내 필체가 맞다니까.”


시의 내용을 읽지 않고 오로지 그 형식만을 따져가며 읽던 두 사람은 곧바로 두 번째로 시를 향해 다음 장으로 넘기며 시선을 움직였다. 책장을 넘기는 도진의 손길이 여간 부드러운 게 아니다.


클 때는 떠오르느라

나의 얼굴로도 가릴 수 없더니


떠오르더니 작을 때는

나의 손톱으로도 가려지로소니


이번에도 두 사람은 시의 뜻을 읽기보다는 종이의 색이나 질감, 시가 새겨진 위치, 필체 등을 비교하며 분석하였다. 이번에도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굉장히 비슷하긴 하네요.”

“뭐가?”


나나의 물음에 도진이 첫 번째로 받은 초본에 있는 시의 첫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를 쓴 위치가요. 아직 두 번째 시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해도 연과 연 사이의 간격이라든가 첫 연의 시작이 쓰인 이치라든가 가급적 글씨만 다르지, 모든 것은 똑같에 만드려고 한 게 느껴져요. 어느 쪽이 진본인지는 모르지만요.”

“넌 두 권 다 의심하는 거야?”

“그야 모르는 거죠. 나나 씨의 글씨체라고 해도······ 백면의 글씨체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어차피 우리는 백면의 일부에 지나지 않잖아요.”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새삼 되새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나의 멍한 반응에 도진이 눈치를 보다가 서서히 세 번째 시로 넘어가려고 하자 나나가 도진의 움직이는 손을 붙잡았다.


“잠시만.”


그녀는 백면을 떠올리는 생각에 잠기다가 보고 만 것이다.


“왜 그래요?”

“이걸 봐.”


나나는 도진의 손을 직접 움직이며 두 번째 시의 제목으로 가져갔다. 시의 제목이 버젓이 있었다. 그것은 「달」이었다.


“봐. 이건 제목이 있어. 아상하지 않아? 왜일까?”


도진의 손을 놓지 않으며 나나가 그와의 시선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도저히 의문이 멈추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선을 교환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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