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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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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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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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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194화

DUMMY

‘이럴 수가!’


사라진 두 사람을 허망하게 떠올리며 권기현은 옆에 보이는 돌벽을 발길질로 걷어찼다. 그래봤자 아픈 것은 제 발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이미 우발적인 행동으로 인한 통증을 느낀 후였다. 그가 느낀 극심한 탄식은 차마 속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로 하여금 눈을 지그시 감고 한쪽 손으로 얼굴의 반을 감싸쥐게 만들었다.

우왕좌왕하며 상황의 갈피마저 좀처럼 잡을 수 없게 된 그는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나나가 다시금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 나나가 사라진 방향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게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던가. 이토록 막연한 것은 제 심정으로도 충분하다. 누구도 자신과 부딪히지 못할 정도로 사나운 인상을 한 그가 도로 거리로 나왔다. 누구 하나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사람도 없이 길은 번잡하기만 하다. 인파 속으로 들어가는 기현은 훨씬 더 불쾌해진 기분에 슬며시 주먹을 쥐고 걷기 시작한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손님이라고 할 수야 없겠지만, 어쨌거나 느닷없는 방문임은 틀림없으므로 놀란 감정을 버젓이 드러낸 안수가 대놓고 툭 물었다.


“그 젊은 친구는 도대체 무얼 하는 친구입니까?”

“어느 쪽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수가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탓에 말끝을 흐리자 그것을 두고 자신에게 발언권이 돌아왔다고 생각한 기현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여자를 말하는 거요, 둘 중에 한 사람 말입니다.”

“아.”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서 안수는 상대방의 주의를 끌만한 가벼운 소리를 내놓을 뿐, 오히려 잠깐 찾아온 대화의 단절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뒤에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것을 그냥 두고 볼 리 없는 기현은 어서 원하는 정보를 캐내고자 위엄을 갖춘 태도를 보였다.


“그 젊은 친구에 대해서 궁금해서 말이지요. 옆에 있는 다른 친구 역시 관심을 끌기는 하다만, 이 친구가 내 이목을 더 끄는지라 이리 와서 묻는 겁니다.”

“그러시군요.”

“오해하지는 않겠지요? 그저 순수한 호기심 탓입니다.”


안수의 반응이 미덥지 않자 좌불안석을 하게 된 기현은 급하게 다리를 꼬며 변명했다. 그래도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그렇군요.”여서 시큰둥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다고는 해도 나나에 대해 캐묻는 것을 자신이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을 들킨 듯하다. 뜸을 들이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선은 자신의 주도에 어떻게든 맞추려고 하는 기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아하니 그러하다.


“그게 도대체 왜 궁금하신 겁니까? 직접 만나기라도 하셨나 보군요.”

“······그건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나름의 태연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그쪽이 진실을 더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도 안수는 자신의 기세를 일부러 꺾지 않았다. 어젯밤, 거짓말은 웬만해선 하지 않을 터인 게 분명한 성인이 이곳에 다녀갔고 그는 백나나와 권기현이 오늘 만날 것이라고 일렀다. 알고 있다면 명확하게 분간할 수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안수는 생각했다.


“지나가는 길에 보았는데 웬 기다란 통 하나를 어깨에 걸고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걸 들고 다니는 건 음악이나 미술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건데, 그저 원형의 통이었으니 악기를 다루지는 않을 테고 아마도 미술이겠지요. 허나 그렇다고 젊은 아가씨에게 말도 없이 다가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그래도 그때 본 장면이 잊히지가 않아서 이렇게 묻는 겁니다.”


기현은 진실을 왜곡하였다. 화구통을 차고 있던 사람은 모두가 이름이 있는 화가라고 하지만, 아직 백나나는 이름을 모르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그가 나나가 그림을 그렸던 일에 대해서는 묘하게 들어맞게 되는 진기한 추리를 보인 것이다.


“아, 그렇군요.”


아까 학회장의 몰아치는 공세에 무미건조하게 뱉은 말과 조금도 틀리지 않은 박자와 음성으로 안수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보신 그대로입니다.”

“본 그대로라.”


들려오는 대답이 불만족스러워 일부러 안수의 뒷말을 따라하니, 오히려 그는 기현을 상대로 아예 대화의 방향을 비틀어버렸다.


“예, 보신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마침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드릴 말씀이라.”

“예. 아무래도 이번 연구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자신만만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의기소침하게 보이지 않은 적당한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안수가 말했다. 그는 중간에 긴장을 한 바람에 몰래 침을 꿀꺽 삼키기는 했는데, 이미 신경을 딴 데 빼앗긴 기현이 알아채지 못했기에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아니, 정 교수가 거의 홀로 조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리도 빨리 끝난단 말입니까?”


희소식이기는 하나 믿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힌 권기현은 맞은편에 앉은 안수를 더욱 삐딱하게 바라보며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금세 반대쪽 다리를 꼬아 앉았다.


“이미 말씀을 드리기도 하였거니와 아마 기억을 하고 계실 겁니다.”

“뭘 말입니까?”

“이번에 말씀하신 그 두 젊은 친구 말입니다. 그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하였지요. 또한, 계속해서 초본을 읽다 보니 점차 시인이 누군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뭐더랍니까. 신기하기도 하지요.”

“······거참.”


자신이 뜻하던 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는데도 무엇이 못마땅한 것인지 기현은 표정을 굳히며 씁쓸한 눈빛으로 안수에게서 눈을 돌렸다. 자신은 점점 불안해져만 가는데 그런 자신과 대조될 정도로, 확정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모두 떠안은 안수는 점차 안정세에 접어드는 모습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색한 데가 있게 그를 나무랄 수도 없으니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만으로 족하는 것이다.


“아마 이번 학기가 끝날 무렵에 제출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 급할 건 없습니다. 어차피 학회는 정해진 날짜에 맞추어서 움직이니.”

“하지만 기대하셨던 거잖습니까.”

“기대한다고 해서 서두르는 것이 될 수는 없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좀 전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이쯤에서 대화가 다시 끊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안수는 민망해진 나머지 슬그머니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렸지만 금방 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다른 친구를 뭘 한답니까?”


기현의 질문이었다. 그가 새로운 질문을 꺼낼 줄 몰라 당황해버린 안수가 이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미술을 하는 친구 옆에 있던 남자 말입니다.”


그러자 벗어날 수 없게끔 자신의 물음으로 못을 박아버리는 학회장이다. 가능하다면 그들에 대해서는 들키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별안간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어낼 수도 없는 일이다. 워낙에 미숙한 분야이지 않던가. 그러니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답하는 것이 한계다.


“여러 가지를 공부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여러 가지라.”

“뚜렷한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재능이 많은 유망주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신만의 분야가 없는데도 유망주라 할 수 있단 말인지요. 흔치 않은 인물이기는 하다만.”

“정해진 것이 없는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잘 안다라.”

“그야 문학이 제일 먼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안수의 역질문에 잠시 흠칫한 기현에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어물쩡 넘기는 게 최선이었다. 이제 그는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어서 그렇다.


“나는 아마 이번 검토에서 빠질 거요.”

“빠지신다고요?”

“그래요, 이번에 나를 갑자기 부르는 곳이 하나 생겼거든. 그리고 정 교수의 실력을 내가 믿고 있으니 이런 결정을 내릴 수도 있던 겁니다.”

“그건 과찬이십니다.”

“아니지, 그렇게 사양할 것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논문이 발표된 후에야 본다는 건 아니니까 너무 마음을 놓지도 말아야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군요.”


세 번째다. 아니, 네 번째던가. 대화가 이어지는 흐름에 따라 즉흥적으로 대답했더니 안수는 자신이 같은 어조로 같은 대답을 내놓은 횟수도 헷갈리게 되었다. 아무렴. 그것은 자신이 바라던 바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생애 처음으로 가장 창의적인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요.”

“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상급자가 일어나는 속도에 맞추어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안수가 이어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별다른 인사가 더 들려오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를 더 기쁘게 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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