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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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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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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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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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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12화

DUMMY

날이 밝아오기 전이다. 그래도 날은 줄곧 더운 탓에 창문을 열어놓은 이후로 안으로 스며드는 달빛과 전등불에 기대어 밤을 새우고 말았다. 붓을 놓지 않고 나른하게 졸던 나나는 결국에 몸을 아래로 웅크릴 적에 붓털에 얼굴을 갖다 대고 말았다. 서늘하고 낯선 촉감에 경기하듯이 깨어난 그녀는 냉큼 눈을 뜨려다가 하얀 점 같은 것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는 점을 깨닫고는 곧 손등으로 눈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잠깐을 졸아버리는 바람에 그사이에 제 얼굴에 바보 같이 낙서질을 하고 만 것이다.

서둘러 일어난 나나는 옆에 놓아둔 높이가 다른 스툴을 보았다. 물통과 팔레트가 형형색색을 이루며 그녀의 먼지가 묻은 시야를 약 올렸다. 이대로는 도저히 그림을 마저 그릴 수 없을 것이란 판단하에 그녀는 손이 가벼워지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씻기 위해서다.

멀끔한 안색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더 붓질에 몰두해야 했던 나나가 밖으로 나온 때는 정확히 오후 4시가 지난 무렵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벽시계를 확인한 덕분이다. 완성된 그림은 두고 나와서 두 손은 더없이 자유분방하기까지 하다. 제 수채화가 마르기까지 넉넉하게 시간적 여유를 두고 싶은 욕심에서 얻은 자유였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찾아올 수 있을 만큼이나 익숙해진 거리로 들어서자 나나는 먼저 화실을 찾기 시작했다. 제일 투명한 데다가 그 안도 제일 하얘서 그런지 찾는 일은 더없이 쉬웠다. 그런데 저번에 몇 번 이 거리를 지났을 무렵마다 이젤이든 캔버스든, 버젓이 주인을 기다리는 사물이 하나쯤은 놓여 있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텅 빈 벽 하나만이 행인들을 멀겋게 바라볼 뿐이다.

괜한 불안감이 슬슬 엄습해오자 나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빨리 길을 건너가 화실의 유리문을 어깨로 밀었다. 우려했던 대로 문은 좀처럼 물러나지를 않았다. 화가가 없는 것이다. 아쉬움에 한숨이라고 할 수는 없는 가벼운 숨을 길게 내쉬었는데, 그동안에 한 번 더 문을 있는 힘껏 밀어보았으나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뒤쪽에서 낯선 여자의 새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제게 하는 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나가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짐작한 것이 맞았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로 검은 옷을 입은 단발의 여자가 자신을 생뚱맞게 쳐다보고 있었다. 노려보듯이 얼굴이 차갑기까지 하다. 그런 여자에게서 냉정한 적막을 깨뜨릴만한 다른 말이 나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나나가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저한테 하신 말이에요?”

“그쪽 말고 달리 누가 있어요? 그나저나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맞아요.”

“그렇다면 소용없어요.”


단지 그림을 완성했으니 언제쯤 시간이 괜찮을지 약속일을 정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런데 이 냉소적인 태도로 낯선 사람을 대하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 여자가 누구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문제의 화가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나는 시뜻해진 마음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창 너머를 바라보느라 자연스레 여자를 외면하고 말았다.


“언제 돌아올지도 몰라요.”

“뭐라고요?”


주어가 불명확했지만, 필시 그 남자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상황과 대화의 맥락이 모두 한 얼굴을 떠올리게 했으니. 나나는 엉성하게 높아진 목소리로 물으며 기가 막힌 듯한 표정으로 다시금 여자를 마주 보았다. 반응을 보이고도 황당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면으로 바라본 여자의 얼굴에도 비슷한 심정의 것으로 보이는 퍽 탐탁지 않은 기세가 잔뜩 서려 있다.


“이틀 전이거나, 정확히 언젠지는 몰라도 아마 가장 최근이라 할 수 있는 과거의 시점에 도망갔거든요.”

“도망이라고요?”

“가끔 있는 일이에요.”

“가끔 있는 일이라니······ 그쪽은 대체 누구세요?”

“그건 내가 물어야겠는데요. 그쪽은 누구길래 선생님 화실 문을 그렇게 거리낌 없이 열려고 하세요?”


그녀의 신경에 걸리는 것이 아마도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렇지 않게 이곳에 들락거리려던 나나의 태도 말이다. 그래도 저렇게 예민해진 데에는 더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으리라.


“도망갔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정체도 모르는 사람한테 알릴만한 정보는 아닌 것 같네요.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렇게 되면 우리 쪽에도 손해가 막심하니까.”


나나는 여자가 한 말을 곱씹는 동안에 본능적으로 ‘우리’라는 단어에 꽂히고 말았다. 아마도 일 문제로 관계가 있는 여자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일부러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 나나는 자신을 상대에게 먼저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무식하게 모든 걸 공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림을 다 그렸다는 이야기를 전하러 왔어요.”


이 정도면 대충 알아들었겠지. 역시나 나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여자는 쌀쌀한 태도를 금방 풀어버리고 연거푸 주저하는 걸음을 보이면서 나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림을 다 그렸다니? 선생님과 무슨 관계에요, 당신?”


그러면서 여자는 조금 전에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나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 손아귀에 힘이 대단해서 나나는 오만상을 쓰며 억지로 그 손을 밀쳐야만 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요.”


무슨 사이라고 말하기에는 별거 없는 사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아무 사이도 아닌 셈이지, 화가와의 관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나가 답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무덤덤한 태도가 여자를 더 자극한 것 같다.


“거짓말하지 마요! 그림은 무슨 이야기예요? 혹시 선생님이 당신한테 따로 그림을 맡기거나 따로 부탁해놓은 게 있어요?”

“그런 건 아닌데······ 누구시길래 그런 걸 물어요?”

“그야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죠!”


여자는 답답한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발길질로 바닥을 쿵 내리쳤다. 제 발바닥만 아플 뿐일 텐데도 그런 기색은 전혀 내지 않고 나나를 불안하게 쳐다보기만 한다.


“이번에 발표되는 선생님 작품을 모두 우리 미술관에서 전시하기로 했는데, 그래서 일정도 모두 선생님이 원하시는 날짜에 맞추어서 조정해놨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사라지시고 말았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죠!”

“미술관이라고요?”

“그래요, 그러니까 당신은 누구예요? 원체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분은 아니었으니 애인 같아 보이지는 않고······ 그림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니 심상치 않은 관계 같기는 한데 말이에요. 이제 내 사정을 말했으니 나한테 그 정도는 들을 자격쯤은 있는 걸 알겠죠? 부탁이니, 말해봐요.”


나나는 난처해지고 말았다. 화가와 자신 사이에 그림이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건 그의 그림이 아니었다. 아무런 가치가 없을지도 모르는 제 그림에 불과했다. 잔뜩 기대하는 눈치로 저를 뚫어지도록 응시하는 여자에게 어째선지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저, 그러니까.”


결국에 말을 더듬으며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자는 잠자코 그 시간을 견디며 어서 나나가 원하는 진실을 털어놓기를 기다린다. 부담감이 여름날의 그림자처럼 진득해지고 말았다.


“그림을 배우는데요, 사실.”

“그림이라고요?”


여자가 재빨리 놓치지 않고 물어왔다. 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선생님의 제자라는 말인가요? 말도 안 돼! 제자를 둘 나이도 아니고,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들다면서 자신밖에 모르는 분인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여자가 속사포처럼 쏟아놓는 말은 하나같이 그 남자에 대해 믿을만한 정보들이었다. 나나는 여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이게 중요한 건 아니죠, 그렇다면 봤겠네요?”

“네? 뭐를요?”


거짓말을 들킨 사람처럼 놀란 나나가 화들짝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여자의 시선으로부터 심리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아무리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뜨거운 낯을 숨길 수는 없다. 별안간 무엇 때문인지는 알고 싶지 않지만, 여자도 기대감에 상기된 얼굴빛으로 두 눈을 반짝거렸다.


“뭐겠어요? 선생님의 그림 말이에요.”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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