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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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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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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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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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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13화

DUMMY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아침 댓바람부터 노기등등하게 나섰던 여자가 아주 딴판으로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 들어왔을 때에는 실내에 있는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가면을 쓴 것처럼 급조된 눈웃음이 한 번씩 저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탓이었고, 그다음은 유아독존으로 살아가던 여자가 예상에는 없던 인물을 하나 달고 등장한 탓이었다.


“딱 한 점만 본 거라니까요?”


그 인물의 정체는 다름아닌 나나였다. 하이힐을 신고도 성큼성큼 주저없이 전진하는 여자의 속도에 맞추어 종종걸음으로 연신 뒤를 쫓는 자신의 꼴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던 그녀는 최대한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여자에게 속삭였다.


“그건 중요치 않아요.”

“그게 중요하죠! 고작 하나 잠깐 본 것 갖고 제가 뭘 떠들 수 있겠어요!”

“지금 여기에는 선생님이 작품을 완성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천지예요. 둘러봐요. 저 어리둥절한 얼굴들.”


여자가 복도 한가운데에서 멈추더니 고갯짓으로 양옆으로 놓인 퍼즐 책상의 진열을 가리켰다. 그러자 멀리에 떨어진 이들은 파티션 뒤로 급하게 얼굴을 감추기도 했다. 나나는 여자의 지시대로 주위를 살피면서도 지금 당장 자신들에게 꽂히는 시선이 절대로 그 달아난 화가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여자에게 말한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요?”

“관련은 있죠. 선생님이 돌연 잠적하는 바람에 지금 다들 아주 난감한 처지가 되어버렸거든요. 참 어이없지 않아요? 아이를 잃어버려도 이보다는 더 체계적인 문제에 놓이게 될 거예요.”


여자는 제 멋대로 나나를 잡아 이끌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질질 끌려가다시피 나나가 억지로 움직이는데도 단 한 번도 돌아보지를 않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출입구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의 문을 열 때까지 혼잣말스러운 수다를 멈추지도 않았다.


“하긴, 선생님도 워낙 애 같은 면이 있으시니까 어린애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네요. 그쪽이 슬픔도 더 클 테고. 어쨌든 그쪽이 지금 우리의 한 줄기 희망이라는 걸 알 필요가 있어요. 이미 봤으니 알겠지만, 우린 정말로 절박한 상황이거든요. 그래요. 고작 그림 한 점이라도 말이에요.”


여자가 문을 닫은 동시에 나나를 그 근처에 홀로 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제 공간으로 들어서자 더욱 마음대로 구는 여자의 태도에 나나는 쭈뼛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전에 본 적도 없는 그림들이 사면을 멋들어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그야 당연했다. 나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모든 그림이 전부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저 여자의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나예요.”


여자는 책상 위에 새롭게 놓인 서류를 스르륵 훑어보며 대충 답했다.


“월계 최고의 화가들에게서 직접 받아낸 거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작품은 은서월 선생님의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죠.”

“안타깝다니요?”


책상 맞은편으로부터 정가운데에 걸린 그림을 보던 나나가 문득 호기심을 느끼고 허리를 반쯤 돌린 다음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있다.


“작년에 타계하셨잖아요.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비록 연세는 있으셨다고 해도 아직 그분의 작품세계는 반의 반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었는데.”


그 사람이 언제 죽었든, 또 어떤 삶을 살았든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방금 그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여자가 그림 속 입고 있는 노란 실크 원피스를 표현하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였는지 원단의 질감에 감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화가를 바라보는 여자의 표정이 미묘한 데가 있으니, 썩 자신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풍은 아니라고 나나는 생각했다.


“가만.”


때마침 뒤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나나의 집중을 방해했다.


“그림을 그린다면서 은서월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네?”


거짓말을 한 것도 없는데 마치 무슨 꿍꿍이를 들킨 사람인 양 소스라치게 놀란 나나가 뒤돌아 여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말았다. 저를 노려보는 눈빛이 매섭다 못해서 신들린 것 같이 사납다. 어떻게든 찰나에 모든 변명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야 한다.


“아, 그게 말이죠. 사실은 제가 그림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그래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제자로 받아줬단 말이에요? 믿을 수 없어.”

“제자가 된 건 아니고요, 애초에 사제관계가 전혀 아니거든요.”


여자는 이번에는 수상한 눈길로 나나를 주시했다. 그 시선이 불편하다 못해 따끔하기까지 해 도무지 견딜 수 없다.


“뭐, 저는 상관없어요. 세간에 그런 쓸모없는 소문을 알릴 생각도 없고.”

“쓸모없는 소문이라니요?”

“여자 말이에요. 워낙 사생활에 관해 간섭받기를 싫어하시는 분이죠.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특히 그렇지만, 유독 심하신 면이 없지 않아 있거든요. 아무튼 상관없고 관심도 없다는 것만 알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체감상 밖보다 더 안이 더운 것은 저 여자가 전부 헛소리를 늘어놓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나나는 기가 찬다는 듯이 소리질렀다. 그러나 여자는 그 반응에는 대꾸하지 않고 갑자기 딴소리를 나긋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상하긴 하네요. 선생님의 여자 취향까지 굳이 주제 넘게 따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평소에 그림을 그릴 때나 그림에 대해 토론을 할 때 이야기하셨던 완벽한 여성상에 대한 말씀을 떠올려보면 그쪽이 전혀 연상되지를 않거든요.”

“그거 욕이에요?”

“욕이라기보다는 의심이라는 거죠.”


전혀 악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여자가 하는 독설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나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렇다 할 맞대응을 펼치지 못하고 꿍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무튼.” 이윽고 여자가 이제야 제대로 나나의 골난 모습을 상대한다. “도와줄 거죠? 그저 어떤 그림을 봤는지, 그리고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해내서 있는 그대로 나한테 이야기만 해주면 돼요.”


나나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돌리며 더욱 표정을 구겼다.


“어차피 전시회는 취소될 거 아니에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꼭 그렇지는 않다니요? 사라진 사람을 그럼 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야 하죠, 선생님이 반응만 하신다면 말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정말 그림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초보로군요.”


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나의 옆으로 또각또각 걸어나와 지금까지 나나가 자신을 대신하여 상대하고 있던 그림 속의 제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마저 이었다.


“선생님 화실 앞에서 만났을 때 내가 이야기했죠? 선생님께서 이틀 전에, 어쨌든 과거에 도망갔을 거라고. 예전에 정확히 이틀 전에 작품을 전부 들고 달아나신 적이 있어요. 그것도 우리 미술관에 잠입하셨던 모양인지 밤새 작품을 몽땅 갖고 가셨죠. 자기 작품을 도둑질해서 도로 가져가다니······ 다들 괴짜라고 떠들어대기는 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전시회를 취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당시 관장님께서 취소하지 않고 강행할 것을 주장하셨어요. 그리고 일이 있어났던 거죠.”

“일이요? 무슨 일?”


확실히 괴짜스럽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화임에 분명하지만, 그 뒷일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진 나나가 재촉하는 어조로 이제는 여자의 옆모습을 주시했다. 여자는 뜸을 들이다가 비장의 카드를 들고 있는 자처럼 여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나나를 향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시회가 시작되는 당일, 모든 작품이 그대로 돌아온 거예요. 선생님께서 직접 그림 하나하나를 전부 걸어놓으시기까지 하셨더군요.”

“밤에 경비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매우 신통방통한 일이죠. 안 그래요? 나중에 여쭤봤더니, 며칠 더 작품들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런 짓을 하셨던 거래요. 또 모르죠. 이번에도 전시회 당일에 갑자기 작품을 들고 나타나실지.”

“재미있는 이야기기는 한데요. 하지만 그땐 그림을 본 사람들이 있었고 전시회 주제도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때랑 지금은 매우 상황이 다른 것 같은데요.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다면서요.”


여자는 팔짱을 낀 채로 한쪽 눈썹을 가파른 높이로 움직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애꿎게 물어본다는 듯한 항의의 얼굴이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데려온 거죠.”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상관없어요.”

“이건 상관있어요!”

“그럼 소용없다고 해두죠.”


여자는 나나의 반박을 더는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몇 걸음 걸어가 나나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멈추더니 뒤돌아 급기야 나나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참, 인사가 늦었네요. 나는 우인영이에요. 명월미술관의 기획운영단장이기도 하죠. 우선 앉아서 이야기부터 할까요? 되도록 그쪽이 봤다고 하는 선생님의 그림에 대한 것부터 말이에요. 실은 그것 말고 당신에게서 궁금한 건 딱히 없거든요.”


악수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나나가 멍하니 그 손을 내려다보니 여자는 덥석 나나의 팔을 직접 잡아채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타의에 의해 흔들리는 제 팔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나나가 흠칫 놀란 얼굴을 들어 여자의 작의가 다분한 미소에 걸려들고 말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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